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러시아 학생 드미트리 레즈니코프는 모스크바 시내에서 별표 8개(********)를 적은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돼 법원으로부터 벌금 5만루블(약 74만원)을 선고받았다. 8개의 별표가 러시아어로 8글자인 '전쟁 반대(нет войне·no to war)'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였다.
러시아 당국이 반전 목소리를 강하게 억압하고 있는 가운데 기상천외한 혐의로 인한 체포 소식이 잇따라 전해진다. 러시아 당국은 지난달 형법을 개정해 러시아군에 대한 허위 정보를 유포할 경우 최대 징역 15년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러시아 인권감시단체 OVD-Info에 따르면 2월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반전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만5천명이 넘는 시민이 체포됐다.
러시아 독립언론 <모스크바타임스> 등 외신은 지난 10일(현지시각)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톨스토이의 저작 <전쟁과 평화>를 들고 서 있던 콘스탄틴 골드만이 시위법 위반으로 경찰에 끌려갔다고 전했다. 골드만은 이 광장에 위치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라고 써 있는 장소 옆에서 이 책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지난 2일 모스크바 푸쉬킨스카야 광장에서 햄 한 봉지를 머리 위로 높게 들고 서 있다가 경찰에 체포된 남성의 소식도 전해졌다. 이 남성이 들고 있던 햄의 상표는 '미라토르그(Мираторг·Miratorg)'인데 남성은 검은 펜으로 상표의 뒤 5글자에 엑스(X) 표시 등을 친 채 햄을 들고 있었다. 뒤의 5글자를 지운 뒤 남는 이 상표의 앞 3글자 미르(Мир·Mir)는 러시아어로 '평화'를 뜻한다.
지난달 29일엔 소셜미디어(SNS)에 모스크바에서 두 손으로 카드를 머리 위로 높게 들고 서 있는 남성에 경찰이 다가가고 있는 영상이 게재됐다. 남성이 들고 있는 카드는 러시아의 결제시스템인 미르(Мир·Mir·평화)에서 발급한 카드였다. 남성은 경찰에 일단 연행된 뒤 훈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13일엔 러시아 시베리아에 위치한 노보시비르스크, 북서부 니즈니노브고르드 등에서 에서 아무 것도 써 있지 않은 빈 종이를 들고 서 있다가 경찰에 연행되는 1인 시위자들의 영상이 외신에 보도되기도 했다.
반전 시위는 거의 '의도'만으로도 체포되고 있는 데 반해 전쟁 찬성 메시지로 쓰이고 있는 'Z' 표시는 러시아 전역에 점점 더 퍼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우크라이나에 추입된 러시아 군용 차량에 표시돼 있던 것을 계기로 침공 찬성의 상징이 된 Z 표시는 지하철 역 내 표지판, 극장, 유치원 창문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 있으며 반전 운동가들의 집에 위협의 표시로 새겨지기도 한다.
기상천외한 체포에 더 기발해지는 시위
<모스크바타임스>는 거의 모든 형태의 반전 시위가 금지됐지만 시민들이 굴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의 시위를 고안해서 실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모스크바 곳곳에서 양손을 뒤로 묶인 채 주검처럼 널브러져 있는 1인 시위가 등장했다. 부차-모스크바 시위라고 불리는 이 시위는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낳은 부차 학살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의 반전 페미니스트 단체(FAR)가 주도하는 십자가 꽂기 운동도 진행됐다. 러시아 폭격이 집중된 우크라이나 남동부 마리우폴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이 시위 첫 날인 지난 3일에만 25개 러시아 도시에 250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다고 한다. 이 단체는 동전이나 지폐에 반전 메시지 쓰기, 추모의 의미로 검은 옷 입기,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울음을 터뜨리기 등 여러 방식의 시위를 고안했다.
러시아 중부 페름에서는 식료품점 가격표를 바꿔치기하는 시위도 등장했다. 실제 가격보다 매우 높은 가격이 적힌 가격표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수, 전쟁으로 더욱 심해진 물가상승률 등 상징적인 숫자를 사용하며 "러시아 군대는 약 400명이 포격을 피해 숨어 있던 마리우폴의 예술 학교를 폭격했다" 등의 숫자에 대한 설명도 함께 적는 식으로 대중의 관심을 유도한다.
러시아, 만인에 의한 만인에 의한 감시로
러시아 당국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경찰뿐 아니라 시민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신고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사할린의 영어 교사인 마리아 두브로바가 수업 시간에 "전쟁 없는 세상"에 대한 노래가 나오는 영상을 틀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별개의 나라"라고 아이들에게 말한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 받았고 학교에서는 해고됐다고 보도했다. 법정에서는 그는 학생 중 하나가 녹음한 것으로 보이는 그 날의 대화가 재생됏다.
서부 도시 펜자에서는 영어 교사인 이리나 겐이 학생이 러시아가 왜 유럽에서 열리는 국제 스포츠 대회에 참가할 수 없냐는 질문에 "내 생각에 그건 맞는 일 같다. 러시아가 문명화된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 조치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가 해당 대화의 녹음본이 소셜미디어에 게재되며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모스크바의 한 컴퓨터 수리점주인 마라트 그라체프는 모니터에 "전쟁 반대" 문구를 띄워 놓았다가 행인에게 신고 당해 벌금형을 부과받았다.
매체는 러시아 서부 칼리닌그라드에서 당국이 주민들에게 우크라이나 "특별 작전"에 대한 "선동자"들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신고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는 현지 언론 보도를 인용해 러시아 당국이 시민들의 신고를 독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 본인이 의심 받던 소련 시절의 공포가 되살아 나고 있다는 해석도 나왔다.
알렉산드라 바예바 OVD-Info 법무팀장은 반전 활동에 대한 시민 신고가 급격히 늘고 있는 것이 보인다며 "억압은 당국에 의해서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시민들에 의해서도 가해진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2월24일부터 체포된 1만5000명 가량의 반전 시위자들 대부분이 벌금형을 선고 받았지만 30일 가량 구금된 경우도 있고 몇몇 사람들은 더 긴 징역형이 선고될 위기에 처해 있다고 했다.
다만 <뉴욕타임스>는 반전 목소리를 낸 시민을 신고하는 이도 있지만 돕는 이도 있다고 전했다. 영어 교사 두브로바의 사례가 보도된 뒤 그가 가르쳤던 학생 중 하나가 그를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컴퓨터 수리점의 그라체프의 경우에도 그를 돕기 위해 벌금액수인 10만루블(약 150만원)이 훨씬 넘는 25만루블(약 376만원)이 모금되기도 했다. 이 돈을 법률자문을 제공한 인권단체에 기부할 생각이라는 그라체프는 "손님 중에 모니터의 반전 메시지를 보고 신고하겠다고 위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국가의 선동만 접하는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신고했을 것"이라며 "이제 반전 메시지가 있던 자리에 '여기 벌금 10만루블짜리 표지가 있었습니다'라고 써 놓을까 고민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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