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나는 박헌영의 아들이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나는 박헌영의 아들이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50~51화

50. 신륵사

"예? 신륵사 주지요?"

1987년 원경은 신륵사 주지를 맡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전화를 받자, 원경은 4년 전 일이 생각이 났다. 4년 전, 원경은 신륵사를 비롯한 경기도의 많은 절들을 관장하는 조계종 제2교구의 본사인 용주사 주지를 맡으라는 송담 스님의 지시를 거부했지만, 용주사 주지설이 소문이 나면서 이를 질시한 동료 승려들로부터 "빨갱이 새끼 중"이라는 비방까지 당했다(46회. '빨갱이새끼중' 참조). 그리고 1983년 안성에 있는 작은 절인 청룡사의 주지로 내려왔다.

▲ 원경이 주지로 있었던 안성 청룡사.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한 대웅전 기둥이 예술이다. ⓒ손호철

원경은 청룡사에서 수련을 하며 심심하면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전설적인 여자 남사당 우두머리 바우덕이의 사당을 오가며 지냈다. 바우덕이는 안성남사당에 속한 미모의 예인으로 여성으로는 드물게 남사당의 우두머리가 됐고 그 탁월한 능력이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 대원군이 경복궁 건설에 동원된 공역자들과 백성들을 위한 공연을 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의 공연에서 신명이 얻은 사람들은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고 이에 대원군은 당상관 정삼품 벼슬을 내렸다.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여자 대중스타였던 셈이다.

▲ 청룡사 부근에 있는 바우덕이 사당의 바우덕이 동상 ⓒ손호철

1985년 이후에는 청룡사 이외에도 역사문제연구소 일에 몰입하고 있었다. 헌데 갑자기 요직 중의 하나인 신륵사 주지로 발령이 난 것이다.

여주에 위치한 신륵사는 신라시대에 창건한 유서 깊은 절로 신도수가 많은데다가 산속에 있는 대부분의 절과 달리 남한강가의 평지에 위치해 경치가 기가 막하고 서울에서 가까워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알짜배기 절'이었다.

신륵사 주지가 된 뒤 원경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아다녔다. 개인적으로 수많은 방황을 끝냈고 아버지의 복수에 대해서도 마음의 평정을 얻었고 어머니 문제도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군 정보기관, 안기부의 조사를 거쳤고 절 동네의 색깔론도 다 겪고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밖으로도, 1987년 민주화가 되면서, 예전 같은 공개적인 억압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원경은 타고난 리더십과 친화력으로 절을 키웠다. 덕원스님을 첫 상좌(제자)로 받아들인 것도 이 때였다. 특히 그는 신륵사의 안정적인 재정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로 만들었다. 운동권과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그의 밥과 술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신화가 생겨난 것은 특히 이 시절이다. 이를 넘어서 그는 보수진영의 사람들과도 많이 교류했다.

"제가 어려서부터 산속에 혼자 버려져 한산스님 오기를 기다린 기억이 남아 있어 해가 넘어갈 때면 사람이 그리워져 사람들을 모아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의 마당발 저녁모임에는 이 같은 슬픈 사연이 숨어 있다. 그는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또 다른 슬픈 사연을 풀어놓았다.

"제가 대식가인 데다가 식탐이 있어 절대 음식을 안 남깁니다. 워낙 지리산에서 못 먹고 살아서 한이 되어서요."

▲ 1987년 원경이 주지가 된 신륵사 ⓒ손호철

1987년 이후, 신륵사는 '운동권 인사들의 사랑방'이 됐다. 1987년 민주화된 분위기로 운동권의 공개적인 모임이 많아졌는데, 서울서 가깝고, 공기 좋고, 경치 좋으며, 주지스님까지 친운동권에다가 화끈한 원경스님이니 신륵사는 최고의 모임 장소였다. 주말이면 운동권인사들의 신륵사 모임이 이어졌다. 1988년 유학에서 돌아와 나 역시 그런 모임에 참석했다. 새로 창간한 진보잡지 <사회평론> 관계자들이 모임으로 원경스님과 가까운 유홍준 교수가 준비 중이던 <나의 문화답사기>의 자료들과 김홍도의 희귀 춘화 슬라이드 특강으로 흥을 돋웠다.

"손 박사, 인사하세요. 원경스님이시니."

운동권 선배인 김세균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가 원경스님에게 나를 소개했다.

"스님 처음 뵙겠습니다. 정치학을 공부한 손호철입니다."

"아, 원경입니다. 지금 어디서 가르치시지요?"

"유학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보따리장사(시간강사)'입니다."

"아 그러세요?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것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1988년 유학에서 돌아온 나는 이 때 이렇게 원경스님을 처음 봤다. 특강이 끝나자, 스님은 참석자들을 가까운 동네 맛집으로 데려가, 진하게 대접을 해줬다. 그런 가운데서도, 원경은 조용히 <이정 박헌영전집>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51. 커밍아웃

"스님, 식사 중에 갑자기 어디 갔다 오셨어요?"

1985년 12월 15일 원경스님은 광주에서 황석영 작가를 비롯한 재야운동권 인사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참 술잔이 돌고 있는데, 어느 순간 원경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원경은 두 시간이 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배낭을 뇌두고 간 것을 봐서는 가버린 것은 아닌데 어디로 간 것인지, 모두들 궁금해 했다. 원경은 근 세 시간이 지나서야 문을 열고 나타났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니 광주에 애인이라도 있습니까? 말로 안 하고 갑자기 사라졌다 오시니."

"이실직고하세요."

원경은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했다. 언제까지 모든 이야기를 숨기고 살 것인가? 이 사람들 정도라면 까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원경은 눈을 뜨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중에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조선공산당 당수였던 이정 박헌영 선생님이 제 부친입니다."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도 있었던 만큼 자리는 물을 끼어 얹은 듯 조용해졌다.

"아시겠지만, 이정 선생님이 오래전에 북한에서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헌데 처형당한 날짜는 잘 모르겠고 사형을 선고받은 것은 1956년 12월 15일입니다. 그래서 매년 12월 15일이면 제가 선생님 제사를 드려왔습니다. 헌데 오늘 같이 모임이 있는 날은 소문을 내기도 뭐해서 몰래 빠져나가 혼자 가까운 절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드리고 옵니다. 오늘이 12월 15일이니, 기일이라, 제가 잠깐 제사를 지내고 왔습니다."

"아니 스님, 그런 사연이 있으면, 여차여차하다고 이야기를 하셨어야지요. 그러면 같이 가서 함께 제사를 지내드렸지요. 여러분, 안 그래요?"

"그럼요, 같이 지내드려야지요."

여기저기서 같은 의견이 이어졌다.

"말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원경은 이때부터 그전까지 한산스님과 함께 지냈고 한산스님이 잠적한 뒤에는 혼자 지내던 이정 선생님의 제사를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지내게 됐다. 1991년 소련 동구의 몰락으로 러시아 여행이 가능해지자, 원경은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보고 배다른 누이 비비안나를 만나보기 위해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거기서 만난 전 북한 외무성 차관 박길룡 씨로부터 1957년 7월 19일 김일성이 소련 순방에서 급히 귀국해 박헌영을 처형하라고 지시해 그날 처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원경은 이정 제사일을 7월 19일로 바꿨다.

▲ 80년대 중반부터 지인들과 함께 지내기 시작한 박헌영 기일 제사 ⓒ손호철

"원경스님 맞으시지요?"

"맞습니다만…"

"저는 김기팔이라는 방송작가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제가 '제1공화국' 등 선생님 드라마 팬입니다."

"그러세요?"

"예, 한데 무슨 일로 빈승을 찾아오셨습니까?"

"동아건설 최원석 씨의 동생인 최원영 씨가 시사주간지와 영화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영화사는 영화를 만들어 방송국에 팔 예정인데 첫 작품으로 박헌영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 예정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됐다고는 하지만 이는 충격적인 계획으로 원경은 놀랐다.

"저희가 듣기에 박헌영 선생이 스님의 생부이시라고 하더군요. 스님께서 상하이, 모스크바 등 박헌영 선생의 행적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다큐를 만들까 하는데 도와주시지요?"

"이정 선생님을 재조명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제가 공개적으로 나서기는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가요? 그러면 출연은 못 하시더라도, 제작 과정에서 스님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주시고 자료도 좀 챙겨주시고 했으면 합니다."

"그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정 선생님의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하니 원경은 '드디어 한산스님이 이야기한 좋은 때가 왔는가 보다'며 기뻐했다. 이후 원경은 김기팔이 박헌영 다큐의 각본을 제작하는 것을 도왔다(이 다큐멘터리는 각본을 완성했지만, 김기팔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시사저널>이 여러 문제에 부딪치면서 제작되지 못했다며 원경스님은 안타까워했다.).

"저는 <시사저널>이라는 주간지의 창간 준비팀의 박상기 기자입니다."

어느 날 이 같은 작업에 한 기자가 따라와 인사를 했다. 최원영 씨가 영화사와 함께 만든다는 시사주간지 팀이었다. 박 기자는 박헌영 다큐 각본 작업을 따라다니며 여러가지를 묻기 시작했다.

"스님, 다큐는 다큐고, 저희 창간호에 인터뷰를 하시지요. 언제까지 숨어서 사실 것입니까? 이제 세상도 변했으니 스님이 박헌영의 아들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밝히시지요."

너무 갑작스러운 제의라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스님, 해주십시오."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쉬운 문제가 아니라 생각을 좀 해보고요. 생각해보고 연락하겠습니다."

결국 원경은 인터뷰에 응했다. 원경은 1989년 10월29일자 <시사저널> 창간호에 박상기 기자가 쓴 "나는 박헌영의 아들이다"라는 인터뷰 기사를 통해 대중적으로 처음 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리며 커밍아웃했다.

▲ 원경이 커밍아웃한 <시사저널>창간호 ⓒ손호철
▲ 사사저널 인터뷰 당시의 원경 ⓒ원경스님

이후 원경은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특히 1997년에는 역사문제연구소를 통해 준비 중인 <이정박헌영전집>의 일환으로 윤해동 박사와 자신의 삶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어머니 정순년의 삶에 대한 구술과 배다른 누이 박비비안나의 회고록을 <역사비평> 1997년 여름호에 실었다. 2001년에는 인터넷 잡지 <퍼슨 웹>과 인터뷰를 했다. 한참이 흘러 2013년에는 진보언론인 손석춘 기자(현 건국대 교수)가 인터뷰를 통해 박헌영과 원경의 삶을 회상하는 <박헌영 트라우마>를 출판했다.

<계속>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