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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빨치산' 가슴에 묻고 청암사로, 해인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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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빨치산' 가슴에 묻고 청암사로, 해인사로…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28~29화

28. 눈물 젖은 두만강

"병삼아 술 좀 사오너라. 소주 2병만 사와라."

"스님 한동안 안 드시던 술을 왜 갑자기 사오라고 해요?"

"이현상 동지도 그렇고 쓰러진 수많은 젊은이들을 생각하니, 그리고 이정 선생님은 어찌 됐는지 생각하니, 취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구나."

한산은 병삼이 사온 소주 한 병을 벌컥벌컥 다 마셔 버렸다. 한산스님이 평소 술이 셌지만 빈속에 안주도 없이 한 병을 한 번에 마셔버리니 조금 있자 취기가 확연이 나타났다.

"병삼아,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노래를 아느냐?"

"어떤 노래지요?"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아저씨들 부르는 것 들어봤어요."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 언제야 오려나."

스님은 술에 취해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병삼아, 이 노래에 나오는 내 님이 누구인지 아느냐?"

"모르는데요. 누군데요?"

"이정 선생님이다."

"아버지요?"

"그래."

"이정 선생님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나와 부인, 그러니까 네 어머니가 아니고 전 부인인 주세죽이라는 분과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도망을 갔단다. 선생님이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작사가 김용환 씨가 이 노래 가사를 만들어 신문에 발표했단다. 내 님은 선생님이고 '배가 내 님을 싣고 두만강을 건넜다'는 것은 '선생님이 무사히 두만강을 건너갔다'는 암호였단다."

빨치산 아저씨들이 자주 부르던 이 노래가 아버지 노래였다니 병삼은 신기했다.

▲ 1928년 러시아로 도주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찍은 박헌영과 주세죽 사진. 탈출 성공을 알린 시가 '눈물 젖은 두만강' 가사라고 한다. ⓒ원경스님

한 번 봇물이 터진 한산스님은 한에 맺힌 노래들을 연이어 부르기 시작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 월색만 고요해 / 폐허에 서린 회포를 / 말하여 주노라 / 아 외롭다 저 나그네 / 홀로이 잠 못 이뤄 / 구슬픈 벌레 소리만 / 말없이 눈물져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3절이란다."

"왜요?"

"3절 가사가 너무 좋단다."

"나는 가리로다. 끝없는 / 이 발길 닿는 곳 / 산을 넘고 물을 건너 / 정처가 없이도 / 아아, 망국의 이 설움을(원래 '괴로운 이 심사를'인데 한산이 바꿔 부른 것이다.) / 가슴 깊이 묻고 / 이 몸은 흘러 흘러가노니 / 옛터야 잘 있거라."

한산스님의 노래를 듣자 병삼이도 같이 우울해졌다.

한산스님은 남은 소주 한 병을 다시 들이부었다.

"이현상 동지가 보고 싶구나."

"스님 저도요."

병삼도 눈물이 나왔다.

▲ 한국인이 작사작곡한 첫 대중가요라고 평가받고 있는 '황성옛터' 노래비가 작가 사 왕평의 고향인 영천 조양공원에 세워져 있다. ⓒ손호철

이현상을 그리워하는 스님의 노래가 이어졌다. 짝사랑 2절이었다.

"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 잃어진 그 사람이 나를 울립니다 /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 없는 들국화 / 바람도 살랑살랑 맴을 돕니다.

병삼이 보기에 '잃어진 그 사람'이 이현상 아저씨를 말하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이현상 아저씨~"

이후 이들 노래들은 ‘부용산’과 함께 원경스님이 애창하는 18번이 됐다.

29. 수련과 멸치 소동

"이 아이를 당분간 부탁합니다."

"예, 스님. 저희도 가난하지만 그래도 자식같이 돌보겠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병삼은 전주 근교의 한 농가에 맡겨졌다. 이 집은 너무 가난해 밥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지리산에서 굶주림에 단련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배가 고파 '쉰 고구마 한 개가 인절미로 보일 지경'이었다. 겨울이 다가와 땔감을 마련하러 산에 갔다가 낫질을 잘못해 손가락 힘줄이 끊어지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래도 절과 산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에 어울려 사니 오순도순 살가운 나날이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어느 날 한산이 다시 나타나 병삼을 김천 청암사로 데리고 갔다. 청암사는 해인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해인사가 가야산에 자리 잡고 있다면, 청암사는 그 서북쪽에 있는 해발 1317미터의 불령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고, 해인사로부터 직선거리는 채 10킬로미터도 되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청암사를 가려면 물길과 산길을 돌고 돌아 근 50킬로미터를 들어가야 한다. 이곳은 이처럼 오지에 자리 잡고 있는 유명한 선방으로, 병삼은 여기에서 강고봉 스님에게 불경도 배우고 선도 배우고 근 4년간 제대로 공부를 했다.

▲ 한국전쟁 후 원경이 4년간 수양한 김천 청암사 ⓒ손호철

뛰어난 선승으로 곡차를 마셨다하면 말술이었던 고봉스님은 하루는 만취해 들어와 시자를 불렀다.

"이봐라, 대야에 물을 떠와 내 발 좀 씻어다오."

물을 뜨러 대야를 들고 우물로 가는데 한 스님이 불렀다.

"고봉이 네게 발 닦으라고 했지?"

"예."

"가서 내 말대로 해보아라."

스님의 말대로, 시자는 대야에 물을 떠가서 발을 씻기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왜 내 발을 씻기지 않느냐?"

"큰 스님,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닌데 발은 씻어 무엇 합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봉이 자신의 엄지발가락을 시자의 입에 쳐 넣었다.

"스님 왜 그러세요?"

"이 놈아! 네가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원경은 강고봉 스님으로부터 호방한 선풍을 배웠다.

▲ 멸치 소동으로 원경이 쫓겨났던 해인사 ⓒ손호철

"원경이 당장 잡아 오너라!"

해인사 박근봉 큰스님은 노발대발하여 고함을 치셨다.

제자 스님들은 원경을 잡아 큰 스님이 기다리고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원경이, 이놈!"

영문도 모르고 잡혀온 원경이 쳐다보니, 큰스님이 자기가 끓이던 탕국 솥 앞에서 하얀 봉지를 들고 계셨다.

"아뿔사, 들켰구나."

원경은 무조건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싹싹 빌었다.

"큰스님, 어리석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네가 네 죄를 아느냐?"

"예. 잘 압니다."

"뭘 잘못했느냐?"

"제가 탕국에 멸치를 넣었습니다."

"그래 스님들이 먹는 공양에 멸치를 넣어? 네가 제정신이냐?"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큰스님은 화가 풀리지 않은 얼굴로 나가버리셨다.

1957년 원경은 청암사를 떠나 해인사에 머물고 있었다(한 기자는 원경 입적 후 이 사건이 1960년 용화사에서 일어난 것으로 회상했으나 유병윤 화백은 1957년 해인사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들었다고 했다). '졸병'인 원경에게 주어진 일은 공양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일종의 '취사병'이 된 것이다. 원경은 동안거(겨울 석 달 간 한 곳에 머물며 수행하는 것)로 수행을 위해 용맹전진을 하고 있는 스님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이 없나 고민을 하다가 무릎을 쳤다. 그는 시장에 내려가 멸치를 한 포 사 왔다. 이를 한 주먹씩 한지에 싸서 국에다 넣었다.

해인사에는 국 담당이 두 명 있었다. 그날 이후 스님들은 원경이 끓인 국만 먹었고 다른 국 당번이 만든 국은 남아돌았다.

"이 놈이 무슨 수를 벌인 거야?"

화가 난 경쟁자는 원경을 철저하게 감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원경이 멸치봉지를 3~4분 넣었다가 건져서 아궁이 불속에 넣어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꼬리가 길면 들킨다고 어느 날 멸치봉지를 넣어 놓고 배가 아파 화장실을 갔다 온 사이에 멸치봉지를 들키고 만 것이다. 그는 당장 큰스님을 모시고 와 원경의 비행을 고자질했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 절에서 쫓아내야지요."

"맞습니다."

결국 원경은 해인사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아니 스님들이 멸치 든 것을 몰라? 자기들도 맛있게 잘 먹어 놓고는, 젠장 왜 날 쫓아내! 다시는 이 동네는 안 온다!"

해인사에서 쫓겨나 가야산의 꽁꽁 건 눈길을 걸어내려 오며 원경은 투덜거렸다.(원경스님은 이후 해인사를 한 번도 안 갔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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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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