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국민의힘이 '여성가족부 폐지' 의지를 내비치는 가운데 성평등 정책과 분리된 가족 정책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여성가족부 폐지'는 윤 당선인의 대표 공약이었지만 인수위원회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은 30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새 정부 성평등정책 강화 방안 토론회'를 열고 "여성가족부의 가족 정책은 다양한 가족에 대한 단순한 지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며 성평등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성평등 정책은 저출생, 노동 정책과도 긴밀한 문제"라며 여가부 권한 강화 필요성을 설파했다.
윤 당선인은 앞서 "한국에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여가부는) 부처의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고 말해 논란에 휩싸였으나 이후에도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여가부의 가족 정책 필요성에 대해서도 "타 부서에서도 가능하다"면서 여가부 폐지 의지를 내비쳤다.
실제로 여가부 예산의 61.9%는 가족정책에 사용되며 이중 대부분이 한부모가정 자녀 지원에 집중돼 있다. 한부모가정은 '정상가족 외의 다양한 형태의 가족'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은 '법적 혼인관계의 이성애자 남성과 여성, 이들이 낳은 자녀'를 기준으로 설계된 교육, 복지, 주택 정책 등으로부터 사실상 배제돼 왔다. 또 한부모가정, 특히 '비혼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한부모가정과 그 자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 같은 정치사회적 밑바탕은 출생률에도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비혼출생률은 40.7%인데 반해 한국은 2.2%에 불과하다.
최형숙 변화된 미래를 만드는 미혼모 협회 '인트리' 대표는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남아있는 가부장적 가족제도, 여성을 가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성차별적인 인식 등으로 비혼여성의 임신, 출산, 양육할 권리 보장에 앞장서는 게 여가부"라며 "비양육자 70~80%가 남성이고 이들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는 것도 여성가족부에서 주도하고 있던 정책과제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이어 "여가부의 여성정책은 일하는 엄마를 위한 양육지원정책 등 일·가정 양립 정책"이라며 "여가부는 폐지하는 게 아니라 더 강화하고 전문화해야 하는 기구"라고 했다. 그러면서 "성평등과 함께 돌봄정책, 가족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유관부서의 협력을 유도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돼야 한다"고 했다.
'여가부 폐지' 시도한 이명박 정부, 이후 다시 강화해
여가부 설치는 김대중 정부인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여성정책의 컨트롤타워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였다. 저출생 위기와 취업 여성의 일·가정 양립 정책의 필요성, 여성정책과 가족 정책 결합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여성부'라는 독립부처가 신설됐다. 점차 가족정책을 강화하며 2005년 '여성가족부'로 명칭이 변경됐다.
'여가부 폐지'를 시도한 대통령은 윤 당선인 이전에도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취임 직후부터 '작지만 유능한 정부'를 내세우며 여가부 폐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각계의 반대가 이어지자 미니부서인 '여성부'로 축소·유지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176명이었던 인력은 100명으로 축소됐다. 그러나 가족정책의 한계를 실감한 이명박 정부는 2010년 다시 '여성가족부'로 재편하며 가족정책과 청소년정책을 이관했다. 인력은 211명으로 대폭 증원됐다. 여가부 인력은 박근혜 정부 시절 235명으로 늘어난 뒤 문재인 정부인 2022년 현재 27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늘어난 업무에 비해 예산은 1조 4650억 원, 전체 정부 예산 607조 700억 원 중 0.24%에 불과해 전체 정부 부처 중 가작 적다.
그 전체 예산 중 61.9%는 아이돌보미 지원사업, 한부모가정 양육비 지원 등 가족정책에 사용된다. 18.5% 학교 밖 청소년, 청소년 상담 등에 사용되며 폭력 예방과 피해자 지원이 9.2% 배정돼 있다. '여성정책'은 일·가정 양립, 경력단절 여성 지원 등 '일하는 엄마'를 지원하는 정책에 집중돼 있으며 여가부 전체 예산의 7.2%에 불과하다. '여가부가 성인지예산으로 35조를 낭비한다'는 주장은 애초 불가능한 '가짜뉴스'다. '성인지예산'은 여가부의 예산이 아니라 전체 정부 부처와 국가 기관에서 성인지적 관점에서 주요 제도와 사업을 수립·이행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다.
'여성부는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여성 또는 성평등 담당 정부 부처 및 기구는 2020년 5월 기준 전 세계 97개 국가에서 설치·운영 중이다. 유엔 창설 50주년인 1995년 유엔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서 한국을 포함한 189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던 '베이징여성행동강령'은 '적절한 예산과 인력을 보장받는 여성 정책 전담기구를 설치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강이수 상지대 교수는 "여가부를 향한 '성폭력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 '권력형 성범죄에 대응하지 않는다', '여성만을 위한 부처'라는 등의 주장에는 성찰이 필요한 비판과 허위 정보에 기반한 비난이 혼재한다"고 분석했다.
여성만을 위한 부처? 성평등에는 남성도 있다
여가부가 시행 중인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사업에서 2018~2021년 6월 기준 총 지원자 9910명 중 남성은 2058명으로 20.8%를 차지한다. 지난해 9월까지 지원자 5685명 중 남성이 24.5%(1398명)이며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가장 큰 비난을 받는 '여성 할당제'의 경우 법적 강제성이 없는 '권고'에 불과하다. 여가부는 물론 정부 부처에서 민간에 이를 요구한 적도 없다.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도 '여성 장관 30%'라는 '목표'를 세웠으나 임기 초 27.7%(18명 중 5명)에서 지난해 1월 개각 이후 16.7%(18명 중 3명)로 감소했다.
여성 할당제는 국제사회에서 시행하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구조적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의 일환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성 할당제와 유사한 제도로는 '양성평등 채용 목표제'가 있다. 한쪽의 성별이 70%를 넘지 않게 하는 제도로 공무원 시험에서 시행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여가부에서는 앞서 보도자료를 통해 "양성평등 채용 목표제의 수혜자는 남성이 더 많다"고 해명한 바 있다. 실제로 2015~2019년 기준 국가직·지방직 공무원의 양성평등 채용 목표제 수혜 인권 1591명 중 남성이 75.7%(1204명)에 달한다. 구체적으로 9급 79명 중 남성 70명이었으며 7급 13명 중 1명, 5급 13명 중 3명이 남성이었다.
교육대학에서는 입학시험에 특정 성별의 비율을 60~80%로 정해 놓았다. 여성이 대부분인 교육대학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사실상 '남성 할당제'라 할 수 있다. 이어 사범대학 학생의 80% 가까이가 여성이며 임용시험 합격자의 비율도 이와 비슷해 양성평등 채용 목표제를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성평등이야말로 돌봄, 가족, 인구정책의 핵심
국내 비난 여론과는 달리 국제사회는 여성 할당제를 확대·강화하는 추세다. 여성 할당제는 1970년대 스웨덴에서 시작돼 현재 여러 유럽국가가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 비율을 30%로 정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2027년까지 기업의 비상임이사 중 최소 40% 또는 전체 이사회 구성원의 최소 33%를 여성으로 하는 할당제 확대 정책 입법화 추진하고 있다.
반면 여성 할당제가 없는 우리나라 민간기업의 경우엔 성비 불균형이 심각하다. 여성 할당제 확대가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우리나라 상장법인 임원 중 여성은 5.2%에 불과하다. 여성의 고위직 비율을 나타내는 유리천장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중 최하위인 29위를 10년 연속 기록하고 있다.
강 교수는 "노동시장에서의 성별 불평등은 출생률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게 여러 연구 결과로 확인되고 있다"면서 국민의힘의 '인구가족부'에 대해서는 "출산과 양육 및 가족·인구 정책은 성평등 정책과 분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구조적 성차별, 눈을 뜨고 귀를 열어야 보인다
한국의 심각한 성별 불평등은 국제사회에서도 공인된 사실이다.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2019년 기준 32.5%로 OECD 국가 중 가장 크며 OECD 평균 12.5%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강 교수는 "성별 임금 격차는 개인적 인적 자본의 차이가 아니라 직종, 고용, 승진 및 성차별적 기업문화가 결합한 구조적 성차별의 집합적 결과"라고 강조했다.
윤 당선인 측 '구조적 성차별 없다'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는 유엔 개발 계획(UNDP)의 통계다. UNDP의 성별 불평등 지수(GII)에서 한국은 189개국 중 11위로 상위권에 속한다. 반면 세계경제포럼(WEF)의 성별 격차 지수(GGI)는 지난해 156개국 중 102위로, 매년 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극단적인 차이는 지수를 계산할 때 사용하는 변수의 차이다. GII는 △모성 사망비 △청소년 출산율 △여성의원 비율 △중등교육 이상 이수 비율 △남녀 인구 비율 △남녀 경제활동 참가율로 구성돼 있다. 한국의 높은 수준의 보건의료 시스템, 진학률 등을 봤을 때 성별 불평등을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반면 GGI는 △경제참여와 기회 △교육적 성취 △건강과 생존 △정치 권한 부여 등 4가지 영역 14개 지표로 구성돼 있다. 한국은 이중 정치적 대표성을 나타내는 '정치 권한', 성별 직종과 임금, 소득, 고위직 및 전문직 비율을 나타내는 '경제참여와 기회'에서 매우 낮은 점수를 얻는다. GII에는 포함되지 않는 지표다.
"관심받으려면 여자 머리채 잡아라"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여가부 폐지 주장은 사회정치적 백래시의 흐름"으로 분석했다. 한 교수는 "'젠더 갈등'이라 불리는 '안티 페미니즘'은 대중적 영향력이 크다"며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 이유를 '젠더 갈등'으로 규정하며, 정치권이 안티 페미니즘을 전략적으로 이용했다"고 봤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 국민의힘 소속 현 오세훈 시장이 당선되면서 70%가 넘는 20대 남성의 높은 지지율이 주목받았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필두로 여야 할 것 없이 이를 '시대착오적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인 '이대남 현상'이라는 분석이 이어졌다. 국민의힘이 노골적으로 안티 페미니즘에 앞장서는 계기가 되는 한편, 더불어민주당으로서는 권력형 성폭력과 높은 부동산 가격, 청년 실업 등 정책 실패를 되짚을 시기를 놓친 셈이다.
신 교수는 이어 "이런 잘못된 분석을 바탕으로, 윤석열 당선인과 국민의힘은 대선 정국에 안티 페미니즘과 젠더 갈리치기를 주요 전략으로 이용하기에 이르렀다"면서 "BBC, <타임> 등 주요 외신에서도 이 같은 한국의 대선 정국을 비판했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의 말대로 윤 당선인이 "'젠더 갈라치기'로 그다지 재미를 못 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윤 당선인은 여성 지지율은 물론, '주요 타깃'인 20대 전체 지지율에서도 이재명 전 후보에게 뒤지며 '역대 가장 적은 표차'로 간신히 승리했다.
'이대남' 담론의 핵심 키워드인 '공정성'에 대해서도 신 교수는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한 공정성 담론은 또 다른 차별을 확대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신 교수가 제시한 <경향신문>의 지난해 10월 11일 자 보도에 따르면, 2030 세대 상위 20%의 평균 자산은 8억 7044만 원인 데 반해 하위 20%의 평균 자산은 2473만 원으로 그 격차가 35배에 달한다.
신 교수는 "청년 내부의 격차는 개인주의적 공정 담론으로는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됐다"면서 "이러한 청년 세대의 위기 상황을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분노로 치환해 정치적으로 증폭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구조적 불평등은 젠더 간, 세대 간 연대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며 "평등의 기반 위에서 함께 일하고 생활하며, 양육과 돌봄의 지원 등 통합적인 성평등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