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안기부
"남산에서 나왔습니다."
"아, 그래서요? 무슨 일로?"
1983년 여주 흥왕사 주지로 있으며 인천 용화사 건설현장을 다녀오자 79년부터 같이 지내기 시작한 어머님이 누군가 와서 연락처를 남기고 갔다고 했다. 그 전화로 연락을 하자 안기부라며 꼭 만날 일이 있으니 장소를 정해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보안사와 달리 밤에 쳐들어오지 않고 장소까지 정하라는 걸 보니 안기부는 역시 한 수 높았다. 원경은 지난번처럼 또 납치당하는 일이 없도록 공개된 호텔 커피숍으로 장소를 정했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밖에 별동대를 조직해 놓았다.
"아버님 함자가 어찌 되는지요?"
세 명의 안기부요원은 앉자마자, 아버지의 이름을 물었다.
"당신들 내 호적 조사했을 것 아니요? 내 이름은 남궁혁이고 어렸을 때 혈혈단신으로 국군이랑 같이 피난 내려와 아버지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지 마시고, 아버님 함자가 어찌 됩니까?"
똑 같은 질문과 똑 같은 답이 반복됐다. 11년 전 이에 대해 보안사에서 조사를 받은 바 있고, 그들이 이 문제만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아 자신의 가계에 대해 안기부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다시 실토하는 것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팽개쳐버리는 것 같았다. 원경은 끝까지 버텼고 지루한 밀고 당기는 시간이 흘러갔다.
"스님, 우리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스님 입으로 직접 들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규정이 그렇습니다."
"…"
"스님, 저희가 12년 전부터 스님을 관찰해 왔고 스님을 전담하는 요원이 따로 있습니다. 사실 오래 전부터 저희가 스님을 보호해 왔습니다."
"아니 나를 보호해요?"
"예. 잘 생각해 보면 아실 텐데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른 승려들의 고발사건 등 고발과 수배 등이 어느 날 슬그머니 없어지곤 했다. 안기부가 경찰에 살인과 같은 중대범죄가 아니면 눈감아주라고 특별지시를 한 것이다.
"사실 우리끼리 이야기인데, 당신이 빨갱이 자식이라고 우리한테 고발한 중들도 있습니다. 꽤 이름도 있고 지위도 높은 스님입니다."
힘이 쭉 빠지는 것이 더 이상 대답을 거부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님 함자가 박자, 헌자, 영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경은 안기부요원의 질문에 아는 대로 순순히 답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만큼 답할 것이 별로 없었다.
"여기 서명해 주십시오."
"이게 무엇입니까?"
"오늘 있었던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비밀로 한다는 각서입니다."
"앞으로도 저희가 스님을 관찰하고 봐줄 것입니다. 다만, 시국선언 같은데 서명만 안 하시면 됩니다. 여기 전화번호를 하나 적어 드릴 터이니, 애로사항이 있으면 연락주세요.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49. 역사문제연구소
"박변(박 변호사의 준말), 요즘 잘 지내시지요? 변호사 일은 어떻습니까?"
"스님, 제가 무식해 머리가 아픕니다."
"박변이 무식하다니 무슨 망발을!"
"제가 국가보안법 등 시국사건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그러려면 역사를 알아야 하는데 제가 한국현대사를 뭘 알아야지요.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려해도 제대로 된 책도 없고 배울 데도 없고 해서, 변호사를 잠시 그만두고 역사공부를 할까 싶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변호사 일을 줄이고 저와 함께 역사공부를 합시다. 저도 제 가계도 있고 그래서 우리 현대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면 좋지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공부하는 사랑방 같은 것을 만들어봅시다."
"스님, 좋은 생각입니다."
1985년, 박원순 변호사는 당장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큼직한 사무실을 구한 뒤 전화도 놓았다. 원경과 박 변호사는 집세와 운영비로 월 100만 원씩 내기로 했다. 원경과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이의 깊은 우정, 그리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중요한 민간연구기관인 역사문제연구소가 이렇게 탄생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이호웅 형성출판사 사장, 소설가 김성동 등이 합류했다.
여러 사람이 모여 공부를 시작했다. 원경의 최대 관심사는 아버지와 자신의 삶을 결정지은, 1945년 해방부터 1948년까지의 해방 3년사였다. 1980년 광주학살 이후 우리현대사를 돌아보려는 자성이 크게 일어나면서, 박 변호사를 비롯해 의식 있는 사람들 역시 이에 대해 가장 관심이 많았다.
"해방 3년사에 대해 강의를 해줄 분 누가 좋을까요?"
"누가 있나? 아, 남로당 등 공산주의운동에 정통한 김남식 선생님이 제일 좋겠네요. 원래 그 쪽에서 운동을 한 분인데 지금은 안기부에서 북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김남식 선생도 와서 특강을 해줬다. 이같이 민감한 주제에 대해 강의와 토론이 이어지자 안기부에서 조사를 나왔다.
"똑똑!"
"누구시지요? 들어오세요."
어느 날 중국음식을 시켜 놓고 저녁 늦게까지 뜨거운 논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찾아왔다.
"종로서에서 나왔습니다. 모두 서로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종로서로 다들 잡혀가 조사를 받고 있는데, 갑자기 모두 돌아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알아보니 김남식 선생이 순수한 학술모임이라고 보증을 서고 풀어준 것이다.
"김 선생님,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누군가가 광화문 뒤편에서 비밀모임이 있다고 투서를 한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투서 이야기를 듣자, 원경은 이 모임이 불필요한 오해를 받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박변, 지난번 종로서 사건을 생각해보니, 우리가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러려면 이 모음을 공식적인 역사연구소로 발족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스님, 저도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원경은 박원순 등과 함께 연구소 설립에 필요한 돈과 사람을 모으기 위해 뛰어다녔다.
"박변, 우리끼리 주먹구구식으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전문가에게 지도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역사학자들을 참여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스님, 맞습니다. 한국현대사에 대해 강의도 하고 우리 독서를 지도해줄 사람이 누가 좋을까요? 국사학계에서 현대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이 없어서요."
"박변, 서중석 기자(1990년 박사학위를 받고 성균관대 교수가 됐지만 당시에는 <신동아>기자였다)가 어떨까요."
"아, 서 선배가 있었네요. 좋습니다."
"이이화 선생님이라고 재야의 고수가 있는데, 그 분도 모시지요."
김성동이 이이화 선생을 추천했다.
"소장은 누구를 시키지요?"
"우리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때까지는 운동권은 배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원경은 역시 조심스러웠다.
"정석종 영남대 교수가 좋을 것 같습니다. 조선후기 민중운동사를 연구했고 존경받는 학자입니다."
"좋습니다."
모두들 찬성했다.
서중석 기자, 이이화 등 역사학자들을 포함해 460명의 사람이 모였다.
"연구소 이름이 뭐가 좋지요?"
격론이 벌어졌다.
"역사문제를 연구하는 곳을 만드는 것이니 역사문제연구소 어떤가요?"
"좋습니다."
"언제 발족식을 하지요?"
"일제하에 우리 역사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다 쓰러진 역사학자 신채호 선생님의 기일이 2월 21일이니, 그 날이 어떻습니까?"
"2월 21일이 신채호 선생님 기일인가요? 정말 좋습니다."
1986년 2월 21일, 역사문제연구소는 이렇게 출범했다. 원경은 역사문제연구소의 출범을 지켜보며, 한산스님이 자기에게 주고 간 숙제, 즉 이정 박헌영 전집의 발간과 복권을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고 생각해, 뿌듯했다.
"연구소는 순수한 연구기관이 되어야 하니 역사학자들을 제외한 초기 회원들은 이제 탈퇴합시다. 나도 나가겠습니다. 박원순 변호사는 사학과 출신이니 남고요."
연구소에 정체성과 방향을 둘러싸고 초기멤버들과 후에 합류한 역사학자들 사이에 알력이 생기자 원경은 주요 멤버들에게 남도여행을 가자고 해서 이렇게 정리했다. 이후 역사문제연구소는 서중석 교수 등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된 연구소로 자리 잡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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