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은 남산의 서쪽 끝자락에 있다. 포석사라는 사당(祠堂; 제사지내는 곳, 절이 아님)이 있었다고 하는데 돌 수로와 함께 지금은 고사한 당산나무 고목과 얼마전 까지 마을 사람들이 모여 동제를 올리던 돌 제단도 있지만 경주시대와 연관지을 유적은 아니라 한다. 포석정 수로는 여기 숲 가운데 지표면에 단단한 화강암 돌 63개를 조각해 이었다. 동서 긴축은 10.3미터, 짧은 폭은 4.9미터의 전체 길이 22미터를 돌아나가게 한 전복모양 수로를 통해 흐르는 물길에 술잔을 띄우며 즐기던 신라인의 풍류가 행해진 곳이다. 22센티 폭, 26-22센티 깊이의 수로를 이룬 돌들은 평균 30센티 폭의 크기이다. 전체 모양을 보면 입수구에서 들어온 물길이 포석정 수로 전체를 지나가는데 맞춰 공학적 각도를 계산해 설계한 것처럼 보인다.
"물 들어오는 입수구가 약간 높고 물 나가는 뒤쪽의 지대가 약간 낮습니다."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이현숙 씨가 말했다. 포석정 바로 위쪽에 남산의 깊은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있어 이 물길을 이용했으리라 한다. 어떤 잔을 써야 엎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물길에 실려 나가게 했던가는 치밀한 계산이 따랐을 것이다. 수로가 주름 잡히듯 하는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치며 잔을 붙잡아 둠으로서 수로를 빠져나가기 까지 8-10분의 시간을 확보해 그 사이에 여흥을 즐기는 것이었다. 수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을 인원은 십 수명이 될 것 같다. 이런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은 한국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에만 있고 서울 창덕궁 후원에도 비슷한 수로가 새겨져 있어 인조가 이곳 바위에 글을 새겨놓기도 했다.
포석정의 돌들은 흩어져 있던 돌들을 다잡아 일제 강점기에 한번 수리를 했었다고 한다. 입수구에 거북모양의 조각이 있었다고 이 동네의 옛 사람들 간에 전해져 온다. 실제로 본 사람은 모두 고인이 되어 이 거북조각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주변에 조그만 우물이 있는데 1960년대 이전 마을에서 사용하던 것이라고 한다.
포석정과 관련이 깊은 고사로 49대 헌강왕의 풍류가 전한다. 왕이 이곳에 와있을 때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그와 함께 춤을 추었다. 아마도 산신과 왕이 같이 추는 2인무로 안무된 춤을 공연했던 것 아닌가 한다. 흥이 일어난 자리에서 추어진 즉흥무일 수도 있겠다. 궁중무용으로 전해지는 5인이 추는 처용무가 그 비슷한 것 아닐까 상상해 본다. 신라사의 비극도 신라 말 55대 경애왕 때 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백제 견훤의 군대가 이곳을 쳐들어와 경애왕은 피살되고 왕비도 처참한 운명을 맞았다. 신라멸망의 예시였다. 경애왕의 피살이후 신라왕실이 포석정에서 어떤 행사를 가질 수 있었을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수도와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국가적인 행사를 가지거나 참가자들이 풍류를 즐길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신라멸망 이후 천 몇 백년간 포석정이 어떻게 한국사회와 예술계에 수용되었는지 궁금해 진다.
"포석정의 수로를 월지 입수구 수로와 비교하기도 하지만 두 곳은 각각 기능이 아주 다릅니다. 안압지의 돌 수로는 흘러가면서 이물질을 걸러내는 정화작용을 할 뿐 곡선을 이루며 술잔을 띄워 실어 보내는 그런 기능은 없습니다"고 이현숙 해설사가 설명했다.
지금 포석정은 풍화되는 돌 수로를 보호할 어떤 건물도 없고 수로의 서사적인 분위기와 입수의 중요기능을 장착했을 돌 거북의 모습도 알 수 없이 모호한 상태에서 수로의 첫 시작 돌도 깨어진 채이다. 똬리처럼 한 번 휘돌은 수로의 배수구는 입수구 가까운 쪽으로 돌아와 땅에 스며들 듯 파묻혀 보인다. 원형은 지금보다 웅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입수구와 배수구 사이의 공간에 현재 200년생 느티나무 하나가 자라고 있다. 경주관광용 사진은 단풍든 나무와 어울린 포석정을 소개한다. 식물학자 고 최병철 박사는 2011년 생전에 이 느티나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포석정 수로에 붙어 자라는 약 2백년생 느티나무 뿌리가 수로의 화강암 돌을 들어올려 아마도 정밀한 각도를 계산해 조각했을 수로의 귀한 원형을 파괴하고 있다."
"포석정을 그렇게 방치하면 안 된다. 자연의 물길이 아니고 돌 홈에 물길을 만들어 잔을 띄우려면 구조물의 각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대인들은 그걸 다 계산해서 술잔이 자빠지지 않고 생각대로 흘러 떠내려가도록 수평과 각도를 맞춰놨는데 200여년 된 조선시대 느티나무 하나가 그 옆에 방치되어 나무뿌리가 굵어지면서 포석정 돌길이 위로 들리고, 틈새가 벌어지면 정교하게 설계한 고대건축 수로가 파괴된다. 지붕으로 더 이상의 풍화를 막고 나무는 없애든지 경관 상 굳이 두겠다면 미리 예측을 해서 뿌리가 돌 쪽으로 뻗지 못하게 해야 했다. 잘 다듬어서 많이 안 크게 하고 뿌리가 돌 틈으로 들어가거나 돌을 들어 올리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포석정 느티나무 뿌리에 대한 최교수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하고, 느티나무는 지금도 입수구 자리에서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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