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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남성만 탄다? … "여성 배제할 게 아니라 구조 개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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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남성만 탄다? … "여성 배제할 게 아니라 구조 개선해야"

인권위, 해운 분야 교육·노동 현장에 '성차별 구조' 시정 권고

남성중심적으로 이루어진 업무환경을 이유로 여학생보다 남학생을 선호하는 실습 및 채용 관행은 성차별인가.

국가인권위원회가 '그렇다'고 답을 내렸다. 13일 인권위 차별시정위원회는 해운 분야 A 국립대학교의 승선실습생 선발 시 여학생 차별 사건에 관한 결정문을 발표하고 해당 대학교 총장에게 "학교실습과 현장실습에서 성별 균형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할 것"을 권고했다.

해당 사건은 피진정 대상인 A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직접 인권위에 진정한 사건이다. 3학년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해기사 승선실습 과정에서 "여학생은 남학생에 비해 민간 해운회사에 위탁하여 실시하는 현장실습 선발 비율이 현저히 낮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진정인들은 "현장실습이 졸업 후 취업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어 현장실습 기회가 적은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취업 등에서 불리한데, A 대학이 이러한 관행을 방치하는 것은 성차별"이라며 진정을 제기했다.

A 대학의 승선실습은 학교실습선에 승선하는 '학교실습'과 위탁 해운회사 배에 승선하는 '현장실습'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해운회사 측의 인턴십과 유사한 현장실습은 학교실습에 비해 "어떤 종류의 취업에도 유리하다"(인권위 조사 참고인)고 평가받는다.

인권위는 조사 결과 "최근 5년간 A 대학의 승선실습 현황을 보면 남학생은 80% 이상 현장실습을 하는 반면, 여학생은 39%가 현장실습을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성별에 따른 취업률 또한 차이가 났다. 최근 5년간 A 대학 졸업생 취업률은 남학생의 경우 매해 80%를 상회하고 높게는 89%에 육박하는 데 반해 여학생은 평균 61%, 낮게는 49%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여성 취업률만 놓고 비교했을 때도 현장실습 여학생의 취업률(85.2%)은 전체 여학생 평균 취업률(61%)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A 대학 해사대학 졸업생 취업률에 관한 인권위 조사 결과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인권위는 여학생이 현장실습 기회에서 배제되는 이러한 흐름이 A 대학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닌 '해운 분야 노동시장 전체의 성차별 구조'를 강화하는 일이라고 봤다. 해운 분야 노동시장은 현재 "취업 선원 총 3만 3565명 가운데 해상 분야에서 근무하는 여성이 50~60명에 불과할 정도"로 "여성의 진입이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있는데, 이는 "대학교 입학단계에서 여학생 정원을 15%로 제한하고, 해운회사들도 현장실습 및 채용 시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 등의 관행이 지속되기 때문"이라는 게 인권위 측 지적이다.

해운 분야 교육현장 내의 성별불비례성이 노동시장 내의 성차별적 구조를 공고화한다는 지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인권위는 지난 2006년에도 여자 신입생을 전체 모집 정원의 10%로 제한한 목포해양대학교의 일반 전형 제도를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라 지적하며 시정을 권고한 바 있다. 당시 진정인은 목포해양대 신입생모집 1단계 전형의 합격점인 640점을 초과한 703점을 받았음에도 여성 정원 제한으로 신입생모집에 탈락하여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2006년 목포해양대와 이번 A 대학은 인권위 조사 과정에서 거의 동일한 반박을 제시했다. 신입생이나 현장실습 모집에서의 여성 배제·제한 현상은 '업무 특성상 해운업계 측이 여성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란 주장이다. 가령 목포해양대학교는 2006년 조사 당시 "해운업계 측에서 현재 선박에서 여성이 근무하기 위한 시설이 미비하여 여학생의 3학년 승선실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아울러 여학생의 취업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제기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A 대학 또한 이번 조사 과정에서 "(해운 분야는) 남성 위주로 운영되어 옴에 따라 국적선사의 경우 여성 해기사가 생활할 수 있는 환경(여성전용시설 및 공간)이 미비한 선박이 대부분"이며, 병역특례 등의 조건이 없는 여성은 남성에 비해 조기 퇴직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사측이 "채용과 같은 역할을 하는 실습생 선발에서도 남성을 선호하고 여성을 원하지 않는다"고 반박의견을 제시했다.

인권위는 '교육현장이 업계 측의 이해를 전적으로 수용할 필요는 없으며, 업계의 이해 자체도 개선해야 할 지점이 있다'는 입장이다. 13일 결정문에서 인권위는 "해운회사 측이 주장하는 여성의 조기 퇴직률 등은 실제 검증된 바가 없으며, 해운회사 측도 인재를 채용하기 위하여 일정 정도 피진정대학의 승선실습 제도를 이용하는 측면이 있으므로, 피진정대학이 해운회사 측의 이해를 전적으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해운 분야 노동시장이 남학생을 선호하는 경향성 자체에 대해서도 인권위는 "해운 분야의 노동시장에 남학생을 선호하는 실습 및 채용 관행이 있다면, 이는 오히려 적극 시정해야 할 문제이지 취업의 전 단계인 실습생 선발 등 교육․훈련의 기회에서 여학생을 달리 대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봤다. 이어 인권위는 업무 환경을 개선하지 않고 남학생 선호경향만을 강화하는 관행은 "여성이 해운 분야 노동시장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는 구조를 공고히"하므로, 이를 개선하기 위해선 오히려 "여학생의 현장실습 비중을 늘리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권위 조사에 참여한 참고인 진술 내용. 인권위는 남성의 경우에도 병역특례 조건 기간이 끝나면 해상직보다 육상직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지적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이에 인권위는 해양수산부장관에게도 △여학생 현장실습 비율을 남학생과 동등한 수준으로 개선할 방안 마련 △여성 선원의 승선을 위한 선박 시설 등에 대한 실질적인 개선 조치 △해기 면허 소지 선원에 대한 성별 통계 구축 등을 권고했다.

한편 해운 분야와 같이 남성중심적 업무환경으로 여성의 진입이 어려운 노동영역에선 지난 몇 년 간 '남성 선호 경향을 정당화할 게 아니라,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여성의 직업선택 폭이 넓어지면서 소위 '남초'였던 노동 영역에 여성의 진출이 늘고 있지만, 남성중심적 환경이 바뀌지 않는 탓에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성차별 및 성폭력 등에 쉽게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20년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과 송옥주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심상정 정의당 의원 등이 공동주최한 '양성 평등한 건설현장을 위한 제도개선 마련 토론회'에선 여성 건설노동자의 수가 전체 건설노동자 수의 10% 안팎까지 늘어났음에도 남성중심적으로 설계된 노동환경이 변하지 않아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성희롱 등 성폭력 피해나 성차별적 발언, 화장실 이용 불가 문제 등에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 바 있다.

같은 해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특정성별영향평가에선 해양 전문인력 양성 및 채용 정책이 양성평등 윤리 기준 개선 권고 10대 분야에 선정돼, 이번 인권위 결정문이 지적한 여성 승선실습 기회확대가 주요 개선 과제로 제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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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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