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적 마르크스주의자이기를 원하는 좌파 사회운동가의 자기성찰적 책이 출간되었다. 저자 전지윤은 <연속성과 교차성>을 통해 오랜 활동가로서의 여정에서 자신의 생각이 변화하고 또 전환에 이른 길을 차분하고 냉철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전통의 충실한 고수'에서 '이론적·정치적 혁신'으로의 이행에 관한 기록이며, 정통에 대한 집착과 강조에서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이단적 상상력과 접근방식으로의 사고 전환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 속에서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찾아 나가는 사회운동의 새로운 실천전략을 제시하려 한다.
우선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것은, 그 내용이 내가 30년 전쯤에 비판적, 진보적 사회학 연구자로서 가졌던 문제의식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학계에서는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재구성과 이른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인 라클라우와 무페의 새로운 사회주의 전략, 환경문제와 생태주의-사회주의 연대 등의 논의들이 국내 학계에 소개되고 또 논쟁이 벌어졌다. 벌써 30년이나 지난 얘기이다. 책을 통해 이런 내용들을 접하니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가 많이 변했음에도 여전히 비슷한 논란을 반복하게 만드는 진보적 사회운동 내의 이론정치 지형이 안타깝기도 하다. 그래서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답답한 시대에 기존의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의 경계를 깨뜨리고 넘어서려는 사회운동가의 시도는 그만큼 절실하고 또 의미가 크다.
이 책에는 여성/페미니즘, 환경/생태주의, 노동/신자유주의, 플랫폼 자본주의, 코로나 시대의 사회변혁 등 이 시대가 마주해야 하는 중요한 사회적 쟁점들을 천착하려는 저자의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모습이 담겨있다. 여기서 이러한 고민과 성찰을 가로지르는 사고의 축은 이중적인데, 한편에는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자들 또는 급진좌파들과의 전선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탈마르크스주의자 또는 다원주의자들과의 전선이 있다. 저자는 이 두 경계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고뇌하고 있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저자의 성찰은 사회 인식 틀과 실천전략 두 방향에서 진행된다. 한편에서는 다양성의 인정 속에서 통일성의 추구, 또는 다양한 가치들 사이의 연속성과 교차성을 향하고 있고, 다른 편에서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변혁을 향한다. 그래서 저자는 페미니즘/여성억압, 생태사회주의/기후위기, 신자유주의, 플랫폼 자본주의, 소수자 혐오와 마녀사냥 등 다양한 쟁점들과 사회변동에 대한 성찰을 통해, 생산과정/(노동)착취/노동계급 우선성에 기초한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착취와 억압들에 대한 인정과 이들 간의 교차 및 연합을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과 집권 이후 레닌이 보여준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의 억압에 비판의 시선을 던지면서, 상층엘리트 중심의 중앙집중주의가 아닌 소비에트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노동계급의 자발성과 민주적 소통, 정치적 다원성 등에 기초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결합을 새로운 실천전략으로 제시한다.
먼저 저자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급진좌파들이 여성 억압을 대하는 경직된 사고를 넘어서기 위해 생산과정의 우선성, (노동) 착취의 우선성, 노동계급의 우선성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페미니즘과 혁명적 사회주의의 차이를 강조하며, 페미니즘 정치가 남녀 노동계급의 단결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킨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여성 억압과 차별의 현실에 공감하는 데 서투른 태도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저자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장점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의 부족함을 메우려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투쟁의 중심을 여성 억압보다 계급착취에 두는 접근법에 반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착취를 낳는 자본주의'와 '여성 억압을 낳는 가부장제'라는 이원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통한 통합적 설명이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할 효과적인 지적 무기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은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가족과 여성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여성의 가사노동이 남성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에 기여함에도 그 가치가 인정되지 않고 또 지불되지 않는 이중의 착취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저자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 의지하는 급진좌파들이 기계적인 사고방식, 생산 영역 중심의 사고방식, 조직노동자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유연한 사고를 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적대와 모순이 상호 교차하는 변화무쌍한 상황에 최대한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투쟁과 쟁점들을 결합하고 연결시켜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태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시도하는 곳으로 이어진다. 여기서는 기존의 생태사회주의 이론들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무어의 세계생태론이, 경제적 위기와 생태적 위기를 자본주의 세계생태의 단일한 위기로 해석하며 변증법적 종합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본다. 여기서 저자는 이원론을 넘어서기 위한 과도한 일원론적 시도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기후 위기에 직면하여 전통적인 혁명적 원칙과 이론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데에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와 위안을 찾으려 하는 급진좌파들을 비판하면서, 미국의 샌더스와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했던 그린 뉴딜과 같은 과도적 대안을 위한 투쟁에도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투쟁은 "모든 소수자를 억압과 차별에서 해방하는 투쟁, 제국주의적 야만과 수탈을 종식하는 투쟁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공동의 투쟁일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경직된 사고를 넘어서려는 노력은 신자유주의와 플랫폼 자본주의, 나아가 코로나 대전염 시대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에 대응하는 노동운동의 시각에서도, 조직노동자 중심의 사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노조 밖 노동자들과의 격차와 단절 문제를 해결해야 연대의 확장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그동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여러 가지 관행과 타성에 젖어 전체 노동자의 연대를 소홀히 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 전략에서도 민영화 반대, 기간산업 재국유화,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부자증세와 무상복지 등과 같은 점진적 요구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를 보여준다.
저자의 생각처럼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회주의 사상의 혁신을 위해서는 현실 자체가 끝없이 역동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오늘날 플랫폼 자본주의와 코로나 시대는 그야말로 변혁이론의 혁신을 요구하는 중요한 시대적 조건들이다. 플랫폼 자본주의는 네트워크를 경제활동의 중심으로 만들면서, 기업생산, 조직관리, 유통, 소유, 시장, 교환, 노동(계약), 소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연결양식의 변화를 동반하고 있다. 저자는 특수고용이나 자영업화하는 디지털 노동 등에 주목하여, 제조업 중심의 시대에 형성된 조직노동자 중심적 사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미조직노동자와 생산과정 밖의 부조리에 대한 문제들로 시선을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문제들에 대한 대안으로 데이터 협동조합이나 공공플랫폼에 주목한다.
한편 저자는 플랫폼 자본주의와 코로나 전염병의 등장을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연관시켜 이해하려고 한다. 이것들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더 격화시켰다고 것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가 야생동물 관리와 상업적 유통, 도시화와 슬럼화로 인한 공공위생 문제의 악화, 의료의 영리화와 공공의료의 부족, 다국적 제약회사의 백신 및 치료제 유통 독점 등 다양한 신자유주의의 문제들이 코로나 전염병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것은 기후 위기에 따른 위험과도 연결된다. 물론 이들 간의 인과관계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이 되어야 하겠지만, 사회운동가들이 이들을 서로 연관시켜 생각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실천전략을 상상하려는 노력은 소중하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연속성과 교차성>을 통해 무엇보다도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면서, 관념적으로 급진화하고 있는 일부 좌파 집단의 경직된 인식틀과 실천전략을 비판하면서, 그 경직된 경계를 넘어설 것을 촉구한다. 대중적 기반과 유리된, 작고 고립된 급진좌파 집단들이 자기성찰을 통해 과대망상, 왜곡된 자기 이해, 경직된 내부 문화와 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변화에 대한 인식이 불철저하고, 민주주의적(또는 민족주의적) 과제와 사회주의적 과제를 분리하여 단계적으로 바라보고, 생산/노동/계급 중심성에 매몰되어 착취와 억압과 소외를 기계적으로 구분하고 위계를 설정하면서 '먼저와 나중', '중요와 부차'를 나누는 경직된 사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음에도 자신의 과거,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진보적 사회운동의 미래는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의 문제의식과 성찰적 비판은 더 설득력이 있고 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자기성찰들을 통해 현실의 변화를 이해하고 지속적인 사고의 전환을 이룸으로써 현실적으로 가능한 진보의 과제들을 실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책이 보여주는 이러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각에서 보면 아쉬움도 있다. 저자의 전환 시도가 경직된 경계를 충분히 깨뜨리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계급, 성, 환경, 소수자 등 다양한 적대들 속에서의 교차와 연대를 '노동계급 중심성의 확장'이나 '계급투쟁의 확장'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을 다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경계에 가두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계급만이 아니라 성, 소수자, 환경 등 다양한 착취와 억압, 차별과 불평등이 교차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회관계 양상들이 등장하고 있고, 또 그 속에 서로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지닌 쟁점들과 영역들이 존재함을 충분히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 간의 교차와 결합, 단결과 연대의 추구가 뒷문으로 다시 중심성/우선성의 논리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계급해방과 마찬가지로 여성해방, 환경위기 극복 등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과제를 안고 있다. 노동운동이 그 자체로 성차별이나 환경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상호교차성'이나 '투쟁들의 결합'은 미사여구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차별, 불평등, 적대의 문제를 총체적 인식틀 속에서 '단일한 위기'로 사고하고, 이로부터 '전체 노동계급의 이익'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그래서 경직된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저자의 시도가, 지금의 경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를 여러 비판적 이론들 가운데 하나로 바라보는 더 근본적인 사고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물론 이 책은 이미 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고 또 부분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그래서 사회진보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경직된 사고의 전환을 경험해볼 것을 권하고, 나아가 활발한 성찰과 논쟁을 이어가기를 희망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