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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과 나의 사상 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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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과 나의 사상 편력

[탈춤과 나] 황선진의 탈춤 2

①소박한 민주주의-민족주의

1972년 대학 입학 전부터 나는 소박한 민주주의자였다. 대학에 가면 데모를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때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정신대 이야기를 들었다. 피가 끓었다. 정신대 이야기가 운동권 언저리로 나를 이끌었다. 소심하고 용기가 없는 기질이 있어 앞장은 서지 못했지만, 민주주의와 관계된 이야기를 들으면, 귀가 솔깃했다. 1973년 10월 2일, 유신 후 첫 데모가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에서 열렸다. 뒷전에 참가했다. 그 무렵 민속가면극연구회의 봉산탈춤 공연에 ‘양반’으로 참여했다.

72년부터 75년까지 나를 이끈 사상은 소박한 민주주의, 소박한 민족주의였다. 1975년 5월22일 ‘김상진열사 장례식’이 열렸다. 그 장례식을 아마도 처음 단계부터 기획하고 모의했다. 그때 나를 그 거사에 참여하도록 한 것은 채희완선배와 신동수 선배였다. 채희완 선배(70학번)는 당시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대학 행사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동수선배는 70년대 후반 서울에 소재하는 모든 대학의 시위에 배후로 활동하였다. 탈춤반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두 선배님의 이끌음으로 시작된 준비는 약 한 달 반의 준비기간을 거쳐, 이지현(73학번)의 꽹과리 소리를 신호로 관악캠퍼스를 뒤집어 놓았다. 연성수(73학번)가 진오귀굿을 주재하는 무당 역할을 맡았고, 내가 대본을 썼다. 이 굿은 현장에서 실행되지는 못했다. 안정적으로 장례식을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둘둘’(김상진 대학 장례식 사태를 당국에서 일컫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소박한 민주주의-민족주의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김상진 열사 추모 노제 ⓒ황선진
▲김상진 열사(75년 서울대농대 4년, 교정에서 할복함) ⓒ황선진

②마르크스 레닌주의

‘오둘둘’ 이후 약 6개월간의 수배생활을 했다. 형사들은 전국의 연고지들을 뒤지고 다녔다. 정작 나는 김포의 한 농장에서 머슴을 살고 있었다. 탈춤반 강철구 선배의 외삼촌이 운영하는 돼지 농장이었다. 낮에는 돼지 농장일을 보고, 저녁에는 가끔 그 외삼촌의 자녀들 공부도 가르쳤다.

75년 11월 경, 김지하 양심선언이 감옥 밖으로 나왔다. 그 연루자를 찾는 과정에서 나의 은신처도 들키고 말았다. 구속되고, 재판받고, 군대로 가는 그 어지러운 과정에서, 친구에 이끌려 ‘알기 쉬운 철학’이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입문서를 접하게 되었다. 

그 이후 20여년을 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실제로 사회 변혁의 이런저런 일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③불교에 입문

1995년 아는 후배의 손에 이끌려 부산 안국사에서 참선을 했다. 거의 한달 간을 인천에서 부산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간화선에 몰두했다. 내가 들은 것은 ‘이 무엇고’ 라는 화두(話頭)였다. 태어나서 그렇게 몰입한 적이 없었다. 가슴에서 불이 났다. 수십 명이 한 참선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내 옆에 앉아 있던 동의대 학생이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깨어났다. ”죽을 것 같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학생이 깨우지 않았으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확철대오를 했을 것이다. 두고두고 아쉬웠다. 지도하는 대보살님이 ”그것도 인연이다“라는 말로 그 참선길은 일단락되었다. 해를 두 번이나 넘겨서, ‘공부가 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두 달 간 동네 청소를 혼자 다했다. 환희심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두 달 뒤, 청소일은 안 하게 되었다. 마누라 왈, ”당신 깨달음은 두 달 짜리이구랴!"

1999년 인천에서 생명축전을 개최했다. 불교공부 이후, 나의 행동 방향이 ‘바꾸자’에서 ‘살리세’로 전환되었다. 인천 생명축전은 그 첫 행보였다.

ⓒ황선진

④전통 선가(仙家)에 입문

2000년 또 한 후배의 손에 이끌려 전통선가의 한 맥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시원한 한 줄기 바람과 한 모금에 청량한 물이 나의 몸과 기운에 감돌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이 있었던가?’ 부도지를 만났고,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논어, 천문유초, 금강경 등 선가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펼쳐졌다. 감탄했다. 논리정연한 세계관, 행공(行功)과 기공 등. 일찍 접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그 공부와 수련을 다 받아내기에는 나이가 많았고, 술을 비롯한 방탕한 생활로 기운이 많이 쇠한 상태였다.

▲선가행공(仙家行功) 역기마세(逆騎馬勢) ⓒ황선진

⑤동학과의 만남

2006년, 13명의 사회운동가들이 천도교 화악산 수도관에서 개최된, 여름수련회에 참가했다. 지금 원광대 총장인 박맹수선생이 다리를 놓으면서 함께 했다. 사회운동가들이 천도교 수련회에 집단적으로 참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강령(降靈)과 강화(降話)가 있었다. 몸이 떨리고, 그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元, 亨, 利, 貞’이라는 글귀가 감은 눈에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역의 중천건(重天乾) 괘에 나오는 말이었다.

ⓒ황선진

⑥불교-선가-동학 등의 공부로 비로소 체득하게 된 생명사상

지금 나의 생(生)을 이끌고 있는 사상은 무엇인가? 소박한 민주주의, 민족주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불교와 선가의 가르침, 동학, 김지하 선배님의 생명사상 등이 어우러지고 합쳐져 있다. 여전히 나의 실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문화 활동에서 녹아나고 있다.

양자물리학, 양자역학 등이 흐릿하면서도, 점점 밝아져 온다. 그것은 아직 내가 온전한 통(通)을 이루지 못한 불교-선가-동학 등에 이미 포괄되어 있는 내용인 듯 싶다. 현대과학의 힘을 빌어 점차 선명하고, 쉽게, 다가오고 있다.

이상이 20대 탈춤을 추던 한 청년의 사상적 궤적이다. 아마도 탈춤의 인연에 이미 예고된 것이지 싶다.

ⓒ황선진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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