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이날이 되면 온갖 정치인과 방송에서 장애인에게 관심을 쏟는다. 마치 364일을 모르고 지냈다가 그날에서야 장애인을 발견한 것처럼 유난스럽다. 개인과 가족의 엄청난 희생과 죽을힘을 다한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해 낸 훈훈한 사례가 소개되고, 유명인들은 일면식도 없는 장애인의 친구가 되어 너도 나도 '장애우'를 연발하며 훈훈함을 연출한다. 장애 '극복'의 신화는 개인의 노력으로 장애를 이겨낼 수 있다는 폭력이 되고, 모든 장애인을 친구라고 부르고, 자신을 호명할 때조차 친구라 칭해야 하는 '장애우'가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거쳐 온 학교에서, 직장에서, 오고가는 거리나 식당에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장애인을 만나고, 어울려 살아왔을까? 우리나라의 법적 기준에 따르면 국민 20명 중 1명 이상이 장애인인데, 일상 속에서 그만큼의 장애인을 만나기 쉽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라고 호명한 비장애인의 일상에 장애인이 끼어들 틈이 너무 좁다. 그런데 최근에 장애인들이 일상에 균열을 내며 비집고 들어왔다. 지하철 투쟁을 통해서다.
많은 논쟁을 뒤로 하고,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서울 지하철 1칸의 정원은 160명이다. 인구비율대로라면 한 칸에 8명, 지하철 1대에 80명의 장애인이 탑승하고 있어야 한다. 휠체어, 흰 지팡이 등의 장애인보장구를 사용하는 장애인이 주로 중증장애인이라는 점을 감안해 중증장애인(장애의 정도가 심한)의 비율 37.4%를 적용해보자. 1대의 지하철에 약 30명의 중증장애인이 탑승해야 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지하철 투쟁에 참여한 인원보다 많다. 만일 장애인이 비장애인처럼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면 전장연의 지하철 투쟁은 이슈조차 안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나 탈 수 있는 지하철에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 여러 명이 한꺼번에 타는 것만으로도 투쟁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사회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서울교통공사는 전장연과 관계자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경찰에 접수된 신고도 여러 건이다. 유력 정치인의 비난, 공공기관의 소송, 일부 시민의 분노가 전장연을 향해 있다. 시민의 불편을 초래한 전장연에 대한 이들의 비난과 분노는 정당한 듯 포장되어 있지만 이들이 말하는 '시민'에는 장애인이 제외되어 있다. 장애인이 경험하는 일상의 불편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장애인이 아니라 잘못된 투쟁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다", "왜 정치인들을 찾아가지 않고, 애꿎은 시민을 볼모로 잡느냐"는 말이 주변에서도 들린다. 전장연을 비난하자니 의식이 낮아 보여 시민을 끌어들이고, 정치인을 만나서 이야기하라는 조언까지 한다. 정작 장애인들이 외치는 '장애인권리예산'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외면해서, 만나주지 않아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목소리를 마저 내지 못하면 동정과 시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지하철 투쟁의 이유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시민들이 나서야 할 때다.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난 2월에 만난 전장연의 활동가는 지하철 투쟁에 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다시 장애인의 날로 돌아가자. 여러 장애인 단체는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 대신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라 이름 붙였다. 비장애인의 동정과 시혜, 선행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시민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의 결의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시민들의 역할은 어렵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뿐이다. 앞으로 4월 20일을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기억하자.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의제별 연대 활동을 통해 풀뿌리 시민의 복지 주체 형성을 도모하는 복지단체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