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들은 폭넓은 대중을 더이상 원치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거의 전부가 대학교수다. 캠퍼스가 그들의 집이고, 동료들이 그의 독자다. 논문과 전문 학술지가 그들의 미디어다."
'공공 지식인'이 퇴조했다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마지막 지식인>(Last Intellectuals)은 미국에서 1987년 처음 출간됐다. 이 책( <마지막 지식인 : 아카데미 시대의 미국 문화>(러셀 저코비 지음, 유나영 옮김, 교유서가 펴냄))은 교양 있는 독자들과 소통하며 정력적으로 글을 쓰는 "지난"(last) 세대의 지식인들이 사라지고 초대형 대학들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젊은 지식인들은 연구실로 숨어버린 현상에 대해 미국적 맥락에서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
출간된지 무려 35년이 지나 이제는 '고전'이라고 할만한 이 책은 2022년 한국에서도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 이 책은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지적하듯이 "(저자) 저코비가 1987년도에 관찰한 지식인의 전문화/제도권화/학술화는 이제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한층 더 심화되면 심화되었지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저자가 '황금기'로 묘사하는 독립 지식인과 독립 잡지의 전성기나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문화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에서 지식사회는 일찌감치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또 "서울/상위권 대학의 정규직 교수 집단은 일정한 지대를 확보한 지배 블록의 일부로 자리잡은 듯 보인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내각 명단 발표 등 주요 정치 이벤트마다 등장하는 '폴리페서(polifessor,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교수들을 일컫는 조어)'라는 비판은 교수가 한국 사회 지배층에서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전문화/고도화된 지식, 고등학생의 70%가 진학하는 높은 대학 진학률(OECD국가 중 1위), 소셜 미디어(SNS)의 활성화로 인해 변화된 소통 방식 등도 저자의 '공공 지식인'에 대한 문제 의식을 현재의 한국 사회로 옮겨올 때 고려해야할 변수들이다.
이런 사회적 변수들은 자본주의의 고도화로 갈수록 벌어지는 경제적 격차와의 화학적 결합을 통해 정치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이는 다시 대중들의 삶을 구조화한다. 한국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같은 걸출한(?)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포퓰리즘 정치 양상은 뚜렷이 보인다. 지난 3월 치러진 대선은 소위 '보수'와 '진보'의 진영간 대결이 승패를 갈랐다. 정당간 정책적 차이는 크게 쟁점이 되지 않은 채,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묻지마 지지'를 강요하는 정치적 양극화 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는 듯 하다. '정권 교체'라는 안티테제 이외에는 어떤 비전이나 노선도 없는 '정치 신인'이 검찰총장에서 대통령의 자리로 이동했다. 초기 내각을 발표하는 모습에서 '권력 교체' 이외에 다른 비전은 진정 없었다는 것이 점점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듯 하다. (지난 대선에서 가장 쟁점이 된 이슈는 '여성가족부 폐지'인데, 이는 트럼프와 공화당이 집중하는 '문화전쟁(culture war)'에 가깝다. 두 정당의 경제·민생 영역에서 입장 차이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공공 지식인'의 존립 자체가 가능한 일인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대졸'이 평균 학력이 되어버린, 소셜 미디어를 통해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하고만 소통을 하며 자신의 생각을 더 굳건하게 만드는 확증편향성에 익숙한 대중들은 이제 더 이상 전문가, 지식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 취하고 나머지는 "가짜 뉴스"로 취급하는 경향이 일반화되어 버렸다.
더 나아가 현재의 한국에서 대학의 기득권화를 문제 삼는 것은 민망한 수준이다.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고 지식인을 배출하는 기관이 아니라 취업 등을 통해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통로, 내지는 자격증 취득 기관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상 차기 대통령을 탄생시킨 사건이자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조국 사태'에서 한국사회에서 대학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한정된 사회·경제적 자본을 나눠 갖는 처절한 쟁투에서 대학은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이들을 걸러내는 자격시험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합의된 인식이다. '공정'이라는 이 시대 최고의 가치에 걸맞게 학생들을 선발했는 지가 최상위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되어 버렸다. 정작 대학이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무엇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그 과정을 통해 어떤 지식인을 길러내는 지는 중요치 않다. 자신들의 자녀를 명문대학에 밀어넣기 위해 각종 편법을 동원하는 일부 기득권 계층이나, 입학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됐기 때문에 십수년간의 수학 과정을 모두 없었던 일로 만들어 '고졸'이 돼야 한다는 잠정 결론에 박수를 치는 비판자들 모두에게 대학은 그저 '레떼르'에 지나지 않는다. '대학'이 '상표'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교육과 지식의 공공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현 한국 사회에서 어쩌면 우리는 '공공 지식인' 이전에 '공공 지식'이라는 개념에 대해 먼저 따져 물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는 사유화된 지식에 공공성을 부여하는 작업은 결국 깨어 있는 지식인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는 35년이라는 시간과 미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의 차이와 무관한 진리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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