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의 일이다. 조별 발표를 준비하는 자리였다. 5명 정도 되는 친구들이 모여 발표 준비에 한창이었다. 언쟁도 오갔고, 웃음도 터졌다. 그러다 한 여학생에게서 전화벨이 울렸다. 고향에 있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온 전화였다. 여학생은 잠시 조 모임에서 떨어져 전화를 받았다.
"아이다, 와 그렇게 말을 하는데? 그건 니가 잘못한 거 아이가."
화장실을 가던 길에 본의 아니게 통화를 엿듣게 됐다. 조별 발표에서 '세련된' 표준말, 아니 서울말을 쓰던 여학생의 입에서 경상도 방언이 술술 흘러나왔다. 순간 기자와 눈을 마주친 여학생은 다른 장소로 급히 이동했다.
이후 또다른 '여학생'들을 가끔 만날 수 있었다. 그때마다 사투리 쓰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의문은 들었다. 대학생활, 그리고 사회생활을 경험하면서 그런 '여학생'들은 많이 만났지만, 그런 남자들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지방 출신 남자, 특히 경상도 남성들은 대부분 자신의 언어인 방언을 그대로 사용했다.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서울 출생의 남성인 기자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전라도 사투리와 억양을 사용하는 진행자는 왜 없는가
최근 나온 <미끄러지는 말들>(백승주 지음, 타인의사유 펴냄)은 그런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게 도와준 책이다. 언어학자이자 제주도 출신인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면서 이런 현상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왜 제주도 사람들은 어떻게 타지로 가면 제주 말을 싹 버리고 그곳의 방언(표준말)을 순식간에 익히는 것일까"라고 반문하며 "적어도 언어 사용의 측면에서 제주 사람은 자신의 출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고 서술한다.
그러면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차이도 언급한다. 저자는 "강호동이나 김제동 같은 이처럼 경상도 사투리와 억양을 쓰는 방송 진행자들이 있는 한편, 전라도 사투리와 억양을 사용하는 진행자는 왜 없는 것일까"라며 "경상도 방언으로 유행가도 만들어지는 판에 왜 전라도 방언은 그런 지위를 얻지 못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연속해서 던진다.
한발 더 나아가, 지방의 여성들은 왜 남성들보다 표준어를 더 빨리 익히고 더 잘 구사하는지에 의문을 나타낸다. 단순히 여성들의 언어 능력이 남성들보다 뛰어나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 '힘의 차이'를 제시한다. 사회적으로 힘이 약한 집단 또는 개인은 힘이 센 언어의 위세를 빌려와 자신의 약함을 벌충한다는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이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제주 말을 버리고 서울말을 사용하는 것이나, 대중매체에 경상도 방언 화자가 더 많이 노출되고, 전라도 방언 화자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말한다.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표준어를 더 잘 구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를 근거로 저자는 정치권과 일부 남성들이 이야기하는 '남성과 여성 간 차별은 없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고 힘이 남성을 위협할 정도로 세졌다면 여성들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표준어의 위세를 빌려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만약 여성이 비표준형을 사용한다면 그 여성은 되바라졌다거나 조신하지 못하다는 등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며 "비표준형을 사용하는 여성은 통제할 수 없는 야생의 존재, 계몽되지 않은 존재로 취급당한다"고 설명한다.
힘을 가지지 못한 언어, 그리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저자는 '힘을 가지지 못하는 언어', 더 정확히는 힘을 가지지 못하는 계층과 집단에 관심을 두고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노동자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노동자들이 작업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오함마, 빵꾸, 구루마' 등의 언어가 순화되어야 할 언어인지에 의문을 드러낸다. 사실 이러한 언어는 일제의 잔재이고 저급한 언어이기에 사라져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저자는 이를 반대한다. "자기 일에 숙련되어 갈수록 이들은 점점 더 많은 일본어투 말들을 능숙하게 사용할 것"이라며 "개인적 차원에서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오함마'같은 언어들은 그들이 땀을 흘리며 몸으로 익힌 언어이기에,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능력이 얼마만큼 성장했는지 보여주는 언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러나 국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들의 언어 사용은 손가락질당해 마땅한 것으로 몰락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손가락질은 노동자에게도 옮겨가며, 노동자들도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너무나 손쉽게, 아니 거의 반자동적으로 노동 현장의 언어들을 순화의 대상으로, 빨리 처리해야 할 오염된 폐기물로 분류한다. 이런 언어들은 감금되어야 할 언어, 사회와 격리되어야 할 언어, 최소한 저쪽 구석으로 치워 버리고 눈길도 관심도 주지 말아야 할 언어이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들어서 뭐하겠나? (중략) 이렇게 비정상적인 범주로 분류된 언어들, 다시 말해 순화해야 할 범주의 언어들은 이등 시민의 언어가 된다."
그렇게 되면서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설사 낸다 해도 들리지 않는 존재로 사라지게 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반면, 창조경제, 4차 산업혁명, 뉴딜 등 '자본의 언어'는 늘 변화하면서 부조리와 불평등을 은폐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똑같은 노동을 하지만 비정규직이라는 말로 차별을 정당화하고, 플랫폼 노동이라는 단어로 자발적 착취를 가능케 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혐오의 언어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저자는 힘을 가지지 못하는 언어, 즉 '웅크린 말'에만 천착하는 게 아니라 뾰족하게 튀어나온 '말'에도 관심을 가진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안산 선수나 아프간 난민, 장애인, 방송인 샘 오취리 등에게 가해진 혐오의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정당화되는지에 주목한다.
저자는 혐오의 언어가 정당화되는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크다고 주장한다. 혐오 발언을 인용해 기사를 작성하는 행위가 혐오 발언을 사회적 현상 내지는 실재하는 현실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혐오는 '정당한 분노'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를 통해 안산 선수가 소위 '페미'이니 메달을 반납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수용 가능한 상식이 되어버린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렇게 분노 산업(혐오)의 언어는 실재를 왜곡시킨다"며 "그리고 그 왜곡된 언어는 다시 일그러진 실재를 구축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이러한 무한 반복의 개미지옥에 빠졌다며 "혐오를 분노로 가공해 판매하는 한국의 분노 산업은 여전히 활황"이라고 냉소 섞인 해석을 던진다.
이러한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한국 사회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례로 차별을 금지하는 방안을 논의하자고 해도,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정당한 분노라는 말로 다시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난마처럼 얽힌 지금의 현상을 어떻게 풀수 있을까. 저자는 우선 혐오의 대상이 된 집단이나 계층을 무턱대고 나쁘고 사라져야 할 존재로 바라보지 말라고 주문한다. 혐오라는 '눈가리개'를 벗고, 현상의 이면에 자리잡은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문제'에 대한 질문부터 던져보자고 제안한다.
쉬운 일은 아니나 저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부터라도 이러한 작업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혐오의 언어'는 계속해서 활개를 칠 수밖에 없고, 한국 사회는 결국 답 없는 진창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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