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빙 선거전, 초박빙 개표전을 거쳐 최종적으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20대 대선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새 대통령에 당선됐다. 검찰총장 출신 대선후보, 정치 입문 1년 만의 대선 승리라는 두 가지 진기록을 세우게 됐다.
'검사 윤석열' 스토리, 반문의 구심점으로
윤 후보의 이력 중 가장 주요한 경력이자 현재의 그를 있게 한 핵심 경험은 '검사 윤석열'로서의 영욕이다. 그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년이다. 당시 여주지청장으로 이명박 정부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의혹 사건 수사팀장이었던 그는 수사 지휘를 맡은 조영곤 당시 중앙지검장과 대립한 끝에 수사에서 배제됐고 정직 3개월 징계를 받은 끝에 대구고검 검사로 발령났다. 사실상의 좌천이었다.
그러던 그는 2017년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에서 수사팀장을 맡아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후 문재인 정부는 차장검사급이던 그를 검사장으로 승진시키는 동시에 원래 고검장급이던 서울중앙지검장을 검사장급으로 개편하면서까지 그에게 지검장을 맡겼고, 2년 뒤에는 고검장급 직위를 거치지 않고 검사장급이던 그를 바로 검찰총장으로 지명했다. 파격 승진의 연속, 승승장구였다.
그러나 2019년 '조국 사태'로 문재인 정부와 그는 결별하게 된다. 여당 대표를 지낸 추미애 법무장관은 2020년 1월 부임하자마자 검찰 간부 인사로 그를 고립시켰고, 이어 3차례 수사지휘권 행사에 이어 결국 직무배제 및 징계 청구까지 단행했다. 행보 하나하나가 사실상 노골적으로 '나가라'는 압박이었지만, 윤 후보는 버텼다. 검사장 인사에서 측근들이 다 좌천돼도, 헌정사상 2·3·4번째인 수사지휘권 행사에도(1번째 행사 때 당시 검찰총장은 사임함) 사표를 내지 않았고, 징계 청구에는 행정소송까지 내며 맞섰다.
그러던 윤 후보는 2021년초 여당이 검찰개혁 방안의 일환으로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들고 나오자, 이를 명분으로 3월 4일 사표를 냈다. 앞서 공수처 설치, 검경수사권 조정 등의 검찰개혁안에는 검찰조직·법조전문가 집단의 의견과 여론을 지렛대로 저항해 냈지만, 명분상으로나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더 낮은 '검수완박'이 사표의 사유가 됐다.
윤 후보는 사표를 낸 지 3개월여 후인 2021년 6월 29일 서울 윤봉길기념관에서 '정치 참여 선언'을 통해 사실상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그의 대선 도전 일성은 "부패하고 무능한 세력의 집권 연장과 국민 약탈을 막아야 한다", "여기에 동의하는 모든 국민과 세력은 힘을 합쳐 반드시 정권교체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치 신인' 굴욕에도 뚝심으로 당내 평정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에서 보수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그의 행보는 이후 잦은 도전에 직면했다. 다만 큰 틀에서는 대선이라는 목표를 향해 멈춤 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때로는 특유의 친화력이, 때로는 고집·뚝심이 동력이 됐다.
정치 참여 선언 직후부터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의 갈등이 반 년 넘게 단속적으로 이어졌다. 조기 입당설, 제3지대론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가 7월 3일 이 대표가 부재 중인 상황에서 당사를 방문해 전격 입당을 하면서 '당 대표 패싱' 논란을 빚은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9월 중순 1차 컷오프를 시작으로 당 대선후보 경선이 본격화되면서부터는 당내 1위 주자인 그를 향해 경쟁 주자들의 견제와 비판이 쏟아졌다. '120시간 노동', '후쿠시마 폭발 없었다', '부정식품 허용' 등 언론 인터뷰에서 잦은 설화를 빚어 경선 경쟁자들로부터 '정치 신인이라 불안하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결국 11월 5일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선출됐지만, 홍준표·유승민 등 경쟁자들로부터 흔쾌한 승복은 나오지 않았고 이는 해를 넘겨 2022년초까지 계속됐다. 홍준표 의원이 선대본 상임고문으로 윤 후보를 돕기로 한 것은 올해 1월 중순, 유승민 전 의원이 첫 지지유세에 나선 것은 2월 17일이었다.
경선 승리 후 선대위 구성을 놓고는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과의 '전권' 논란이 이어졌다. 김 전 위원장을 선거캠프로 초빙하는 데 한 달이 걸렸지만, 막상 그가 지휘봉을 쥔 기간도 한 달여에 불과했다. 윤 후보는 작년 12월 3일 '울산 회동' 직후 김 전 위원장 합류를 발표했으나, 올해 1월 5일 그에게 결별 선언을 했다.
이 과정에서도 이 대표와의 갈등은 '윤핵관(윤 후보 측 핵심 관계자)' 논란으로 이어졌고, 당 대표가 대선 기간 중 두 번씩 잠행을 하며 당무를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있었다. 결국 이 대표와의 갈등이 최종적으로 봉합된 것은 1월 6일 저녁 의원총회에서였으나, 이후에도 윤 후보와 이 대표 간에는 묘한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 특히 국민의당과의 단일화 문제에서 이 대표는 당내 최강경파에 속해 있었다.
엎치락뒤치락 선거, 안철수와 단일화는 미풍
당 내부의 간난다사를 넘기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의 본선 경쟁 국면이 펼쳐졌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당내 갈등이 폭발했던 1월초 윤 후보는 이 후보에게 이번 대선 국면 들어 최대 지지율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1.7. 한국갤럽 자체조사, 이재명 36% - 윤석열 26%, 1.4~6 사흘간 전국 유권자 1002명 대상)
윤 후보 부인 김건희 씨의 이른바 '7시간 녹취록' 논란이 오히려 보수진영 결집을 불러오고, 2월초 이재명 후보 부인 김혜경 씨의 '법인카드 갑질' 논란이 불거지면서 2월 중순 다시 큰 폭으로 앞서 나갔으나, 'TV 토론 거부' 논란, 야권 단일화 불발설이 보도되면서 지지율은 다시 조정세를 보였다.
선거 막판에 윤 후보가 다시 승기를 잡은 것은 대선을 불과 엿새 남기고 극적으로 성사된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 타결이었다. 안 후보는 당시 10% 안팎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다. 정권교체 깃발이 정리되는 대선 구도 정비 의미는 분명했으나 개표 결과 안 후보의 지지율이 윤 후보에게 온전히 이전되지는 않았다. 압도적 승리를 기대했던 단일화 효과는 미풍에 그쳤다는 평이다.
물론 윤 후보가 본격 유세전에 돌입하면서 정치 신인답지 않은 적극적 쇼맨십을 보인 것도 승리의 한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연설문을 읽기만 하던, 프롬프터가 꺼지자 2분간 침묵했던 정치 신인의 모습 대신, 20~30분간 대중을 상대로 열변을 토하며 호응을 끌어내는 등 변신에 성공했다는 평이다. 특히 공식 선거운동 첫날 부산 유세에서 처음 나온 '어퍼컷 세레모니'는 윤 후보의 자신감을 드러낸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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