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호국, 민주라는 기존 개별 가치들의 경계를 '점선'(點線)으로 보면서 상호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경계를 점선으로 이해하는 자세는 다른 이념이나 가치에 대해 대화적이고 개방적으로 움직인다."(이찬수 외, <보훈학개론> , 41)
매년 6월이면 자주 듣고 보게 되는 용어가 있다.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말... 현충일과 6.25전쟁일이 있기 때문이되, 한국인은 국가에 대한 '충성(忠)의 현양(顯)'을 참전 희생자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연상되고 연결되는 이념적 자세가 '애국심'이다. 애국심을 어떻게 이해야 할까. 교육학자 심성보의 표현을 빌려와 생각해보자.
'순화된 애국심' 혹은 '중용적 애국심'은 보훈 교육이 눈 여겨 보아야 할 자세이다. 보수적 애국심과 진보적 애국심 간 균형을 이루는 '부드러운 애국심' 혹은 '사려 깊은 애국심'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호국정신의 확장을 보훈교육의 근간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순화된 애국심'에 기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 연재에서도 제시한 바 있지만(<보훈문화의 표층과 심층①>, "보수와 진보, 어디에서 만나는가") 한국의 보훈은 독립, 호국, 민주를 중심 가치로 내세우며 국민통합을 지향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핵심 가치들이 충돌하기도 한다. 가령 '독립', '호국', '민주'는 보훈 정신의 근간임에도 불구하고, 독립 운동에 대한 강조가 여전히 반일감정으로만 이어져서 오늘날 대일관계를 둘러싼 민족주의적 갈등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전쟁의 경험에 기반한 호국주의적 태도가 여전히 대북 적대성으로 이어지면서 한반도의 긴장을 지속시키고 갈등비용을 증가시키기도 한다. 동일한 민주의 이름으로 '민주공화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갈등하며, 어떤 자유가 다른 자유에 대해 적대적이기도 한다. 독립과 호국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 가치는 잘 보면 상보적 자세이고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각기 따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보훈이 국민통합을 저해할 가능성도 생긴다.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계시켜 성찰하지 못한 탓이다.
이것은 자기중심적 애국심을 '사려 깊게 순화시켜야' 해결되는 문제이다. 앞에서의 표현을 다시 가져오면, '순화된 민주주의', '사려 깊은 민주주의' 혹은 '더 큰 민주에 대한 상상'이 입장 차이로 인한 갈등을 조화와 통합으로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통합의 지점에서 이루어지고 확대되는 주요 내용이 공공성(公共性)이다. 공공성은 '사려 깊은 민주주의'의 지향이며, 사려 깊은 민주주의는 개인적 자유들의 조화를 통해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을 근간으로 한다. 민주적 가치를 내세우고 있는 한국의 보훈에서 공공성의 확보와 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공성은 보통 다음 세 가지 성격을 지닌다. 첫째, 국가에 관계된 공적인 것(the official)으로서, 공교육, 공적 자금, 공안 등과 같이 강제, 권력, 의무 등의 뉘앙스를 지니는 경우이다. 민간의 사적 활동과는 구분된다. 둘째, 모든 사람과 관계된 공통적인 것(the common)으로서, 공통의 관심사, 공공의 복지, 공익 등과 같이 특정 이해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개인적 권리의 자발적 제한이나 인내의 의미를 지니는 영역이다. 사리, 사익, 사심 등과 구분된다. 셋째, 누구에게나 개방적인 것(the open)으로서 정보 공개, 공원 등에서처럼 비밀이나 프라이버시 등과 대비되는 영역이다.(사이토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
그러나 독립과 호국 사이에 긴장이 있고 민주의 이름으로 충돌하기도 하듯이, 현실에서는 공공성의 이해에 정도의 차이가 있고 때론 충돌의 가능성도 있다. 가령 국가정보원에서의 행정 활동은 원칙적으로 '공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개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마을의 우물은 마을 사람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공공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니 그렇기에 특정인이 다 퍼갈 수는 없다. 공공성은 개인적 사용권의 자발적 제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원, 지하철 등 공공시설에 개인적 일탈 행위나 노숙자 등을 제한하는 경우 등도 이에 해당한다.
전술했듯이, 모두의 자유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물론 이 제한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유의 주체들 간의 공감과 동의를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공공성을 확보하려면 대화와 타협을 통해 공통의 지점, 공감대를 확보해야 한다. 자기 제한 혹은 자기 조절을 통해 공동의 지점을 확대하되,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확보할 때 공공성도 든든해진다. 백범 김구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면서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라는 말을 한 바 있는데(김구, "나의 소원"), 이때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일탈이나 방종에 가깝다면,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며 더 큰 자유를 만들어가는, 즉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적극적 자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교육이 미숙한 인간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게 하는 과정이라면, 참으로 자기를 제한해 이웃과의 긍정적 관계에 자신을 내어줄 줄 아는 '적극적 자유'는 교육의 근간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자기 안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교육이되,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그런 의미의 '성스러운' 교육이기도 하다. 교육은 개인의 자유를 전제하면서도, 더 나아가 이웃과의 관계를 적절히 맺고 세계를 풍요롭게 하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할 줄 아는 적극적 자유의 능력을 배양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웃의 자유, 세계의 풍요를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할 줄 아는 자유, '공원에 꽃을 심는' 능력을 키워주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공공성이 구체화하고 '국가'의 개념이 민주적으로 정립된다. '호국보훈'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공공철학 혹은 교육철학적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