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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 박사 마이크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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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 박사 마이크 잡다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7 스코필드 박사

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중 10편을 골라 주 2회(수, 토요일)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https://blog.naver.com/tongwoohn/222631939375)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 25편)을 볼 수 있다.

1. 김구 선생 마이크 잡다

2. 죽산 선생 마이크 잡다

3. 마륵사(마륵사) 선생 마이크 잡다

4. 일곡(유인호) 선생 마이크 잡다

5. 김재준 목사 마이크 잡다

6. 강원용 목사 마이크 잡다

7. 스코필드 박사 마이크 잡다

8. 서인주 도사 마이크 잡다

9. 이지 스톤 마이크 잡다

10. 땅 속 운동권 마이크 잡다

▲스코필드 박사 

안녕하십니까.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8~1970)입니다. 1970년 내가 사랑하는 한국 땅에서 이번 생을 마감하고 벌써 51년이 지났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우리 한국 속담으로 보자면 강산이 다섯 번 바뀔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랑하는 한국인 여러분! 한국은 더 살기 좋은 더 정의롭고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었습니까?

2020년대를 바쁘게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스코필드라는 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나는 3·1운동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했고, 해방 후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영국 출신 캐나다 사람입니다. 어떤 분은 ‘어디서 외국 사람이 감히 민족지도자들과 나란히 마이크를 잡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만세 현장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해서 세계에 알린 일을 크게 인정해주시니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어린 시절 클리프 칼리지의 신학교수였던 아버지는 나에게 인생을 걸어가는 두 개의 길, ‘염려’의 길과 ‘기도’의 길이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염려’의 길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각오하며 언제나 걱정을 동반자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기도’의 길은 사랑의 힘으로 하나님을 인도자로 삼아, 그분의 진리를 믿으며, 평화를 동반자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나는 ‘기도’의 길을 선택했고, 내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강사로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조선은 아시아 동쪽 끝에 있는 신비로운 나라였습니다. 나는 미지의 나라 조선에서 기대와 설렘을 안고, 당시 식민지 조선의 민족지도자 분들과 깊은 친분을 쌓아갔습니다. 조선 YMCA 전국연합회 회장이자 독립협회를 만든 월남 이상재 선생님, 3·1운동 민족지도자 이갑성 선생님, 정화여학교 설립자이자 내 양어머니이신 김정혜 여사님, 모두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한 훌륭한 분들이었습니다.

▲세브란스 의전에서(1916)

어느 날 세브란스에서 같이 근무하던 이갑성 선생님이 나를 찾아와서 조선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수락한 나는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앞에 모인 수많은 조선 사람들과 대한독립 만세의 물결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3·1운동은 독립을 향한 조선 사람들의 열의와 기개를 보여준 평화적인 비폭력 독립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3·1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을 검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근무하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설이 <3·1신문>이라는 지하신문을 만들어 배포하다가 경찰의 검거를 피하여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주위에서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나는 일본의 비인도적인 행위에 맞서고 이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일본인이 발행하는 영자신문 <서울 프레스>에 기고한 글에서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3.1운동을 무력으로 유혈 진압한 일본의 대응을 비판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 잡혀있던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이애주와 같은 여성 지도자와 여학생들을 만나 고문과 폭력의 흔적을 확인하고, 이를 하세가와 총독과 야마가타 정무총감을 찾아가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나는 거리에 나가 경찰에 잡혀가는 학생을 보면 내 집에서 일하는 학생이라고 말하여 구하기도 하고, 파출소에 잡혀 있던 여학생을 내 집 식모아이라고 말하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었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1919년 9월 일본 동경에서 ‘극동지구 파견 기독교 선교사 전체회의’가 열렸습니다. 한국, 중국, 필리핀, 일본 등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 800여 명이 모인 그 자리에서, 나는 3·1운동과 수원 제암리・수촌리 학살의 진상을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또한 하라 총리대신 등 일본 정치인을 만나 일본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시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조선을 떠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20년 나는 ‘가장 과격한 선동가’로 낙인 찍혀 식민지 조선을 떠나 캐나다로 돌아가게 됩니다. 1926년 여름방학에 잠시 조선에 돌아왔지만, 이후 32년간 사랑하는 조선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1958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마침내 독립한 한국을 찾았습니다. 이미 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나고 일흔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나는 아직도 한국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초빙교수로 근무하게 되었고, 한국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과 어린이들을 힘이 닿는 대로 도와주었습니다. 나는 수입에서 일부 생활비를 떼어놓고 나머지를 모두 장학금과 보육원 활동비용으로 썼습니다.

나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2021년 이제 사랑하는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발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안타까운 점도 있습니다.

▲독립된 한국을 방문한 박사의 환영회(1958)

3·1운동 기념관 건립

3·1운동은 조선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열의와 기개를 세계에 알린 평화적인 비폭력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조선의 3·1운동은 중국의 5·4 운동과 인도 간디의 무저항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 조선의 독립 의지를 인정받게 되는 하나의 근거가 됩니다.

나는 생전에 이렇게 의미 있는 3·1운동 기념관을 서울 탑골공원 근처에 만들고 싶었습니다. 물론 탑골공원에는 3·1운동을 기념한 비석과 부각조형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상징적인 독립운동이,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3·1운동의 현장 서울 종로구에, 아직까지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은 매우 아쉽습니다.

친일과 항일

독립운동가 자손들 사이에서 다툼이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독립운동은 사실이나 때로 분명치 않았다였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역사 앞에서 겸허해야 합니다.

나는 일제의 3·1운동 탄압을 비난하던 나를 해치려고 일제가 보낸 조선인 자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기미년 초겨울 어느 날 밤 성경을 읽고 잠에 들려는데 지붕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방구석에 숨어 창문을 보니, 어떤 검은 괴한이 창문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순간 그 괴한이 도둑이 아니면 자객일 것이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습니다. 이 돌발적인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괴한이 창문을 넘어 발 디딜 곳을 찾고 있기에 내 어깨를 발판으로 내주고 괴한을 방안으로 내려주며 말했습니다.

“이 어둡고 추운 밤에 나를 찾는 손님이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험한 길로 오시니 도와드리겠습니다.” 괴한은 나의 태도에 당황하면서도 자세를 바로 하고 예리한 일본 단도를 내 목에 겨누며 말했습니다. “네가 스코필드냐?” 힘차지만 떨리는 괴한 목소리에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보아하니 조선 사람이군요. 나는 조선 사람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드릴 것이요, 일이 필요하다면 일을 드리겠습니다. 꼭 내 목숨이 필요하다면 이유에 따라 내 목숨도 드릴 수 있으니 오신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한동안 동요하던 괴한은 어느새 소지했던 일본 단도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흐느껴 울면서 나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나는 그를 용서하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호전되길 바랍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이 과거의 죄과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야 합니다. 과거 일본은 조선과 조선 사람들에게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과 일본은 과거의 비극에 갇혀 있지 말고 아시아와 세계 그리고 인류와 함께 자유롭게 살아가는 풍요로운 미래를 꿈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라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프랭크 윌링엄 스코필드

​박애주의

우리는 애초에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누구나 풍요롭고 인간다운 삶을 갈망합니다. 우리가 한국인이든, 캐나다인이든, 영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이 세상에 잠깐 살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우리가 가치를 선택하고 품격 있는 삶을 실현할 유일한 기회는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이기적인 목적이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의 날에 우리가 지상에 사는 동안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쌓아왔는지 아니면 쓰레기 더미를 쌓아왔는지 드러날 것입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한국과 한국인 여러분 안에 그분의 삶이 형성되어 가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검소하라

내가 사랑하는 한국은 나에게 많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볼 수 있는 즐거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하려는 학생들을 도울 수 있다는 기쁨, 부모가 없지만 바르고 착하게 성장해가는 고아들을 도울 수 있다는 기쁨, 독립한 한국의 젊은이들은 나에게 남은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한국과 한국인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젊은 여러분들이 경계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나는 강의나 직업에 임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사소한 부분에서 드러납니다. 특별한 사유 없이 강의에 늦거나 결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각에 변명하지 마세요. 또한 배움을 본분으로 하는 학생의 생활이 검소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멋을 내고 다니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지금 대학생들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1958년 한국에 다시 왔을 때 어떤 학생들이 구두닦이 소년에게 구두를 내밀어 닦는 모습을 보고 몹시 놀랍고 불쾌했습니다. 학생은 학생답게 검소하게 생활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정직하라

나는 정직이 가장 경제적인 생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덮으려고 다른 거짓말을, 그 거짓말을 덮으려고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욥기 8장 6절을 보면 하나님은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인 여러분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인류를 위해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직해야 정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또한 모든 일은 진지하게 마주해야 합니다. 진지하게 대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처음 조선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한국어를 전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처음 세균학을 강의할 때 통역을 두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한국 학생들에게 다가가고 싶었고, 그들과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1년 만에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했고, 2년째부터는 나름 서툴지 않게 한국어로 강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석호필石虎弼이란 한국 이름도 만들었습니다. ‘석石’은 돌과 같은 의지를 가지고, ‘호虎’는 강자에게는 호랑이처럼 무서운 사람이지만, ‘필弼’은 약자를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내 이름에 내 정직한 진심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코필드 박사와 한국어 선생이자 통역사인 목원홍

건설적 비판

나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부정, 부패, 비민주성 그리고 당파의 파쟁성派爭性을 사랑하진 않습니다. 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로 존경하지만,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고 정부를 비판하면 처벌하는 2·4보안법 파동을 묵인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온화한 장면 전 국무총리를 존중하지만 혼란한 시대에 나라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것은 잘못입니다. 나는 굳은 경제발전 의지를 갖고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중하지만,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돌보지 못한 것은 잘못입니다.

이러한 비판 때문에 나는 때때로 한국 정부와 정치권에서 경원시 되었습니다. 그들의 불편한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닙니다만 나는 한국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길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사랑하는 한국인 여러분! 앞으로도 한국을 더 풍요롭고 더 정의롭고 더 자랑스러운 나라로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한국 국민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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