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갓 넘겼을 무렵, 나는 혼자 살았다. 다섯 평이 될까말까한 좁은 원룸이었다. 창이 하나 있었지만 그 창문을 열면 맞은편 건물의 벽이 손으로 만져질 정도로 가까웠고 때문에 햇빛이 들지 않아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가거나 때로는 아예 들어가지 않아도 아무도 구박하거나 걱정하는 이가 없었다. 늦은 밤 혼자 책을 읽으면 빠져들듯 집중할 수 있었다. 새벽이 밝아올 때쯤 산책을 나서면 저녁때까지 취객으로 시끌시끌하던 골목은 조용했다.
그러나 저 생활이 온전한 즐거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남자였기 때문이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작은 먹자골목에서 모퉁이만 꺾으면 나오는 원룸 건물에 홀로 술취해 귀가하는 길에도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됐다. 택배를 받을 일이 있으면 문 앞에 두고 가달라고 택배 기사 아저씨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부탁을 드렸고, 복도에서 이웃과 마주치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했다. 밤중이나 새벽에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와 주차된 차를 빼 달라고 할 때에는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즉, 나는 모르는 사람이 내 뒤를 밟아 집에 침입하고 나를 공격할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됐다. 이웃이나 택배 아저씨가 택배 송장에 적힌 내 이름을, 또 내가 혼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집앞 편의점에 가다가 이웃과 마주쳤을 때는 내 비루한 패션이나 감지 않은 머리가 신경쓰였을 뿐 내 안전을 염려해 이웃을 경계하지는 않았다. 차를 빼 달라는 것이 나에게 그 시간에 전화한 '진짜 목적'이 아닐 거라는 의심은 해본 적도 없었다.
198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집값 싼 동네에서 혼자 살았던 백인(하지만 정확히는 아일랜드계와 러시아계 유대인 혼혈) 여성 리베카 솔닛의 독신 생활은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솔닛은 당시 자신이 가장 즐기는 스포츠는 '강간 피하기'라고 친구들에게 "농담조"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게 농담이라는 거야말로 농담 같았다.
솔닛은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은 의심할 나위 없이 세상에서 가장 시적인 주제'라고 말했던 에드거 앨런 포는 죽기보다 살기를 바라는 여성의 관점에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며 "(젊은 여성이었던) 그 시절에 나는 다른 이의 '시적 소재'가 되지 않기 위해 애썼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솔닛이 즐긴 '스포츠'는 그의 과대망상이 아니라, 그가 마주한 현존하는 위협의 결과물이었다. 솔닛을 유명하게 만든 에세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Men Explain Things To Me)'가 탄생한 그의 책상은 한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것이었다. 그 "친구는 헤어진 남자친구가 자신을 떠난 벌이라며 휘두른 칼에 열다섯 군데를 찔렸다. 친구는 과다출혈로 거의 죽다 살았다". 끔찍한가? 아직이다. "친구는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당시 여느 피해자들처럼 그 일로 비난받았다."
솔닛의 집에서 한두 블록 떨어진 집 앞에서는 과거 어떤 22세 여성의 시신이 "검은색 브래지어를 제외한 알몸"으로 발견됐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당시 신문들의 논조는 그가 섹스하고 술 마시는 젊은 보헤미안 여성이었으니 그 일에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투였다. (중략) 기사에는 '살인으로 막내린 플레이걸 피해자의 비천한 삶'이란 표현이 있었는데, 이때 비천하다는 말은 여자가 섹스와 모험과 슬픔을 아는 사람이었다는 뜻인 듯하고 플레이걸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죽어도 싸다는 말인 듯하다. (…) 여자는 뮤지션이었던 남자친구가 파티에서 실족사한 뒤 위로를 구하려고 그(지인의) 집을 찾아갔다고 했다. (…) 신문들은 살인이 우발적이었으며 여자가 비록 (남자친구의 사망이라는) 상실의 충격에 빠진 상태였음에도 골목길에서 자신과 섹스하기로 동의했다는 한 (피해자와 당일 처음 만난) 선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듯했다." (책 61쪽)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었던 경우는 보통 길을 묻거나, 시간을 묻거나, 담뱃불을 빌리거나, 도를 아시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모르는 사람과의 성적 접촉에 대한 관심을 강요받고, 내가 당연히 거부하면 그에 대한 처벌로 나를 죽이기 위해서였던 적은 없었다. 솔닛에게는, 그의 친구에게는, 죽은 여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솔닛은 자신의 회고록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창비)에서, 여성으로서 살아남아 자신의 목소리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이 도망치고 싸우고 상처입어온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놓는다. 솔닛은 자신의 삶은 "나만의 목소리를 만들고 그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줄 방법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여성이 침묵하기를 바라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선호하는 사회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목소리를 갖기 위해서 나는 내가 젊은이로 살았던 그 추하고 낡은 세상에서 싸워야 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 회고록을 "내 뒤에 오는 젊은 여성들이 (내가 겪은) 그 오래된 장애물 중 일부나마 겪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한 동기에서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치료법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고, "(개인이 스스로의) 생각이나 생활을 조정하는 것만으로 이 문제를 용납할 만한 수준으로 바꾸거나 아예 근절할 수 있는 도리는 없었"기 때문에 그의 소박한 회고록은 '회고록다움'을 잃고 사회 비판 서적이 돼버렸다고 그는 변명한다. 역시나 그의 삶도 글도 '개인적이면서 정치적'이다.
이건 '언제나 구조가 문제'라는 사회학·인문학 전공자들의 틀에 박힌 소리는 아니다. 책에는 이런 젠더 기반 폭력 문제를 개인화해서 해결하라는 취지의 충고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는지를 비의도적으로 지적한 대목이 나온다.
"성희롱이 내게도 직접적인 골칫거리였던 시절에,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더 부유한 동네로 이사하라고, 차를 사라고, 돈이 없었건만 아무튼 돈을 써서 택시를 타라고,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라고, 옷을 남자처럼 입거나 남자와 늘 붙어다니라고, 혼자서는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총을 구하라고, 무술을 배우라고, 현실에 적응하라고." (책 74쪽)
성희롱을 피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이 총기로 무장하기, 무술 배우기라는 것은 마치 어처구니없는 농담처럼 들리기도 한다. 솔닛이 실제로 "모하비 사막에서 살던 남자친구에게 22구경 라이플을 쏘는 법을 배웠"고, "쇼토칸 가라테 세계챔피언 선수인 여성과 함께 잠시 가라테를 수련했"다고 밝히기 전까지는.
당연히 모든 사람이 총으로 무장할 수도, 무도가가 될 수도 없고 그래봐야 소용도 없기에 "적절한 대응책은 문화와 상황을 바꾸는 것뿐"이다. 성희롱, 성폭력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문화였다. 특정 사람들의 행동을 용인하고, 못본 척하고, 성애화해 해석하고, 묵살하고, 경시하는 사회 구조였다"고 그는 지적했다.
아울러 "폭력의 사례 하나하나가 수수께끼같고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여기"기만 하는 사람들의 말과 언론의 보도 행태는 "그 모두가 이 사회와 오래된 불평등의 구조에 깊이 엮인 한 가지 패턴의 일부라는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맨스플레인은 단순히 '수다쟁이 남자'의 문제가 아니다
일반적 오해와 달리 '맨스플레인'은 솔닛 자신이 만든 말은 아니다. 이 신조어는 솔닛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제하 칼럼을 언론에 기고하고 인터넷에 올려 큰 반향을 얻었을 당시에, 한 익명의 독자가 인터넷으로 남긴 일종의 댓글이었다고 한다.
이 말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맨스플레인이 성차별적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긴 하지만 여성들에게 (가벼운) 불쾌감, '말 많은 남성'에 대한 경멸감을 남길 뿐 심각하거나 위협적인 차별·불평등 행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솔닛은 '맨스플레인' 현상은 구조적 성차별이라는 같은 스펙트럼 선상에 놓여 있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우리 눈앞에 놓인 사건이나 현상이 '보라색이냐 아니냐'이지 '얼마나 짙은 보라색이냐'가 아니다.
맨스플레인 현상에서 남성은 지적인 발화자로, 여성은 '듣는 자'로 규정된다. 이는 여성에게서 목소리를 뺏는 즉시적 효과를 가진다. 여성의 말이 들리지 않고, 설사 들릴 경우라도 '여성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며 기각되는 것은 성차별의 현상 그 자체이자, 과거의 성차별로 인한 결과이고, 앞으로 나타날 성차별과 폭력의 원인이 된다.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피해자의 증언이 끊임없이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쉽다.
"어떤 사람이 그의 전문 분야에서 무능하다고 치부하는 사고방식은 그에게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고 드는지 아닌지를 가리는 능력조차 없다고 치부하는 사고방식과 같은 것일 수 있고,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많은 가정폭력 및 스토킹 피해자들이 죽었다. (…'남자들은 나를 자꾸 가르치려 한다'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혹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바보로부터 내 전문 주제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 모멸적 경험이 어떤 스펙트럼상에 놓인 사건이라는 것, 그리고 그 스펙트럼의 반대편 끝에는 폭력적 죽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말한 글이다." (책 273~274쪽)
이를 비판하기 위해 나온 "가부장제는 종종 자신이 합리성과 이성을 독점한다고 주장하지만, 가부장제에 빠진 사람들은 여자의 말이라면 아무리 입증 가능하고 일관되고 일상적인 이야기도 믿지 않으면서 남자의 말이라면 아무리 터무니없는 소리라도 받아들이고, 성폭력은 드물지만 무고는 흔한 것처럼 말한다"는 솔닛의 신랄한 비꼼은 최근 한 아시아 국가의 대선 공약으로 등장한 "성범죄 처벌 강화, 무고죄 처벌 강화"라는 어이없는 구호를 상기시킨다.
"페미니즘 슬로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의 원래 의미는 '이 구조는 개개인의 개별적 삶보다 훨씬 큰 것이며, 여기에 대해 '개인적 해법'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통찰이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는 같은 나라 지도자의 말에 대한 가장 적절한 반박인 것과 같다.
솔닛에 따르면 "젠더(기반)폭력은 (여성의 목소리에서의) 가청성(audibility), 신뢰성, 영향성의 결여로 인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맨스플레인이 상징하는 어떤 사회구조는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훨씬 더 자주, 더 잘 보호"하며, "입을 연 피해자를 처벌하고 모욕하고 겁박"한다. "그 결과 범죄는 눈에 보이지 않게 되고, 피해자는 세상이 그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고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그 '어떤 사회구조', 즉 "가청성, 신뢰성, 영향력이 불평등한 상황"이 바로 "구조적 성차별"이다.
때문에 성폭력은 이미 그 자체로도 "전쟁에 나가 총에 맞고 폭탄에 날아가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네 배 더 괴로운 일"이지만 그보다도 더욱 심각한 피해가 된다. 해병대 출신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관한 책을 쓴 작가 데이비드 모리스는 솔닛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과학적 사실은 명백하다.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에 따르면, 강간피해자가 진단가능한 PTSD를 겪을 확률은 전투 피해자의 약 네 배"라고 지적하면서 "게다가 현재 우리 문화에는 피해 여성이 자신의 생존을 용감하고 훌륭한 일로 느끼도록 만드는 분위기가 없기 때문에, 그런 피해가 영구화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부연했다. 피해자 개인이 맞서야 할 것이 '가해자 개인'이 아니라 전체 사회 구조일 때 피해자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솔닛은 "폭력의 핵심은 피해자에게 그가 완벽하게 자유로운 날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며 "일단 그것을 경험한 여자는 폭력의 주된 표적이라는 처지에서 벗어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이 취약하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탄식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 여자의 죽음은 다른 모든 여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고 그는 말한다.
출판사의 소개사처럼, 솔닛의 회고록은 "내 뒤에 오는 젊은 여성들"에게 '나는 이렇게 싸워 왔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편지이다. 남성 독자라면 자신이 누리는 것이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자각, 그것을 갖지 못한 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필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다. 저자의 독서 경험을 묘사한 책의 다음 대목은 그 지침서가 될 것이고, '안티 페미니즘' 선동을 일삼는 한 정치인은 그에 대한 아주 훌륭한 반례일 것이다. 그 정치인이 '전적으로 남성이 주인공인 이야기'(예컨대 삼국지)를 자주, 즐겨 인용하는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읽었다. 걸신들린 듯이 읽었다. (…) 대부분의 여자가 하는 경험, <모비딕>에서 <반지의 제왕>까지 여자가 거의 안 나오는 세계들 속에 있는 경험도 했다. 타인이 되어보라는 요구를 그렇게 자주 받으면 자아 감각이 훼손될 수 있다. (…그러나) 가끔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 돼보아야 한다. 타인이 돼보는 시간이 너무 적은 사람에게도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상력이 발달하지 못하는데, 자아를 바꿔보고 자아에서 벗어나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이입'은 상상력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법이다. 상상할 줄 모르게 된다는 것은 힘을 가진 사람이 겪기 쉬운 병 중 하나다. 대부분의 남자는 거의 전적으로 남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만을 접하는 유년기 초부터 그런 증상을 발전시킨다." (책 134~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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