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金芝河), 뭇생명들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는 죽임의 문화에 온몸으로 저항한 비극의 주인공이 마침내 무대에서 퇴장했다. 1941년부터 2022년까지 그는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생존자로,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새 하늘 새 땅'을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그가 갇혀 있던 감옥을 탈출하지는 못했다.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1974년 1월」)의 이마에는 슬픔과 고통과 투쟁과 명예와 패배와 배신의 낙인이 찍혀 있다.
「황톳길」과 「타는 목마름으로」를 비롯한 빼어난 시편들을 절규처럼 토해낸 저항시인, 「오적(五賊)」을 비롯한 담시(譚詩)로 박정희 군사독재의 본질을 폭로하고 풍자하여 감옥으로 유폐된 민주투사, 희곡 「금관의 예수」와 마당극 「진오귀굿」으로 민중연극의 새 지평을 연 극작가, 「풍자(諷刺)냐 자살(自殺)이냐」,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 같은 독창적인 평론과 시(詩) 선집 『꽃과 그늘』의 후기인 「깊이 잠든 이끼의 샘」이 바로 그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학적 쟁점이자 미학의 준거가 된 민중문학의 도저한 이론가, 심오한 생명사상가이자 동학연구자, 전인미답의 생명문화운동을 열어젖힌 실천적 행동주의자.
'시인 김지하'는 그를 부르는 일반적 호칭에 불과할 뿐, 그의 본질에 부합하는 이름은 결코 아니다. 그를 따라다니는 숱한 찬사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김지하는 여전히 '활동하는 무(無)'이다.
김지하의 육신은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의 혼은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그의 상상력은 끝을 모르고, 왕성한 '구라'는 여전히 생동한다. 첫 시집 『황토』가 독자들에게 당혹과 공포를 안겨주었듯이, 그의 담론들은 여전히 우리의 친숙한 고정관념들을 전복시킨다.
그는 언제나 참된 의미의 전위(아방가르드)였다. 서정시, 담시, 마당극, '대설(大說)', 그리고 생명담론으로, 그는 언제나 기존의 고정관념들을 깨뜨리고 상식을 뒤집어엎었다. 비난과 찬사는 의례 아방가르드에게 따라다니는 법, 그는 감옥에서 얻은 깊은 병에 시달리며, 병을 스승으로 삼아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헤쳐왔다. 그리고 "내 생명을 살리는 일로부터 나의 생명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했으나 이런 비난과 찬사 사이의 긴장과 고통은 평생 그를 편안하게 쉬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1970년대 유신시대의 혹독한 죽임의 감옥 속에서 '빨갱이'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구하던 저항시인에서 생명담론의 전도사로, 동학의 개벽사상과 증산교의 천지굿을 통해 한반도의 해원과 상생을 이룩하려던 문화운동가로, 그리고 마침내 현대 서구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개벽의 꿈을 실현하려는 문명개벽론자로 그는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기수였던 김지하가 감옥이라는 한계상황에서 '생명'이라는 화두에 눈을 뜨고, 동학을 비롯한 한국사상의 맥락 속에서 동서양의 생명사상을 녹여 자기 나름의 독특한 생명담론을 빚어낸 것은 20세기 후반부 한국문화사와 사상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그의 생명사상에 대해서는 비판과 옹호가 팽팽히 맞서고 있으나, 어쨌든 한 시대를 상징하던 시인이 민주화운동의 지평을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으로 끌어올린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생명담론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고도의 농축된 시적 언어로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어떤 대목에서는 손에 잡힐 듯이 친근한 이야기로 생명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풀어내지만, 때로는 고답적인 상징언어와 천의무봉의 상상력으로 우리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태고의 시간대로 비약하거나 성층권을 벗어난 무한공간으로 질주하기도 한다.
어떤 개념의 그물에도 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유목민적 상상력, 어떤 장르로도 포괄할 수 없는 도도한 장광대설, 어거지를 쓰자면 '우리시대의 크나큰 민중광대'라는 이름이 그나마 그에게 어울릴 법도 하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민중문화운동을 선도한 가장 풍성하고 독창적인 노마드적 예술가이자, 우리시대 척박한 사상의 황무지에 새로운 민중사상·민중문화운동의 씨를 뿌린 아방가르드에게 붙일 수 있는 호칭은 '민중광대'가 제격이다.
사실 시인, 극작가, 평론가, 사상가, 운동가의 재질을 두루 갖춘 재주꾼이 곧 광대가 아닌가. 광대의 '삼삼구라 빙빙접시'를 어찌 서구적 미학 개념과 담론체계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바흐찐 식으로 구비(口碑)적 민중언어의 이야기꾼이라고 불러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비천하고 풍요로운 구비문학의 사육제'라는 표현은 그럴듯하지만, 김지하는 장편소설의 이야기꾼과는 생판 족보가 다른 사랑방의 이야기꾼이나 소리판의 광대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 넓고 큰 재주꾼, 광대(廣大)가 바로 그의 이름이다.
첫 시집 『황토』의 후기에서 김지하는 '악몽'과 '강신(降神)'과 '행동'의 시를 추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그는 억눌린 민중의 절규와 원귀들의 한을 전달하는 무당으로서 시대의 어둠을 헐떡거리며 기어나가는 피투성이의 포복을 계속했다. 그런데 이러한 삶과 텍스트의 일치, 삶과 싸움의 일치는 "세계에 대한, 인간에 대한, 모든 대상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의 작품들은 모두 이같은 "사랑의, 뜨거운 사랑의, 불꽃같은 사랑의 언어"이다.
김지하 문학의 원형질은 바로 이러한 약동하는 뜨거운 사랑의 맥박, 뜨거운 육성의 생생한 느낌이다. 그의 삶과 문학은 늘 내면과 외면의 이중구속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간절한 염원으로 요동치고 있으며, "타는 목마름으로" 새 하늘 새 땅을 찾아 헤맨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메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황톳길」 첫머리)
여기서 "나는 간다 애비야"라는 직접화법은 "나는 간다"라는 서술형과는 생판 다른 직접적인 호소력과 생동감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온다. '나'라는 시적 화자는 넋두리나 독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라는 '애비'에게, '가마니 속에서 죽은 애비'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있다.
독자는 여기서 폭염의 한낮에 시뻘건 황톳길을 따라 철삿줄에 묶여가는 '나'가, 죽어 가마니에 덮여있는 '애비'에게 던지는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순간 독자는 마당판의 관객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직접적인 호소력은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이라는 구절의 반복에 의해 증폭된다. 이 구절은 마지막 연에서도 긴박한 호흡으로 반복됨으로서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관객의 반응을 계산하고 긴장감을 고조시켜 자신의 호흡에 일치시키는 솜씨는 바로 노련한 광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황톳길」을 비롯한 서정시와 「오적」을 비롯한 담시, 「진오귀굿」을 비롯한 마당극(마당굿)은 장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민족적 정서를 바탕으로 판소리와 탈춤, 가사, 민요 등 민족전통의 형식을 원용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대체로 구어체이면서도 독자나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네거나 주고받는 '이야기체'로 되어 있다.
1970년을 기점으로 민중광대 김지하는 텍스트와 삶의 일치를 추구한 서정시와 독창적인 민족형식인 담시와 마당극,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생명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중문화운동의 질풍노도시대를 열었다. 그 영향력은 문단을 넘어 연극(채희완, 임진택을 중심으로 한 마당극운동, 인혁당 사건을 다룬 연우무대의 「4월 9일」이나 극단 아리랑의 「인동초」 같은 기록극), 미술(오윤의 민중판화), 음악(김민기의 민중가요), 영화(장선우의 「성공시대」 등), 카톨릭농민회와 한살림운동 등 여러 방면으로 확산된다.
1980년대 이후 김지하는 담시와 '대설'을 통한 왕성하고 다성적(多聲的)인 외향적 발언에서 점차 내향적 성찰과 침묵으로 이행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서정시와 담시, 희곡, 담론 등을 뭉뚱그려 보면 발언의 총량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시의 경우, 초기의 풋풋하고 피맺힌 절규와 중기의 무성한 '구라'가 점차 잦아들어 필경 잎 떨군 앙상한 가지처럼 짧은 시행 몇 줄만 남았다가 마침내 묵언(默言)으로 접근하지만, 이와 반비례하여 이른바 사상 담론은 풍성해지고 다양해진다. 초기의 김지하는 글을 통한 발언이 왕성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글의 양은 줄어들고 말의 양은 많아지는 것이다.
광대는 언제나 관객과 몸짓과 사설로 댓거리한다. 김지하도 언제나 관객에게 직접화법으로 호소하기를 좋아한다. 그가 글보다 말 쪽으로 쏠린 것은 광대의 체질상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지하는 1980년대 이후 주로 시사적 화제의 대상으로만 주목을 받았다. 그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침묵은 이유야 어떻든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현상을 간과하는 직무유기일 것이다. 이제는 그의 말과 글, 즉 텍스트 전체를 차분하게 검토할 때가 되었다. 김지하가 없었다면 20세기 후반부의 한반도는 얼마나 쓸쓸하고 헐벗은 적막강산이었을까.
그러나 김지하라는 큰 산은 틈이 많은 빈 산이다. 노년의 김지하는 청년 김지하 자신을 부인하는 듯한 자기모순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필화사건을 일으킨 문제의 장시 「다라니」와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같은 시론(時論)들, 심지어는 그의 난초 그림과 병(病)과 침묵까지도 함께 거두어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 30년 군사독재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과 거기서 태어난 자들이 할 일이 아닐까.
이 글은 2002년 2월 문예미학회에서 염무웅 선생 회갑기념 특집호로 발간한 논문집 『민중문학』에 실린 졸고 「광대(廣大)의 상상력과 장광대설(長廣大舌)」을 축약, 수정한 것이다. 앞으로 이 논문을 수정, 보완하여 본격적인 김지하론으로 발표할 생각이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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