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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지하는 어떻게 투사의 길에 들어섰는가?

[김지하를 위한 변명] ②

고(故) 김지하의 49재 날인 오는 25일 오후 3시,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해원상생을 위한 '고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가 열린다고 한다. '시인 김지하'가 아니라 '친구 지하'를 떠나보내는 마당에 감회가 새롭다. 그와 함께했던 옛 시절을 그리며 몇 자 적어 그가 저승 가는 길에 함께 띄워 보낸다. 필자.

1.

지하가 투사의 길에 들어서는 데 제1차적 계기는 내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6.3세대가 박정희 정권에 대해 투쟁을 벌인 기점이 된 것은 1964년의 3.24 시위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65년 3월 초, 나는 문리대 학생회로부터 3.24 시위 1주년을 맞이하여 선언문과 격문(檄文)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김지하, 박재일, 최혜성과 함께 친구 집에 모여 문안 작성에 들어갔다. '3.24 제2선언' 초안은 김지하가, '격문' 초안은 내가 작성하여 함께 검토를 마친 후 인쇄까지 마쳤으나, 학생회로부터 3.24 행사가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보관본을 제외한 인쇄물 모두를 소각했었다.

여기서 '김지하'라는 이름이 생긴 경위부터 살펴보고 넘어가자. 지하의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다. 어느 여름날 막소주에 왕소금을 안주로 거나해져 갈 짓 자로 길을 걷고 있는데, 문득 '지하다방'이라는 간판이 '김영일'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다! 지하(地下)! 레지스탕스! 그래서 흔한 본명 대신 갈 짓 자(之)에 여름 하(夏), '지하(之夏)'로 하기로 했는데, 그 후 어느 날부터인가 언론에서 '지하(芝河)'로 표기하는 바람에 그대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지하는 내가 생선 가시처럼 비쩍 말랐다고 하여 '가시'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내게 세상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다는 뜻으로 '可視'라 표기했다.

아래 메모는 1965년 6월경 지하가 정치학과 동기 김정남과 함께 나를 만나러 집으로 찾아왔다가 부재중이어서 남긴 것이다. 이 메모에서 지하는 자신의 이름을 '지하(之夏)'의 '지(之)'로 표기하고 있고, 정치학과 동기인 김정남이 자신의 이름 '金正男'을 'Gold Right Man'으로 표기한 것이 재미있다. 김정남은 지하가 투사의 길에 들어서자 은밀하지만 끈질기게 그를 돕게 된다.

ⓒ송철원

다음은 이 메모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다.

가시(可視)

왔다가 못 보고 간다. 관문출입(關門出入)이 허용되는 걸 보니, 전에 왔을 때 관문(關門)이 불허된 건 네가 집에 있었다는 증거――. 아무튼 효도해라. 가끔 전화하겠다. 내게 전화 정도는 허용해달라고 네 엄마께 부탁해라. 본인(本人)은 또 부평초(浮萍草)가 되는 갑다. 이제 갈 테다. 안녕. 지(之)

농구 구경 갔드나?

별로 할 말 없다. 하는 일 잘되고 네 몸만 좋아진다면 내사 안 좋나? 뒷날 전화할게. 육성이나 들려주렴. 간다. 잘 있거라. Gold Right Man

당시 나는 유학 준비하라는 부친의 엄명에 따라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고, 지하가 전에 나를 찾아왔을 때는 집에 있었지만 어머님이 따돌렸던 것 같다. 외롭던 그가 찾아왔는데 만나지 못하여 "부평초(浮萍草)"로 만든 것이 가슴 아프다.

몇 달 후 지하가 투사의 길에 들어서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건이 일어난다. 앞에서 말한 바처럼 '3.24 제2선언' 인쇄물을 불태워버렸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던 것은 이 인쇄물이 중앙정보부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이 때문에 1965년 9월 중순 나와 박재일, 최혜성 등은 구속되고 지하는 전국에 지명 수배되기에 이른다. 다음이 이에 대한 지하의 이야기다.

나에 대한 수배가 전국에 내려졌다. 그리고 친척들 집과 친구들 집, '길'과 같은 나와 연관 있는 모든 곳, 모든 사람에 대한 조사와 호출, 타작이 시작되었다. 한번은 장위동 작은이모집 골방 캐비닛에 숨어 그 방까지 들이닥친 정보부원들의 눈을 잠깐 속이고 캐비닛을 빠져나와 꽁무니 빠지게 도망친 적도 있다.(<흰 그늘의 길 2>(김지하 지음, 도서출판 학고재 펴냄) 94쪽)

중앙정보부는 지하를 체포하기 위해 비열한 방법을 썼다. 그의 부모님을 잡아다가 베니어합판으로 칸을 막은 양쪽 방에 각각 넣고 아버지를 전기 고문하며 어머니에게, "아들 숨어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당신 남편이 죽는다"며 닦달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지하는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는 투사의 길에 들어설 결심을 한다.

그날 밤, 나는 수유리에 숨어 있었다. 그때, 나를 지키기 위해 내 곁에 있던 정남, 한때 김영삼 정부에서 교육문화 수석비서관을 한 그 김정남(金正男)이 시내에 갔다 와서 정보부가 내 어머니, 아버지를 잡아다 나 숨은 곳을 대라고 전기고문을 서너 차례나 한 끝에 아버지가 졸도하고 고혈압이 크게 터져 반병신이 돼버렸다는 얘기를 나직나직 들려주었다.

우리는 소주를 마셨다. 희뿌옇게 먼동이 터올 때 뒷산 의암 손병희 묘소 근처에서 밝아오는 동쪽을 바라보고 혼자 속으로 굳게 맹세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반드시 박정희를 무너뜨리겠다!'(<흰 그늘의 길 2>(김지하 지음, 도서출판 학고재 펴냄) 94쪽)

2.

ⓒ송철원

지하는 '3.24 제2선언' 사건으로 도피하며 나에게 1965년 9월 2일 자 엽서 한 통을 보냈다. "해변에서" 쓴 그 엽서의 내용은 이렇다.

가시(可視)!

폭염은 언제 가실른지?

허지만 하늘만은 푸르르군.

보고 싶다. 목마른 내 마음,

맨발로 뛰는 내 몸뚱이 전체가

친구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바다도 이젠 내게 아름답지 않구나.

그저 비정한 소음의 동혈(同穴) 같다.

둥그런 답싸리 푸르러러

더욱 눈물겨웁고

피 뿕은 황톳길 따라

아! 이제 나는 떠난다.

바람이 되어.

2일 지하(之夏)

도망가며 쓴 편지가 한 편의 시! 지하는 천생 시인이었다. 마음이 가녀린 예술가였던 그에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감당하기에 너무도 큰 고통을 주어 1968년 8월 문리대를 졸업할 즈음, 그는 심한 폐결핵 환자가 되어 있었다.

폐결핵 증세가 심해져 식은 땀을 줄줄 흘리고 해골처럼 마른 몸에 쿨룩쿨룩 끊임없이 기침을 하며 끈임없이 피가래를 뱉어냈다. 어던 때는 기흉(氣胸)을 의심할 정도의 호흡장애도 왔다. 그러나 술을 끊을 수 없었고 이젠 술도 술이 아닌 아편이 돼버렸으니 독한 소주에 기껏해야 돌소금이나 사과 반쪽이 소주 한 병에 대한 안주의 전부였다.(<흰 그늘의 길 2>(김지하 지음, 도서출판 학고재 펴냄) 105쪽)

생사의 고민 끝에 지하는 1967년 2월 결국 내 아버님의 주선으로 시립 서대문병원에 입원하여 1969년 6월 퇴원할 때까지 투병 생활을 계속한다.

이미 용산철도병원 원장으로 계시는 송철원 형의 아버님께서 요양원 입원을 주선해주시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농약도 이미 치사량을 마련해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결정만 내리면 되는 것이다.... 나는 며칠 뒤 서대문 역촌동 포수마을 저 안쪽 산언덕에 있는 역촌동 서대문시립병원, 그러니까 폐결핵요양원에 푸른 환의(患衣)를 입고 입원했다.(<흰 그늘의 길 2>(김지하 지음, 도서출판 학고재 펴냄) 112∼113쪽)

3.

1970년, 지하는 "반드시 박정희를 무너뜨리겠다"고 한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유명한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썼고, <오적>이 <사상계> 5월호와 야당 기관지 <민주전선> 6월 1일 자에 실려 구속되자 일약 저항의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그해 가을, 나는 지하처럼 술 좋아하는 친구들이 돈 없이도 실컷 마실 수 있는 곳을 만들어보려 했다. 이에 대해 내가 말한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 부터 보자.

"무교동에서 식당을 하던 경기고 선배가 운영이 신통치 않자 영업상담을 해 왔다. 그래서 내가 김지하에게 '우리 주변에 술 먹을 사람은 무지 많은데 돈은 없으니 유명해진 네가 얼굴마담을 하면 여럿이 공짜로 술도 실컷 먹고 (운동) 자금도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김지하도 쾌히 승낙했다. 우리는 선배의 식당을 술집으로 바꾸고 인테리어도 독특하게 꾸몄다. 구들장으로 식탁을 만들고 대나무 통으로 술통을 삼고 내부를 동굴 분위기로 만든 뒤 술집 이름을 '석기시대'라 붙였다. 잡지 <선데이서울>에 김지하 얼굴까지 실은 광고도 냈다. 모친이 '외아들을 함부로 돌린다'고 우리에게 욕을 바가지로 했던 기억이 난다. 어떻든 '석기시대'는 대박을 쳤다.

장사가 잘되니까 주인이었던 선배의 태도가 달라졌다. 운동권 학생들에게는 돈을 안 받겠다고 해놓고 받질 않나, 이익금을 민주화 운동 자금으로 준다는 약속도 안 지켰다. 그래서 아예 다른 술집 주인과 동업을 하기로 하고 김지하와 함께 '레지스탕스'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하지만 1년 만에 망했다."(<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22), <동아일보> 2013년 5월 8일 자  A29면)

여기서 부연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먼저 지하의 어머니 정금성 여사에 관한 것으로, 자신의 외아들에 대한 무한한 긍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교동에 '석기시대' 문을 열 때, 주간잡지 <선데이서울>에 '광고'를 냈다고 했지만 '광고'가 아니라 정식 '기사'였다. 자기 아들이 유명 인사가 되어 표정 관리를 해야 할 마당에 저속한 주간잡지에 막걸리집을 개업했다는 기사가 큼지막하게 났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정금성 여사가 “철원이 이놈 어디 갔냐?”며 나타나 혼쭐낸 적이 있었다.

다른 이야기는 '레지스탕스'가 망한 사유이다. 첫째, 주인이란 놈들이 매일 퍼마시니 장사가 될 수 있었겠는가? 어느 날은 아예 '금일 휴업'이라는 방을 붙이고 막걸리 두 독을 다 퍼먹은 적도 있었다. 거기다 돈 없던 시절, 다른 데서 돈 내고 먹다 돈 떨어지면 몰려드는 곳이 '레지스탕스'였다.

어디 그뿐이었나? '레지스탕스'가 당시 운동권 집합소처럼 되어가자 정보부원들이 몰려들어 막걸리 한 주전자 시켜놓고 밤새도록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고 있었으니 매상이 오를 턱이 없었다. 급기야 명색이 주인이었던 나는 엉뚱한 사건에 말려들어 중앙정보부에 잡혀들어가자 '레지스탕스'에서 손 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큰 소득을 얻었으니, 당시 '여왕봉(女王蜂)'이라고 불리며 이름을 날리던 전옥숙(全玉淑) 여사를 알게 된 것이다. 영화감독 홍상수의 모친이기도 한 전 여사는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을 몰고 '레지스탕스'에 찾아와 연일 매상을 올리는가 하면, 오갈 데 없던 지하와 나를 거둬주기도 했다.

1971년 10월 15일, 교련 철폐 운동에서 비롯된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자 박정희는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이때 지하와 나는 지명 수배되어 각각 강원도와 부산으로 피신했다. 수배가 해제되어 서울로 올라와 동가식서가숙하던 때 우리는 삼선교 전옥숙 여사 집 문간방에서 식객 노릇을 하며 신세 진 적이 있었다.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그와 나의 동거가 둘이서 밀접한 관계를 갖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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