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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에 첫 전투…'수고했다 미안하다' 한 마디라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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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7살에 첫 전투…'수고했다 미안하다' 한 마디라도 듣고 싶다"

[인터뷰] 한국전쟁 72주년 맞아 당시 '소년병 참전' 김인환 옹을 만나다

"17살에 전쟁터에 끌려갔는데… 미안하다, 고맙다 소리도 못 들었어."

한국전쟁 이후 38선이 그어진 지 어언 70여 년이 지났다. 각 보훈 기관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참전용사들에게 합당한 예우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희생해가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만큼 그에 합당한 예우와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관심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중에는 '대통령긴급명령'에 따라 만 14~17세의 나이로 전장에 투입됐던 '소년소녀지원병'도 있다. 국가보훈처는 약 2만5000명의 소년병이 한국전쟁에 투입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병역의무가 없음에도 불구, 전투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에도 1~2년 동안 군에 머무르며 국방에 일조했던 소년병들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국가유공자'가 아닌 '참전유공자'로 분류되고 있다.

현행 국가유공자법에 따라 상이등급 1∼7급의 부상을 입었을 경우에만 국가유공자로 지정해 예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소년병 출신 참전용사들은 국가보훈처 등 관련기관에 수차례 국가유공자로의 지정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프레시안은 한국전쟁 때 소년병으로 참전했던 김인환(89) 옹을 만나 당시 전장에 투입됐던 과정과 사선을 넘나든 아찔했던 경험담을 들어봤다.

▲한국전쟁 소년병 참전유공자 김인환(89) 옹ⓒ프레시안(박종현)

□ 훈련도 없이 전투에 투입… 군번도 없이 지낸 8개월

경기 군포시 보훈회관에서 만난 김 옹은 1950년 8월 피난 도중 단 17살의 나이에 헌병에게 이끌려, 군번도 없이 전투를 치르게 된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경상북도 상주중학교에서 장래 교사의 꿈을 키우던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날이기 때문이다.

▲김인환(89) 옹의 군 시절 사진. 백마고지. ⓒ프레시안(박종현)

김 옹은 "이른 아침 군에 입대해 저녁에는 당시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다"며 "신령전투와 영천전투 등에 수색대로 참전했으며, 경주에서는 적을 추격하던 도중 파편이 튀어 오른쪽 다리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부상으로 인해 야전병원 등에서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으며, 이듬해 1월에는 다시 전장에 투입됐다. 당시 그는 무릎을 구부리지 못해 볼일도 볼 수가 없어 겪었던 고초를 토로하기도 했다.

김 옹은 영천으로 이동하며 적군에 완전 포위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작전 중 강을 건너다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전우도 눈 앞에서 직접 목격했다. 총기 고장을 해결하는 도중, 전장 이탈자로 오인받아 총격을 당할 뻔 한 일도 털어놨다.

이 같은 기억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머리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1951년 2월 정부의 학도의용군 해산명령과 함께 대통령의 복교 지시 담화가 있었음에도 불구, 당시 소년병들은 일반 학도병들과 다르게 모두 현역 정규군인라는 이유로 복교 조치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김 옹의 군생활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한국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살인이다. 그걸 막기에 10만여 명의 국군은 병기와 인력 등 전체적인 부분에서 역부족이었다"며 "그러다 보니 국가(수호)에 대한 집념만 있던 소년병 1만여 명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김인환(89) 옹의 군 시절 사진(오른쪽). 백마고지. ⓒ프레시안(박종현)

□ 잃어버린 배움의 시기… 풀 곳 없는 억울함

그가 전역한 것은 휴전 이후 2년 가량이 지난 1955년 4월이었다.

당초 교육자를 꿈꿨던 김 옹은 가장 억울했던 것으로 복교를 하지 못한 것을 꼽는다.

김 옹은 "당시에는 중학교만 나와도 교사의 꿈을 키울 수 있었지만, 복교가 불가능해지면서 내 인생은 군생활로 인해 전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전쟁이 끝나고도 5년 동안은 적에게 포위 당하는 악몽을 꾸면서 온전한 생활이 불가능했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또래 친구들은 학교를 졸업해 꿈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학교는커녕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해 미래에 대한 꿈마저도 꾸지 못했다"며 "당시 국가에서 받은 것이라고는 위로금 5만 원이 끝이었다. 전쟁 한 번으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차이가 나게 됐다는 게 한탄스러웠다"고 토로했다.

그러던 중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은 국가도, 주변인도 아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어'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 시절 초등학교 때 일본말을 배웠는데, 이게 또 밑천이 됐어"라며 "소년병으로 인해 뒤쳐진 것을 주경야독으로 메웠다. 결국 한일 합작회사에 입사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제 살 길을 찾았다"고 회고했다.

늦게 나마 김 옹의 이같은 사연이 알려지자 각급 기관들은 그를 방문해 심심한 위로를 전하기도 했다. 실제 2008년과 2018년에는 군포시에서 그에게 표창을 수여했으며, 2010년에는 그의 모교였던 경북 상주중에서 60여 년만에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참전용사로서 정훈교육이나 보훈교육 등 실적을 인정받아 2017년에는 경기남부보훈지청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가 진정으로 위로를 받고 싶은 곳은 다른 기관이 아닌 국가보훈처다.

김 옹은 "전후 당시에는 내 몸 하나 생각했던 사람은 잘 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만 들었다"며 "소년병을 투입했던 국가와 지휘관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사후관리는 제대로 했어야 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더라도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고 한탄했다.

□ 한국전쟁 소년학도병의 호소

김 옹은 지금까지도 국가보훈처, 국방부, 국회 등 관련 기관에 소년병의 억울함을 알리고 있다.

그는 호소문을 통해 소년병들이 △낙동강 전선에서 전력 회복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일조한 점 △전역을 늦춰 장기복무 시킨 점 △학습권을 박탈시켜 미래를 잃게 만든 점 등을 토대로 소년병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김인환(89) 옹의 군 시절 사진(오른쪽 아래). 경기도 포천. ⓒ프레시안(박종현)

김 옹은 "얼마 전 군부대에서 정훈교육을 진행할 때 장병으로부터 '국가를 위해 희생했는데 지금 남아 있는게 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며 "당시 나는 자신이 희생됐다며 국가를 원망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개인 신념으로서는 그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는 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법전을 모두 들춰봐도 나이 어린 중학생들을 현역병으로 징집할 수 있었던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며 "당시 군 지휘관들이 종군 소년병들을 헌법과 병역법 관련규정은 물론, 대통령의 복교 지시 담화조차 인위적으로 지켜주지 않았던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시대적 변화가 있지만서도, 학생들의 정확한 역사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조차 소년병을 징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국가보훈처에서는 우리의 명예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마저도 거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옹은 마지막으로 "이제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의 국격에 걸맞게 소년병의 예우에 대한 합리적인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며 "국가에서 지금이라도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소년병들의 한을 풀어줬으면 좋겠다. 바람은 다른 게 없다. '수고했다' 한 마디면 족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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