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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미군 폭격에 유린된 땅, 매향리를 가다

[2022 평화통일시민강좌] ③ 전만규 매향리 미공군 폭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위 위원장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인 평화통일시민행동(대표 이진호)의 '2022평화통일시민강좌'를 연재합니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이하는 평화통일시민강좌는 국가보안법, 북한바로알기, 한미관계, 미중전략경쟁, 평화기행을 주제로 4월 16일부터 12월 17일까지 매월 세번째 토요일 오후 3시, 신촌에서 진행됩니다.

아래는 지난 6월 18일 전만규 매향리 미공군 폭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위 위원장이 매향리에서 진행했던 현장 강연 및 기행을 정리한 주요 내용입니다.

▲ 전만규 매향리 미공군 폭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위 위원장 ⓒ평화통일시민행동

2000년 6월 2일. 한 달 전 있었던 미군 오폭에 대한 항의 기자회견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신 차리기 힘들 만큼 강력한 소음과 진동이 매향리를 울렸다. 매향리에 폭격 훈련을 알리는 황색 깃발 9개가 올라갔다. 당시 매향리 미 공군 폭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전만규 위원장이 황색 깃발을 찢어서 내려 버렸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던 미군 폭격훈련장 쿠니사격장의 기총사격은 그해 8월 중단되었고 2005년 8월 농섬을 비롯한 매향리 폭격훈련장 전체가 폐쇄되고 주민들에게 돌려졌다.

사람이 살고 농사를 짓던 마을 한가운데에 사격훈련장이 있었던 곳, 주민들이 갯벌에서 고기를 잡고 바지락을 캐던 바다와 농섬에 하루 600개가 넘는 폭탄 투하가 있었던 곳, 평화를 되찾기 위한 주민들의 처절한 싸움이 있었던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를 찾았다.

폭탄비가 쏟아졌던 매향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매향리 농섬에 폭격연습이 시작되었다. 미소냉전이 무너지기 전인 1980년대 말까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어느 날은 새벽 두 시까지 폭격연습이 진행되었다. 특수한 기간에는 3주, 24시간 내내 폭격 훈련이 진행되었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던 쿠니사격장 내에 폭격 표시판을 설치해놓고 마을 상공을 선회하면서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발사하니 필연적으로 인명피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임신 8개월의 임산부가 오폭으로 사망하고 12살의 소녀가 포탄 파편에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 불발탄을 가지고 놀던 네 명의 아이들이 그 불발탄이 터져 사망했다. 피해 주민 713가구 4000여 명. 오폭 사고와 불발탄 폭발로 사망한 사람 12명. 중상이나 다친 사람은 15명이 되었다.

소음으로 인한 주민들의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주민 대다수가 난청을 앓고 성격이 포악해지기도 했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태평양 미 공군사령부 산하 한국주둔 제7공군 51 전투 비행단은 일일 평균 11.5시간 훈련을 진행했다. 일일 15~30분 간격으로 하루에만 600차례의 사격이 이루어졌으며 연간 훈련 일자는 250일에 이르렀다.

고온리. 영어 발음으로 쿠니(KOON-NI)사격장으로 부른 이곳을 미군들은 1955년 해변언덕에 곱게 피어있던 해당화 군락지를 중장비로 밀어내고 기총사격장과 폭격 연습장을 만들었다.

전쟁과도 같은 공포와 소음이 당연한 것으로, 한국인이면 으레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매향리 주민들은 전만규 위원장을 선두로 하여 1988년 마을 한복판의 미군기지 앞에서 싸움을 시작했다.

1988년 12월 12일 당시 미군기지 앞, 현재의 매향리 평화역사관이 있는 곳에서 첫 집회를 개최했다. 1989년 2월 새벽, 형사들 100여 명이 투입되어 주민대책위원들을 체포해갔다. 그때 마을 중고등학생들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화염병을 만들어 미군기지 경비초소와 미군 기지 시설에 투척하며 항의 행동을 벌였다. 더 큰 소요사태가 발생하니 경찰은 대책위원들을 풀어주었다.

▲ 미군 사격 훈련의 표적으로 쓰인 컨테이너 박스 ⓒ평화통일시민행동

한국 대통령보다 더 유명했던 전만규

1989년 3월 당시 최대 한미연합군사훈련인 팀스피릿 훈련 기간에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언론에는 대서특필 되었던 쿠니사격장 미군기지 점거 투쟁이 일어났다. 팀스피릿 훈련을 앞두고 한국의 국방부는 전만규 위원장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을 불러들여 훈련 기간 항의행동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전만규 위원장이 이를 거부하니 미군이 전만규 위원장의 농지에 자갈을 들이부었다. 전만규 위원장은 미군이 떨어뜨린 불발탄의 뇌관과 폭약을 제거하여 만든 종을 울려 마을 청년들을 모았다.

150명의 주민은 사격장 내 관제탑을 점거하고 레이더 등을 파괴하고 불을 질러 미군이 폭격 훈련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지하벙커로 숨은 미군들을 구출하기 위해 완전무장한 기동타격대가 헬기로 출동하자 주민들은 헬기의 착륙을 막기 위해 맨몸으로 드러누웠다. 기동타격대는 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갇혀 있는 미군들을 구출해 갔다.

이때의 상황은 한국에는 언론사 한 곳에만 짧게 보도되었지만 미국에는 크게 보도되었다. 미군기지가 점거되고 방화와 파괴가 이루어졌으니 미국민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다. 당시 미국언론에는 한국 대통령보다 '테러리스트 전만규'가 더 자주 나왔다고 한다. 당시 로이터통신에 보도되었던 기사를 담당 기자가 팩스로 보내주어 자료로 소장하고 있다.

한미 양국은 발칵 뒤집혔고 전만규 위원장에게 수배가 떨어졌다. 하지만 전만규 위원장은 멈출 수 없었다. 여의도 통일민주당 당사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그 버스 안에서 자신에 대한 수배 뉴스를 들었다고 한다.

통일민주당 당사로 들어가기 전 마포서 형사들에게 연행이 된 그는 1989년 6월 2일 군사시설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처음 구속돼 1심에서 징역 1년 6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8개월만인 1990년 2월 석방됐다. 그의 구속과 함께 동네 주민 50여 명도 군사시설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주민들이 직접 폭탄 제거에 나서다

미군 폭격 54년 동안 쏟아부은 폭탄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불발탄과 중금속 오염이 상당했지만, 미군은 제대로 된 환경정화 없이 한국 정부에 반환했고 한국 정부는 국방부, 해양수산부, 국토부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농섬과 그 주변 갯벌을 환경정화 없이 방치했다.

주민들이 불발탄을 화물차에 싣고 상경해서 삭발까지 하며 투쟁했지만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하루속히 농섬 주변 갯벌에서 안전하게 조업하기를 원했던 주민들이 직접 폭탄 수거 작업에 나섰다.

가을걷이에 쓰였던 콤바인을 개조하여 궤도 바퀴를 달아 갯벌을 가로질러 폭탄 수거 작업을 했다. 크기가 3m, 900kg이 넘는 폭탄이 무수히 박혀 있었고 1950년대 투하했던 불발탄도 있었다. 10여 년의 수거 작업 끝에 모아진 탄피들을 매향리 평화역사관 앞에 전시해 놓았다.

주민들이 폭탄을 수거해 놓으니 그제야 공군 폭발물 처리반이 나와 뇌관이 살아 있는 폭탄들을 수거해서 뇌관 제거 후 다시 가져다 놓았다.

아직도 화약 연기가 나는 농섬

주민들은 겉에 있던 폭탄만 수거했을 뿐 갯벌에 파묻혀 있는 탄피들은 갯벌 속에 그대로 있다. 밀물과 썰물을 겪으며 갯벌의 탄피들이 농섬으로 밀려오고 이 탄피를 수거하는 주민들이 여전히 있다. 오랜 시간 갯벌에 묻혀있던 탄피들은 화약이 공기와 접촉하자 연기가 나고 불이 붙기도 한다.

나무가 많아 짙을 농(濃)자를 써서 농섬이 된 이 섬은 미국의 폭탄 투하 훈련으로 섬의 3분의 2가 날아간 상태다. 나무들이 울창했던 섬은 폭격 훈련으로 아름드리나무들이 사라졌지만 폭격 훈련이 중단된 지 17년이 지난 지금, 보라색 노란색 들풀들이 자라고 천연기념물 물새들이 찾아온다.

▲ 농섬에 여전히 남아있는 탄피를 들고 설명하는 전만규 위원장 ⓒ평화통일시민행동

쿠니사격장(koon-ni range)에 남아 있는 미군기지 건물

미 공군의 육상사격장이었던 쿠니사격장 안에는 매향리 평화기념관이 개관을 앞두고 있고 유소년 야구단을 위한 야구장과 평화생태공원이 조성돼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평화기념관의 위령비에 오르면 매향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육상 기총사격 표적판이 있던 곳은 마을 한가운데 있었다.

인근에 민가가 있어 전쟁상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A급 훈련소가 쿠니사격장이었다. 바다와 육지를 더해 2400만 제곱미터(690만 평)의 규모를 갖춘 아시아 최대 공군 폭격훈련장이었다. 이곳은 주한미군뿐만 아니라 필리핀, 오키나와, 괌에서도 날아와 폭격 훈련을 진행했다.

경기도 1호 건축자산으로 등록된 매향리 쿠니사격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미 공군사령부 산하 한국주둔 제7공군 51 전투 비행단 소속 쿠니 에어 레인저스 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애초에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군들이 사용하던 건물들도 철거할 예정이었으나 주민들이 강력하게 건의하여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곳에는 미군 숙소와 유흥시설, 사격통제실, 헬륨 저장소, 체력단련실, 장교 막사, 식당과 사무실, 위병소 등이 남아 있다.

JAMIE KOON-NI RANGE MASCOT, 18 YEARS

쿠니사격장에 들어서니 비석이 눈에 띈다. “JAMIE KOON-NI RANGE MASCOT 18 YEARS. 8 MAR 92”. 반려견의 죽음에 대해서도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만들어주던 미군이었다. 그러나 미군의 오폭이나 불발탄에 의해 죽은 아이들은 보상은커녕 장례비조차 받지 못했다. 그 아버지들은 갈기갈기 찢어진 자식을 가마니에 담아 지게에 지고 모래밭에 묻어야 했다. 우리의 현대사는 참혹했고 국민은 벙어리로 살기를 강요받았다.

이곳은 전투기들이 폭탄을 싣고 출격해 목표물에 투하하면 그 목표물에 정확하게 맞았는지 채점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병력이 필요 없고 미군 10여 명 정도가 주둔했다. 미군들의 휴식을 위해 실내 농구장, 춤추며 술 마실 수 있는 유흥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은 이후 전투기 소음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리모델링 할 예정이다.

폭탄 투하 전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정확하기 알기 위해 미리 풍선을 띄웠었다. 그 풍선에 넣었던 헬륨 저장소와 전투기와 교신했던 통신안테나도 남아 있다. 2층 건물의 사격통제실에 올랐다. 미군들이 전투기를 통제하면서 폭격결과를 채점하던 곳이다. 저 멀리 야구장이 있던 곳에서 컨테이너와 자동차를 표적으로 삼아 소형 폭탄 투하 훈련을 하고 해변에는 원형 표적을 걸어놓고 기총사격훈련을 했다.

오키나와 등의 해외에서 출격해 오는 조종사들은 처음에는 지형을 잘 몰라 오폭 사고를 많이 내서 마을에 폭탄이 많이 떨어졌다.

▲ 매향리 평화기념관 ⓒ평화통일시민행동

기억하기 위해 빼앗아 전시한 곳, 평화역사관

평화역사관이 있는 곳은 기지폐쇄 투쟁이 한창이던 당시에 투쟁본부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1988년 12월 12일 첫 집회를 열었고 1995년에 개인이 지은 농사 창고를 임대해서 투쟁본부로 썼다.

이곳은 매향리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고 육상 기총사격과 소형 폭탄 투하장, 그리고 농섬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전투기들은 훈련을 위해 저공비행을 했고 바로 이 옥상을 통과했다. 여기서는 미군 조종사들의 헬멧까지 다 보였다.

평화역사관에 전시된 많은 것들은 전만규 위원장과 주민들이 미군들한테서 뺏은 것이다. 전쟁 공포를 기억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당시의 탄피와 건물들을 보존해야 했다. 바닷물이 빠진 갯벌 위에서도 달릴 수 있도록 보트에 프로펠러를 단 수륙양용보트가 있다.

미군의 야간 폭격 훈련 시 유도선을 설치했어야 했는데 밀물 썰물에 구애받지 않고 농섬에 왔다 갔다 할 이동기구가 필요했던 미군이 개조한 것이다. 미군이 마지막에 철수할 때 미군 책임자가 본국으로 가져가려고 했던 것을 전만규 위원장이 뺏어 이곳에 전시해 놓았다.

평화역사관에는 농섬과 육상사격장 내에서 표적으로 쓰이던 컨테이너와 자동차가 구멍이 숭숭 뚫린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 표적물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교체되었다고 한다.

50년 미군 폭격 훈련 기간 동안 매향리는 미군의 훈련장이었을 뿐이며 주민과 마을은 훈련 중인 미군에게 실전과도 같은 긴장감을 주는 장치였을 뿐이었다. 매향리 주민들의 처절한 싸움으로 폭격훈련장은 폐쇄되었지만 미군은 태백 필승사격장과 직도로 훈련장을 옮겨가 여전히 우리 땅을 과녁으로 삼아 훈련을 일삼고 있다.

군산 앞바다에서 70여 km 떨어진 직도는 무인도로 중형 폭탄 투하 훈련을 하고 있고 영월 태백산의 필승사격장은 기관포 사격 등 재래식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미군 조종사들이 훈련 효과를 거둘 수가 없어서 불만이 많다고 한다.

이밖에도 포천 로드리게스 훈련장, 포항 수성 사격장에서 끊임없이 진행되었던 탱크와 아파치 헬기의 사격 훈련으로 인한 진동과 소음으로 주민들이 고통받아 왔다. 미군은 이에 항의하는 주민들에게 "헬기의 소음을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는 소리'로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전만규 위원장의 TV토론 출연 당시, 한 토론자가 그렇다면 미군 폭격장이 어디로 갔으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 전만규 위원장의 답변을 소개한다.

"미군 폭격으로 우리 주민들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이 폭격장이 어디론가 옮겨져서 또 누군가 피해를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미군 폭격장이 아예 필요 없는 세상이 와야 한다"

50년 전쟁과도 같은 공포를 겪었던 매향리는 이제 평화와 생태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코로나로 뜸해지기는 했지만 평화를 고민하는 학생들이 찾아오고 갯벌 체험을 위해 유치원 어린이들도 이곳을 찾는다.

매향리 평화마을 건립위원회 추진위원장이기도 한 전만규 위원장은 매향리 평화기념관이 개관하면 꼭 다시 찾아와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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