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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전쟁이 가려버린 것

[해외 시각] 베트남 이후 미국의 전쟁이 초래한 희생과 피해  

지금 미국의 지배계층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환호작약하고 있다. 2018년 자신들이 미국의 주적으로 선언한 러시아와 중국을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선 약한 상대인 러시아를 전쟁과 제재로 무릎 꿇린 다음 중국을 상대하겠다는 계획을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미국의 군사주의를 발동시켜(나토와 미일 안보조약으로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의 하위 군사동맹으로 만들고 소련을 봉쇄) 첫 번째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현시킨 것처럼, 이번 우크라이나전쟁이 다시 한 번 유럽 및 일본을 미국 주도 군사진영에 결집시켜 제2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가능하게 할 절호의 기회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지난 2000년 이후 미국의 군사주의를 비판해온 앤드류 바세비치 보스턴대 교수는 2001년 9.11테러 이후 지난해 8월까지 20년간 미국이 대중동지역에서 벌여온 전쟁의 결과를 직시하라고 비판한다. 무려 8조 달러의 군사비를 낭비해 가면서 1백만 명 이상의 사망자의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등에서 수천만 명의 전쟁 난민을 만들어낸 실상을.

그는 특히 1967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베트남전쟁 반대 연설을 상기시키면서 지금 미국이 해야 할 일은 인류의 공멸을 초래할 전쟁의 지속이 아니라 미국적 질병의 근본 원인인 인종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군사주의에 대한 근원적 반성이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푸틴의 전쟁을 빌미로 미국이 일으킨 수많은 전쟁의 실패와 잘못을 덮어버릴 것이 아니라, 인류 최대의 위기인 기후위기 대처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원문은("Putin Changed the Subject") 미국의 반전 매체 톰디스패치(tomdispatch.com) 4월 14일자에 실려 있다. 편집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최근 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반전 연설 "베트남을 넘어서 - 이젠 침묵을 깨야 할 때" 55주년 기념식에 참가했다. 1967년 4월 2일, 킹 목사는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 연설을 통해 베트남전쟁 반대 입장을 처음 공개적으로 밝혔다. 당시 흑인 민권운동을 이끌던 킹 목사가 전쟁 반대 입장을 밝힌 데 대해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심지어 일부 민권운동가들도 킹 목사가 본래의 사명에서 벗어났다며 민권운동에만 전념하라고 촉구했다.

이번 기념식 역시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열렸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당시 킹 목사 연설의 낭독을 함께 경청하는 것이었다. 그의 "베트남을 넘어서" 연설에는 감동적인 구절들이 많이 포함돼 있다. 예컨대 킹 목사는 "흑인과 백인이 같은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지 못하게 하는 나라, 흑인과 백인이 시카고의 같은 구역에서 함께 살지 못하게 하는 나라, 바로 그 나라를 위해서 흑인과 백인 청년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함께 (적을) 죽이고 또는 (적에게) 죽는 장면을 TV에서 봐야 하는 잔인한 아이러니"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또 조지아 주 서남부나 뉴욕의 할렘 출신의 흑인 청년들이 "자신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자유를 동남아의 어떤 나라에 선사하기 위해 8천 마일을 날아가야 하는" 부조리를 지적하기도 했다.

적어도 내게 그의 연설은 미국의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혹독한 비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비판은 내게 지속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인종주의, 물질주의, 군사주의

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 즉 미국 독립선언문과 헌법에 표현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킹 목사가 "거대한 세 쌍둥이"라고 불렀던 미국에 만연한 인종주의와 물질주의와 군사주의 사이의 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거대하다. 오랜 기간이 지났음에도 킹 목사가 그토록 감명 깊게 성찰했던 그 간극은 현재까지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킹 목사는 미국에서 실제로 누릴 수 있는 자유라는 게 얼마나 타락하고 조잡한 것인가를 간파한 최초의 인물도 아니고, 미국 정치문화에 만연한 위선을 지적한 유일한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드높은 도덕적 위상 덕분에 그의 비판에서는 특별한 힘이 느껴진다.

2022년 현재, 비록 때늦고 마지못해서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이(모두는 아니고) 적어도 인종주의에 대해서만큼은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추악한 현실임을 인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인종주의는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게 하겠다는 미국의 공식적 이상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물론 추악한 현실의 인정이 곧바로 인종주의의 시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잘하면 인종주의 극복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최악의 경우, 죄의 고백이 곧 죄의 용서로 이어진다는 착각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행동에 나서지 않는 빌미가 될 수 있다.

최근 들어 고조된 인종주의에 대한 관심은 바로 이러한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바로 미국인들로 하여금 물질주의와 군사주의의 해악은커녕 그 존재 자체를 외면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킹 목사가 말한 "거대한 세 쌍둥이(Giant Triplets)" 중 물질주의와 군사주의는 공공의 담론에서 배제돼 있다. 정치권에서 이 둘은 아예 무시되거나, 잘해야 한 두 마디 언급되는 정도다.

대통령들이란 대체로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법이며 바이든 또한 이런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물질주의와 군사주의가 미국인의 삶에 미친 영향을 직시한 대통령은 거의 없다. (내 생각엔 지미 카터가 유일한 예외다) 다른 사안들엔 그토록 말이 많은 바이든도 이 두 주제에 대해서만큼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킹 목사는 55년 전의 연설에서 베트남전쟁은 "미국인의 영혼에 깃든 매우 심중한 질병의 징후에 불과할 뿐"이라고 예언적으로 지적했다. 전쟁은 이미 50년 전에 끝났으나 그 질병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라는 미국에 만연한 불평등과 가난, 끝없는 전쟁 추구 등이 바로 그 증거다. 무엇보다도 지속되는 인종주의와 만연한 물질주의, 그리고 파괴적인 군사주의 등 "거대한 세 쌍둥이"가 서로가 서로를 보강하며 지탱해주는 긴밀한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완강하게 부정하고 있다는 데에서 질병의 위중함을 확인할 수 있다.

킹 목사는 연설에서 미국 정부가 평화에의 헌신을 강조하고 있으나 사실은 "세계 최대의 폭력 행사자"가 됐다고 질타했다. 당시 나날이 늘어가는 죽음과 파괴의 실상에 비추어보면 킹 목사의 이 비판에는 논박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에 따른 파괴와 학살과 비교해보아도 이는 마찬가지다. 2001년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분으로 미국이 수행한 전쟁들의 결과만 보아도(이라크에서만 100만 명 가까이 사망했다) 미국의 폭력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1967년 연설에서 킹 목사는 "우리 미국 국민은 가치의 근원적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했다. 그 후 수 십 년, 그러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자들, 워싱턴이나 할리우드, 또는 월가나 실리콘밸리의 권력자들은 그러한 혁명에의 지향을 스스로 억제해 왔다. 물론 돈이 될 경우에는 예외였다. 그 결과 오늘날 물질주의와 군사주의는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11일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와 그의 아내 코레타 스콧 킹의 무덤에 헌화한 뒤 두 손을 모으고 걸어 나오고 있다. ⓒAP=연합뉴스

다음 전쟁을 위한 준비

그런데 물질주의와 군사주의에 대한 미국인의 지향이라는 익숙한 현실을 유지하려는 세력에게 우크라이나전쟁은 너무나도 절호의 시기에 일어났다. 사실 이것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나 다름없다.

즉각적 효과라는 측면에서 이 전쟁은 미국의 정치에 두 가지 측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첫째, 미국인들의 무한한 소비 추구가 만들어낸 문제, 특히 기후위기에 관련한 워싱턴의 너무도 분명한 무능력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지워버렸다. 하르키우나 마리우폴에서 일어난 끔찍한 뉴스들이, 인류의 기후 위기 대처가 미흡하며 따라서 재앙적 결과가 불가피하다는 최신의 기후위기 보고서를 묻어버린 것이다.

또한 러시아의 노골적 우크라이나 침공은 작년 8월 미국의 황급한 아프간 철수, 즉 아프간전쟁의 실패를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했다. 이에 따라 펜타곤은 무려 20년에 걸친 참담한 군사적 실패에 대한 면죄부를 얻게 됐다. 미 군사주의의 수호자들에게 지난 20년간의 참담한 실패와 실망을 잊어버리는 것-아니, 지워버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마치 마술과도 같이 푸틴이 주제를 바꿔버린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이뤄졌는가를 실제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미국 외교정책의 제도권을 대변하는 <포린 어페어즈>에 최근(3월 14일) "팍스 아메리카나의 재림?(Return of Pax Americana?)"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실렸다.

물음표(?)에 현혹되지 말자. 사실은 감탄사(!)가 저자들의 집필 의도를 보다 정확히 대변한다. 저자 마이클 베클리와 할 브랜즈는 각각 터프츠대와 존스홉킨스대 교수로, 워싱턴의 강경 우파를 대표하는 미국기업연구소(AEI)의 선임 연구원들이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전쟁을 환영한다. 미국의 군사주의 분파가 선호하는 보다 능동적이며 힘의 행사에 기초한 대외정책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푸틴이 미국에게 "치열한 경쟁의 시대를 맞아 (동맹을) 재결집하고 (군사 활동을) 재개(reload) 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제공했다고 썼다. 미국의 과녁에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도 포함돼 있다. ‘미 군사 활동의 재개’, 이것이 핵심 메시지다.

저자들은 "만연한 대중들의 무관심"과 "전략적 무기력"이 미국을 약자의 위치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글에서는 아프간전쟁과 이라크전쟁을 단 한 번 언급했을 뿐이며, 9.11 이후 20년간 이어진 미국의 군사 활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으며 미국은 무엇을 잃었는지는 전혀 얘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들에게 지난 20년간의 쓰라린 경험은 미래의 군사 활동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우크라이나전쟁은 너무나도 적절한 시기에 일어난 것이다. 베클리와 브랜즈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전쟁은 "다가오는 전제주의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 기회의 창"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미국은 "고강도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력에 대규모 투자를 해야" 하며(미국의 군사 예산은 이미 압도적 세계 1위다) 나아가 "적들에 대항해 전쟁까지도 감수할 용기를" 과시해야 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바라마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측면에서 보더라도 내 판단으로는 우크라이나전쟁은 이미 모든 당사자들에게 재앙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무기제조업체는 예외다). 이 전쟁이 언제, 어떤 식으로 끝나든 승자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희생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에게 이번 전쟁은 워싱턴의 각성을 초래할, 즉 정책결정자들에게 "하드파워(군사력)의 가치"를 일깨워줄 절호의 기회로 축하할 만한 일이다.

킹 목사는 뭐라고 말할까?

베클리와 브랜즈의 의견을 소개한 것은 독창적이거나 흥미로워서가 아니다. 여전히 워싱턴을 지배하는 통상적 지혜의 핵심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전쟁 도당(war party)은(의회가 초당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은 최근의 일련의 실패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당황하기는커녕 다시 한 번 정책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전의 대외정책 담당자들이 베트남전쟁 실패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스스로 사면하고 그 교훈을 애써 무시했듯이, 오늘의 정책 담당자들은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새로운 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들은 미국의 과거 영광스러운 날을 재현할 것처럼 보이는 신냉전을 적극 환영한다. 물론 그 영광스러운 과거에는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은(두 전쟁에서 10만 명 가까운 미군 병사가 전사했다) 물론 (막대한 자원을 낭비한) 핵무기 경쟁과 (민주적 외국 정부를 전복한) CIA의 비밀공작 등 구역질나는 행태들이 포함돼 있다. 두 저자는 이 추악한 프로젝트를 위한 필경사를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만일 워싱턴이 이들의 선창에 맞춰 행동에 나선다면, 그에 따른 불가피한 오명은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뻔뻔스러운 군사주의 행태에 대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주저 없이 비판했을 것이다. 새로운 팍스 아메리카나가 실은 제국주의적 팽창 음모임을 은폐하려는 모든 프로파갠다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했을 것이다. 불과 6개월 전에 끝난 미국의 20년 대중동전쟁이 초래한 손실과 이익을 정확하게 계산해보라고 촉구했을 것이다. 그 바탕 위에서 다음 전쟁에 나설지 여부를 결정하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가치의 근원적 혁명, 즉 물질보다 사람이 우선되는 사회를 향한 노력을 재차 주문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임박한 기후위기를(베클리와 브랜즈는 묵살한) 거론했을 것이다. 기후위기야말로 2022년 미국이 감당해야 할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1967년 리버사이드 교회 연설의 결론 부분에서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오늘이 곧 내일이라는 사실 앞에 직면했습니다. 즉각적 행동을 요구하는 현실의 화급함에 직면했습니다. 삶과 역사에 쉼 없이 펼쳐지는 고난 속에서 뒤늦은 대응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행동의 연기는 곧 시간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잃어버린 기회를 한탄하며 넋 놓고 우두커니 서있을 때도 있습니다. 인생사의 조수는 언제나 밀물일 수 없습니다. 곧 썰물로 밀려가죠. 우리는 흐르는 시간이 잠시라도 멈추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시간은 인간의 소망과는 무관하게 그저 흘러갈 뿐입니다. 수많은 문명의 잔해 위에는 ‘너무 늦었어’라는, 애처러운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이미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아니기를 희망해야 한다. 그러나 설사 시간이 남았다 해도, 지구와 인류를 살리기 위해 남은 시간은 그렇게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최근까지 미국과 지구촌에 엄청난 희생을 초래했던 무분별한 군사적 모험을 다시 시도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여유는 없다는 점이다. 킹 목사가 주창했던 가치의 근원적 혁명을 더 이상 연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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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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