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전 9시,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앞에 모인 10명의 목에는 쌍안경이 걸려 있다. 기다린 길이의 렌즈가 달린 카메라도 보인다. 이들은 올림픽공원 곳곳에 멈춰서서 쌍안경으로 나무 주변을 훑는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같은 곳을 바라보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새소리만 가득하다.
"밀화부리의 울음소리를 잘 기억해 두세요. 이 소리를 기억하면 집에서 창문을 열어도 밀화부리 울음소리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새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이들은 탐조(探鳥)인이다. 오로지 '새'라는 관심사로 묶인 이들이다. 연령대는 20대부터 60대까지. 직업 또한 대학생부터 은퇴한 회사원, 중학교 교사, 생태 코디네이터 등으로 다양했다.
시민과학이 만들어가는 생태계 다양성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어도 과학 연구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있다. 시민과학자들이다. 전문 장비나 막대한 예산이 아닌 스마트폰과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카메라 등을 활용하는 시민과학자들은 소수의 전문가나 정부 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접 뛰어들어 관찰하고 기록한다. 대표적인 분야가 생태학 등 환경 분야다.
이미 시민과학자들의 노력은 결실을 낳았다. 과거 시민들의 꾸준한 탐조 활동으로 철새보호구역 내 겨울 철새 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생명다양성재단, 서울환경연합 등 환경단체와 시민들이 참여한 '서울철새보호구역 시민조사단'은 중랑천과 안양천 인근 철새보호구역 모니터링을 통해 하천 정비사업으로 인해 철새 개체수와 종이 감소했다는 사실을 지난 달 발표했다.
시민과학은 여전히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기존 연구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자료를 만들고, 해결 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도출하는 등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 분야에 뛰어드는 우리 이웃들은 생물다양성 등 환경 문제를 전문가의 영역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직접 참여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연결'의 역할을 수행한다.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이 진행하는 '시민참여 대한민국 생물다양성 모니터링(K-BON)'이 시민과학자들이 문제 해결에 참여하는 모델의 하나다. 모니터링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계절 활동, 분포, 개체군 크기 변화가 예상되는 기후변화 생물지표종을 시민과학 온라인 네트워크인 '네이처링'에 기록한다. 현재까지 쌓인 기록만 11만2320건이 넘는다. 시민들의 기록은 기후변화로 인한 생물다양성 취약지역 확인 및 향후 생물종 분포예측 연구에 활용될 예정이다.
<프레시안>은 22일 '지구의 날'을 맞이해 서울의 새를 기록하는 '서울의새' 탐조 활동에 21일 동행했다. 2018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시민과학자 모임 서울의새는 여의도공원, 샛강, 올림픽공원 등지에서 매주 야생조류를 관찰하고 기록한다. 순수 탐조 모임이면서 매주 변화를 기록하는 시민과학 활동이기도 하다. 탐조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대학생, 회사원, 약사, 선생님...누구나 할 수 있는 탐조와 시민과학
실제로 서울의새에서 매주 서울 곳곳에서 진행하는 탐조는 3시간이 넘게 걸리는 긴 시간을 요함에도, 참여자가 빠르게 마감된다. 복잡한 도심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서울에서도 계절마다 다양한 새들이 관찰된다. 서울의새가 지난해 말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흰꼬리수리, 독수리 등 멸종위기야생생물과 솔부엉이 등 천연기념물, 동박새 등 기후변화 생물지표종 등이 서울에서 발견됐다. 시민들이 관찰하고 기록한 종만 160여 종이 넘는다.
서울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김진주(39), 김다나(34) 씨도 2년 전부터 탐조를 시작했다. 탐조에서 만난 새의 사진을 소셜미디어(SNS)와 블로그에 올린다. 이들은 새에 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다른 세상을 아는 일"이라고 말했다.
중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올해 휴직하고 본격적인 탐조를 진행하고 있다는 김은경(58) 씨도 탐조를 통해 환경과 지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확장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새를 보기도 하지만, 새를 보면서 자연과 생태계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는 의미다.
매주 동네의 새를 관찰하는 탐조인, 기록을 만나다
서울의새가 가지고 있는 탐조원칙 중 하나는 '새를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다. 탐조인들은 새와는 멀찍이 떨어져서 쌍안경이나 카메라로 새를 관찰한다. 무성한 나무 틈 사이에 앉은 새는 찾기가 힘들고, 그런 새를 찾고자 탐조인들은 서로서로 위치를 알려주느라 분주하다. 21일 탐조의 주인공은 검은색 몸에 노란 부리를 가진 대륙검은지빠귀였다.
한국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 대륙검은지빠귀 한 쌍이 2018년 서울에서 발견되면서 탐조인들은 "발칵 뒤집혔다." 새는 어린이공원과 올림픽공원 등지에서 발견되었고, 겨울에도 이동 대신 서울에서 월동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서울의새는 올림픽공원의 대륙검은지빠귀를 매주 보면서 이들의 변화하는 서식 행태를 기록하고 있다.
탐조인들이 만드는 기록은 그 자체로 시민과학이 된다. 새를 보고 찍는 것만으로 좋았던 탐조인들도 이제 기록을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서 '네이처링', 'eBird'(이버드) 등 시민과학 네트워크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 약사로 일하다가 은퇴 후 탐조와 새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는 배용래(66) 씨도 서울의새에 참여하면서 이버드를 활용한 기록에 나서고 있다. 배 씨는 "기록하면 개체 수가 변하는 걸 느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경기도 성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양미화(53) 씨 또한 "원래 혼자 공원에서 탐조를 했는데 모임에 나와서 네이처링과 이버드 활용법을 배우고 있다"라고 말했다.
기록하는 탐조인들은 시민과학자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자료를 만든다. 기존 연구원들이 만들어내는 자료를 보완하는 차원이 아닌, 동네에 살아가는 시민의 관점에서만 만들 수 있는 기록이다. 이진아 대표는 "아직 시민과학이라는 개념이 정확히 정립되지는 않은 것 같다"라면서 "어쨌든 우리가 하는 게 시민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면 다른 시각의 자료를 만드는 일 같다"라고 말했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멈춰서 새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고 시민과학 네트워크에 공유하면서 진행된 이날의 탐조는 3시간이 지나 끝났다. 이진아 대표는 "다들 재미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탐조인들은 서로의 '종추'('종을 추가하다'의 줄임말. 본인이 관측한 종이 추가되는 일) 사실을 공유하고 과거에 찍은 새의 이름을 물으며 올림픽공원을 걸었다. 앞으로 한 달 후 서울의새는 다시 올림픽공원을 찾아 이전과 같은 길을 걸으며 새를 관찰할 예정이다. 2018년 모임의 시작부터 그랬던 것처럼, 서울의새는 올해도 매주 목요일마다 탐조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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