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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은 원경, 패싸움에 휘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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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은 원경, 패싸움에 휘말리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40~41화

40. 모정

제주도를 다녀온 뒤, 원경에게 새로운 '방황의 계절'이 찾아왔다. 특히 한산스님이 사라지면서 홀로 남았다는 외로움에 갈등이 커졌다. 원경은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을 계속했다.

한산스님까지 사라지자 인생이 너무 허망하다고 생각해 <구운몽>의 주인공인 성진(性眞)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같이 어울리던 젊은 스님 5명이 "집단으로 환속을 해 긴 시각에서 한 20년간 돈을 번 뒤 우리 사회를 위한 큰일을 하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4명은 집단으로 환속을 했지만 원경은 자신의 처지가 처지인지라 유일한 은신처라고 할 수 있는 승복을 벗는 것이 자신이 없어 고민을 하고 있었다.

▲ 20대 후반의 원경 ⓒ손호철

"성진! 큰일 났어. 기산이(가명)가 다 죽게 생겼어!"

환속한 친구가 숨이 넘어가게 절로 뛰어 들어오며 고함을 질렀다.

"기산이가 왜?"

"기산이가 무도장 사람들에게 패거리로 맞아서 반죽음이 됐어."

"아 그래?"

원경은 친구를 따라 뛰어갔다. 뛰어가며 들으니, 넷이 술을 마시다가 기산이 취해서 옆 손님과 싸움이 붙은 것이다. 기산은 원경을 따라다니며 운동을 해 온지라 그 친구들을 실컷 두들겨 팼고, 매를 맞은 친구들이 대전역 앞의 도장으로 연락해 단원들이 집단으로 달려와 기산이를 반죽음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장에 도착한 원경은 점잖게 사태를 수습하고 화해를 시도했다. 한데 갑자기 한 놈이 몽둥이로 원경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반사적으로 몽둥이를 잡은 원경은 몽둥이를 빼앗아 그놈의 어깻죽지를 가격했다. 그놈은 신음소리도 못 지르고 고꾸라졌고 진짜 패싸움이 벌어졌다. 역전 광장에서 40대 1의 싸움이 벌어져 18명이 원경의 몽둥이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 다양한 무술을 수련한 무술의 고수로 젊은 시절 사건에 휘말렸다던 원경이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며 오랫만에 무예를 보여주고 있다. ⓒ손호철

"이놈들, 멈추지 못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들이 원경을 에워쌌다. 경찰까지 팼다가는 사태를 수습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한 원경은 순순히 경찰이 수갑을 채우도록 내버려뒀다.

"이름은?"

"생년월일은?"

"주소는?"

정해진 주소도, 아무런 증명서도 없는 원경에게 경찰은 아는 사람 주소라도 대라고 압박했다. 결국 원경은 가까이 살고 있는 어머니의 이름, 그리고 가게 이름을 댔다.

▲ 주민등록도입 초기의 주민등록 검문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야, 중놈 너 나와!"

원경은 19일 동안 갈아입지 못해 냄새나는 승복을 마무리하고 의아한 눈으로 경찰서 유치장을 나섰다. 유치장을 나서자 어머니가 서 계셨다.

"아이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원경은 부끄러움과 놀라움에 어쩔 줄 몰랐다.

"야 인마 어머니가 합의금을 가지고 오셔서 풀어 주는 거야."

"어머니가 무슨 돈이 있어서…"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고 돈을 마련하려니 너무 액수가 커서 결국 집을 팔았어요."

나를 위해 살고 있는 집을 파시다니! 원경은 가슴이 뭉클해지고 그동안 전혀 느끼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예기치 않은 패싸움은 원경으로 하여금 어머니와 모정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이후에도 어머니와의 관계는 그리 가깝지 않았는데 1979년 막내가 군대를 가며 의지할 곳이 없게 된 어머니가 찾아와 같이 살기 시작해 2004년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살았다.)

▲ 1996년 원경의 동국대 사회복지학 석사 졸업식에 참석한 어머니 정순년 여사( 원경 오른쪽) ⓒ원경스님

41. 현판 사건

1968년 주민등록법이 제정됐다. 게다가 1968년 청와대에 북한 특수부대가 쳐들어온 김신조 사태와 울진 무장공비 사건으로 가는 곳마다 검문을 강화됐다. 과거에는 아무 이름으로나 만든 도민증이면 통과가 됐는데 주민등록증이나 새로 예비군이 조직화되면서 예비군수첩이 있어야 했다. 검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호적이 없는 자신의 뿌리를, 버려진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 어디 계세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더욱 답답한 것은 이럴 때마다 마음을 잡아주던 한산스님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아줌마! 여기 술 더 주세요."

그럴수록 원경의 도피처는 '곡차(불교에서 술을 이르는 말)'였다. 그는 이 절 저 절을 돌아다니며 나이든 주지스님들의 귀여움을 받았지만, 시간만 나면 곡차로 시름을 달랬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됐다고는 하지만, 평생 남들과 다른 '이단아'로 살아왔고 어려서부터 '곡차'를 마셨다하면 말술이었던 고봉스님 등 격식과 규율에 개의치 않았던 당대 최고의 선승들에게 배운 그는 젊은 시절 곡차를 스스럼없이 마셨다.

"성진스님, 저희가 토굴암자를 하나 지었는데 현판이 필요하니, 하나 얻어주세요."

상주의 한 절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소영 스님, 목우스님 등이 찾아와 부탁했다.

"그래요? 잠깐 기다리세요."

원경은 절에 들어가 현판을 떼어 이들에게 줬다.

"주지스님! 여기 웬 중들이 파출소 앞 정거장에 스님 절 현판을 가지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스님이 주셨나요?"

"아니 현판을요? 준 적이 없는데. 그놈들이 언제 훔쳐갔지?"

경찰은 이들을 절도혐의로 구속했다.

"주지 스님, 사실은 그 스님들이 토굴암자를 지었는데 현판이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떼어준 것입니다. 따라서 절도가 아니니 제가 경찰서에 가서 해명을 해주고 오겠습니다."

"…"

주지스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주지스님에게 이야기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그 현판은 그 스님들이 훔친 게 아니라 제가 준 것입니다."

경찰서에 가서 설명을 하자 경찰은 다짜고짜 원경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주지스님이 원경을 절도혐의로 고발한 것이다.

"아이 십팔! 주지 개자식, 이럴 수가 있어!"

원경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주지스님이 일꾼들 주려고 사다놓은 술을 다 훔쳐 먹어버리고, 절 내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다니는 등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니 괘씸죄에 걸린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패싸움 사건으로 경찰 신세를 졌고 제주도에서 국토건설단까지 끌려갔다 왔는데 절도죄로 감옥살이까지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유치장에서 긴 탄원서를 썼다. 그의 가족관계로부터 자신이 겪은 기구한 삶을 애절하게 적어 선처를 부탁했다.

"야, 면회다."

"면회?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나가보니 잘 차려입은 한 중년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이번 사건 담당판사의 부인이에요. 남편에게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찾아왔어요."

덕분에 원경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그러나 운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야 이 시팔놈아! 그래 나를 절도로 신고를 해? 너 같은 놈이 부처님을 섬기는 주지냐? 개새끼지!"

원경은 석방이 되자마자 절로 달려 올라가 현판을 떼어다 주지스님 앞에서 도끼로 다 빠개버렸다. 원경은 다시 잡혀가 10개월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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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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