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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퀴어할지라도…예술계는 '퀴어하지 못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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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예술이 퀴어할지라도…예술계는 '퀴어하지 못해 미안해'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2] ⑤ 페미니스트 예술가 정은영 미술 작가

지난여름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라는 이름으로 10편의 릴레이 인터뷰를 했다.(☞모아보기)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이 진행되고 있을 시점이었다. "누구도 차별당하면 안 된다." 이 당연한 명제를 실현하는 법안에 시민 대부분도 공감과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에 관한 이야기는 '성소수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연재는 15년째 반복되는 이 물음에서 더 나아가고자 한 시도였다. "성소수자는 어떤 차별을 당해요?"라는 질문을 넘어, 우리가 '사회문제'라고 부르는 것들을 '차별'로 설명하고자 했다. 디지털 성범죄, 죽음과 장례, 직장 내 괴롭힘, 높은 부동산 가격과 주거권. 우리가 겪는 일들, 혹은 너무나 평범해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일들. 그러나 각각 별개로 보이는 영역의 활동가, 당사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차별금지법이 생기면 차별구조에 관해 사회가 고민할 것이고, 이 문제 해결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지난해 6월, 차별금지법이 국회 법사위로 넘어갔다. 그리고 2022년 오늘날까지, 우리는 '차별금지법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국회는 여전히 "성소수자를 차별금지 사유에 넣을 것이냐"에 묶여있다. 이걸 '사회적 합의'라고 했다. 선거를 앞둔 지금은 '민감한 이슈'라고 한다.

<프레시안>이 다시 차별의 평범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번엔 누군가의 삶, 우리 모두의 삶을 이야기한다. 매 순간의 긴장, 중요한 순간에 주어지는 선택권의 제약. "누가 어떤 차별을 당하는가" 이상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2>

① "미투 이후의 삶,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 안희정 성폭력 사건 피해자 김지은 씨(☞바로가기)

② "차별금지법, 노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세상" : 강원도 왕진의사 양창모 호호방문진료센터장(☞바로가기)

③ '공정'은 '당장' 원하면서 '차별금지'는 왜 항상 '다음에'인가 :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바로가기)

④ 한국국적의 이 레즈비언 부부가 사는 법 :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저자 김규진 씨(☞바로가기)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배제되는 퀴어의 존재. 이런 모습은 자유롭고 개방적이라 알려진 예술계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근래 예술계에 '퀴어성'이 자주 회자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성 패권적인 '주류 예술계'에서 그 '퀴어함'은 편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페미니스트-퀴어 미학'을 탐구하는 미술작가 정은영. 비주류적이고 비규범적인 것에 천착하는 그는 2018년 올해의 작가상을 받고, 2019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참여하며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페미니스트 정치를 근간으로 오랫동안 여성, 퀴어,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작업으로 발언해 온 정은영 작가. 여성들로만 이루어졌기에 주목받았고, 또한 그 때문에 쉬이 사라진 비운의 장르 '여성국극'은 그가 오래간 작업으로 다루어온 소재이자 주제다. 그는 '전통'이라는 경직된 패권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여성국극'의 케이스를 인류학적으로 분석한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며 미술 작품의 미학적 측면이 동시에 정치적일 수 있다는 신념을 증명하고 있다.

"'여성국극'을 아시나요?"

프레시안 : '여성국극'이 다소 생소한 장르인 것 같습니다.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정은영 : "누구나 한 번이라도 봤다면 관심을 가졌을 거예요. (웃음) 청소년 시기에 일본의 공영방송 (엔에이치케이)를 통해 '다카라즈카(DAKARAZUKA Revue)'를 종종 봤어요. '다카라즈카'는 일본 관서 지역 고베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이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여성 가극단을 이릅니다. 방송을 보고 일종의 팬심을 가졌고 조금 '덕질'을 해보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잊고 지냈어요.

그러다 2008년 늦은 가을에, 친한 선배 언니가 한국의 50년대 여성문화 연구의 일환으로 '여성국극'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 선배가 1세대 여성국극 배우 선생님들을 인터뷰하는 자리에 동행하는 것이 어떻겠냐 제안했어요. 인문적 연구도 중요하지만, 예술적이고 매체적인 차원에서의 연구 또한 중요하다며 제게 연구를 권유했죠. 그때 저는 <동두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발표한 직후였고 미군 캠프와 지역의 관계, 그곳에서 횡행하는 성매매, 그 산업에 투입된 이주여성들과의 관계설정에 거의 실패한 것처럼 느꼈죠... 어려운 주제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제가 기지촌 여성들을 만나면서 일종의 특권적 위치를 이용하고 있다는 윤리적인 고민에 빠졌어요. 많이 힘들었죠. 그때 그 선배의 권유가 없었다면, 어쩌면 미술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르겠어요. "

※여성국극 : 창극의 한 갈래로서 연극의 한 장르. 1948년 국악원에서 여성들만이 떨어져 나와 여성국악동호회라는 것을 조직한 것이 여성국극의 뿌리였다. 여성들만이 단원이었기 때문에 여성국악인들이 남장을 하고 공연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프레시안 : 예술가로서 어떻게 보면 슬럼프에 빠졌을 때, 다른 곳에서 우연히 행운을 만난 거네요.

정은영 : "네 정말 행운이었죠. 그때 처음으로 노년의 1세대 배우들을 만났어요. '여성국극'에 인생을 걸고, '예인(藝人)으로서 일생 무대만 바라보셨던 분들이었어요. '여성국극 보존회'라는 친교 모임을 만들어 종종 모이고, 공연도 만드시고 하시는데, 그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했어요. 처음 그 모임에 방문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무척 인상적이었지요.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비규범적인 할머니들의 모임이라니. (웃음) 순식간에 여성국극이라는 장르는 물론, 생존해계신 배우 선생님들에게 매혹당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여성국극 프로젝트>가 탄생했고, 10년이 훌쩍 넘는 연구조사와 관계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를 비롯해 후속 세대 중에는 그 오래전, 그러니까 여성국극 배우들이 BTS 급의 스타성을 가지고 있던 시절의 온전한 공연을 본 사람들은 없을 거예요. 역사적 기록도 불충분하니 연구조사는 주로 생존 배우들의 구술에 기댈 수밖에 없지요. 그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종종 받기도 하지만, 저는 이런 경우 공식역사를 비판적으로 저항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역사 읽기의 방법론이 바로 페미니스트 미술사가 취하는 정치적 방식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저는 미술가이기 때문에 예술적 상상력을 동원해 새로운 기록의 기술들을 고안하고 실험하기도 합니다."

▲정은영 작가 ⓒ연합뉴스

프레시안 : '비규범적인 노인'이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정은영 :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할머니'라는 개념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분들이에요. 겉보기엔 그냥 다 할머니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웃음) 그런데 일단, 목청부터가 장난이 아니고... 노래하고 연기하셨던 분들이니까요. 삶이나 세상에 관한 관점도 무척 달라요. 드라마에 게이 커플이 나와서 떠들썩할 땐,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귀엽기만 하던데…'라고 하신다거나, 신문에 성소수자 인권에 관한 칼럼 같은걸 잘라놨다가 제게 주기도 하시고. 또 일상적으로 어르신들이 많이 물어보는 질문 있잖아요, '너는 나이가 몇이냐', '결혼은 했냐'. (웃음) 그런 걸 전혀 물어보지 않으시는 것도 어떤 면에선 놀랍더라고요. 대신 당신들의 이야기, 당신들이 경험한 것들에 대해 화통하게 이야기하시죠. "

프레시안 : 흔히 가지는 '할머니'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네요. 일생 동안 창작을 해온 분들이라고도 했는데, 선배 예술가로서는 어땠나요?

정은영 : "아무래도 그 모임에 처음 방문했을 때는 여러모로 서툴렀죠. 이 많은 노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인지도 모르겠고... 카메라를 들고 갔지만,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댈 수도 없고... 그냥 소심하게 제가 미술작가임을 밝히고 여성국극에 관심이 있어서 앞으로 관련한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죠. 시간이 오래 흐른 후에 여쭤본 적이 있어요. '제가 처음 갔을 때 뭐 하는 앤줄 알고 받아주시고 작업에도 협조해 주셨냐', '몇 살인지, 결혼했는지. 왜 그런 흔한 질문은 하지도 않으셨냐.' 하고요. 그랬더니 '네가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길래'라는 대답이 돌아왔죠. 당신들도 예인이니까 '예인들끼리는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당신들이 과거에 배우라는 이유로 광대 취급을 받거나 천대당했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시면서 그러시더라고요. '예술인은 자신의 인생 내내 성실하게 자신의 예술작업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이라고요. 제가 '예술가'이니 적어도 당신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허튼짓을 하는 얘는 아니겠구나. 라고 생각하셨대요. '남자니, 여자니, 결혼했니 안 했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예인은 자기 작업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하면 된다'고요. 그런 말을 미대 교수님에게조차, 제 부모님에게서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데. (웃음) 제가 난생처음으로 예술가로서 존중받고 환대받은 경험이었어요."

프레시안 : 예술가로서 매우 힘든 시기에 선배 예술인에게 위로와 응원을 받은 거네요.

정은영 : "네. 무척요. 선생님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제가 창작자로서 가지고 있던 두려움, 당시 <동두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던 윤리적 딜레마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선생님들과 여성으로서, 예술가로서, 또 종종 퀴어로서의 공통의 감각을 은밀하게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어요. 마치 거친 세상에 나갔다가 편안한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달까요. 그래서 또 그 안에서 오래 머무를 수 있었던 거고요.

사실 '2~3년 작업하다가 작품 나오고 나면 소원해지겠지'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노인들의 시간은 제 예측을 완전히 벗어나서, 순식간에 너무 많은 분을 잃었어요. 제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약 12년간의 시간 동안 이제 1세대 배우는 서너 분이 생존해계실 뿐이에요. 보존회의 인원도 크게 줄었고, 그나마 팬데믹 이후에는 그 모임마저 멈추었죠. 지금은 생존해계신 선생님들과 개별적으로 만나거나 전화 통화 정로만 안부를 여쭈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네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단지 이분들과 작업을 하고 있다는 관계를 넘어 그들의 삶과 죽음에 긴밀하게 관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 여성국극을 접하기 이전에 <동두천프로젝트>를 진행했었고, 또 어떤 작업을 해왔나요?

정은영 :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 폭력을 은유적으로 서사화하고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해왔어요. 비디오 매체를 주고 사용했고, 때론 글을 쓰기도 했죠. <동두천프로젝트>는 이전 작업의 성향에 '지역', '정치', '군사주의', '역사' 등의 조금 거대한 담론들이 교차하는 프로젝트였어요. 분단 한국의 미군 캠프를 지탱하는 지역과 자본, 그리고 산업에 종속된 여성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성의 사적 경험이 보다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으로 넘어와 연루되는 상황으로 관점이 조금씩 옮겨간 셈이죠."

여성, 역사로 남지 못하고 사라지다

프레시안 : 과거에는 여성국극이 'BTS 같은 인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반면 오늘날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이너한 장르'가 된 것 같은데 인기가 급격히 식은 이유가 있나요?

정은영 : "여성국극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생겨났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해방 직후, 대한민국 건립 직전, 즉 해방공간에서 탄생했고, 이후 상승세를 가지다가 50년대 중 후반에는 한국전쟁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거의 유일하게 흥행 가도를 달린 공연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대한민국이 근대국가의 형태를 갖추어가는 박정희 정부의 국가 주도 문화정책이 자리를 잡자 완전히 사라져요. 부강한 국가상을 원하는 마초적인 군사정부의 근대화 기획은 전통, 문화, 예술 등도 정부의 정치적 코드와 일치했어야만 했겠죠. 의도적인 배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흥행의 정점을 찍던 50년대 후반의 열기는 과히 BTS 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대중문화의 흥행사적인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역사임이 분명하지만, 여성의 사회진출이 드물던 시절에 여성들만의 예술 장르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은 여성주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역사 얘기가 나와서 부연하자면, 동서를 막론하고 어떤 문화권이 근대기로 넘어갈 때 소위 '여성극'이 출현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경우, 전통적인 '판소리'라는 장르가 있죠. 소리꾼과 고수로 이루어진, 주로 남성의 장르죠. 물론 수많은 여성 명창들이 존재했지만 그 역사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판소리는 전통적으로 고어나 한자표현이 많아요. 대중을 상대로 공연하기도 했지만 완벽한 해독은 어렵죠. 또 일상적이지 않은 성음을 만들어 내야 하고요. 일생을 바쳐 목에 피를 내면서까지 득음해야 하는 매우 장인적 훈련의 과정을 거쳐야 명창으로서 일가를 이루 수 있지요. 대중이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음악이라고 보긴 힘듭니다. 근대화의 여러 장면 중에는 매우 일상적이고 보편화한 문화들이 등장하는 것 또한 포함됩니다. 대중에게 좀 더 가까운 음악,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 감정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쉬운 언어들, 소통의 목적이 분명한 직접적이고 유통 가능한 노래들이 인기를 끌게 되죠. 여성국극은 판소리 전통에 기거하지만 각 배역으로 '분창화'되고, 소위 '연극 소리'라는 성음의 방식으로 대중화, 서구화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여성국극은 근대의 산물이자 동시에 흥행산업으로 이행하는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프레시안 : 대중에게 가까운 문화가 생기면서 여성의 무대, 장르가 탄생했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문화, 유행, 인기, 이런 게 오늘날에도 여성 소비자가 주도하는 것 같긴 한데, 이유가 있나요?

정은영 : "음악도 그렇지만 점점 대중의 요구에 가까워지는 장르가 등장할 때, 소위 권위와 패권을 가진 남성 중심적인 전통문화는 잘 움직이지 않죠. 전통을 고수하고 거기에 권력을 기재하려 하죠. 반면에 권위의 외부에 있던 여성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이질적인 실천이 받아들여지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영국에서는 빅토리안 문화가 융성할 때, 여성극들이 고개를 내밀기도 하고, 중화권에서는 '경극(京劇, 베이징 오페라)'과 다른 모습의 '월극(越劇)'이 등장합니다. 일본에서는 애초에 근대적 기획으로서의 소녀가극단인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근대의 상징인 신도시, 철도, 여가 등의 요건들과 함께 탄생합니다. 월극은 중국 광저우지방에서 홍콩에 이르기까지 '칸토니즈 오페라(Cantonese Opera)'라는 장르로 미미하게 남아있습니다. 초기에는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요로 시작되어 점차 장르 공연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 전통은 홍콩의 영화산업에도 영향을 크게 미쳐 '황매(黃梅)'라는 장르를 만들어내었고, 홍콩 쿵푸 영화의 전성기 이전에 짧지만 엄청난 흥행성적을 내게 됩니다. 대만에서는 더욱 종교적인 형태로 발전해 '타이와니즈 오페라(Taiwanese Opera)'라는 장르로 남아있고요. 특히 동아시아에 넓게 펼쳐진 이 여성극의 형태는 남역 주인공 역할을 포함 거의 모든 배역을 여성이 수행하고, 아시아의 전통 가극을 표방하지만, 서구식 뮤지컬 스타일을 일부 수용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더불어 남역 배역을 수행하는 배우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로 인한 거대한 팬덤이 출현하고, 사회적 문제가 발발하기도 했다는 점도 공통된 정황인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해외와 달리 한국에서만 '여성국극'이 사장된 건가요?

정은영 : "'다카라즈카'를 제외하고는 사실 다른 나라들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볼거리와 문화적 취미들이 폭격 수준으로 풍성한 이 시대에 당대의 여성극의 형태는 내용으로도 형식적으로도 현대인의 구미를 만족시키기엔 어려움이 있을 거예요. 정부의 전통문화 보존 차원에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 뿐이죠. 여성국극은 사라진 이후에 몇 차례 부활의 움직임이 있기도 했어요.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여성국극 애호가인 덕에 당시 정부 차원의 문화지원이 꽤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박정희 정권의 국가기획에 여성국극은 크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박정희식의 '부유하고 강한 국가'로 가는 근대국가건립기획에는 여러 문화적 전통을 정립하고 여타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문화적 풍요 또한 포함되었습니다. '국립극장', '국립극단', '국립박물관' 같은 것들을 차례로 건설해 가죠. 그때, '국립 창극단' 역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생겨나고, 이 극단은 남녀 혼성 극단이자 남성인 주도하는 극단이 됩니다. 여성국극단에서 기획적/사업적 노하우를 익힌 남성 국악인들은 여성국극을 떠나 국립 창극단에 안착하게 됩니다. 여성국극단에서 오로지 배우로서만 성장한 여성들은 급격한 사회, 문화, 정치적 변화와 흐름을 직감하지 못한 채로 도태됩니다. 더 설 수 있는 무대가 남아있지 않았을 때야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많은 여성국극 배우들은 더 과거의 영화를 누릴 수 없었음이 분명하고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런 점에서 여성국극, '여성만의 극단'이 가지는 특수성이 있어요. '여성만의 집단'이 가지는 일종의 열등감이 무엇을 전략화하는지, 또 무엇을 격파해 나가는지. 의도적인 배제가 역사성 안에 녹아있다면, 이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폭로하거나 의미화할 것인지. 제가 여성국극 프로젝트에 확신을 가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또 이미지와 시각성을 다루는 미술작가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니까 지워졌거나 사라진 존재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 등등. 할 일이 많았죠."

집 안의 여성이 극장으로 간 까닭

프레시안 : 남성만 나오는 연극, 오페라 등은 역사적으로 꽤 존재하고 연구도 많이 되어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여성만의 극단, 그리고 그 안에서 여성이 분한 남성 역할, 이런 점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정은영 : "남성만 등장하는 공연, 문화예술은 엘리트 예술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물론 딱 구분 지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대개 그렇죠. 애초에 여성을 끼워 주지도 않았고, 여성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도 없는 영역이었죠. 그 때문에 베이징오페라, 가부키, 노 등에선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맡아요. 여기서 여성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성별로서의 '여성'이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형식'을 훈련하고 체득하는 장인적인 과정이죠. 일상적 언어를 쓰지 않고, 감정적 표현을 배제합니다. 모든 움직임과 제스쳐는 혹독한 예술적 훈련을 통과해야만 습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식적 완미를 향해갑니다. 인간적이고 자율적인 표현이라고 보기는 힘들죠. 그러나 대중문화나 하위문화를 구성하는 언어와 표현 등은 전혀 다르죠. 여성국극은 전통문화의 가치 위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보이지만, 대중이 요구하는 열망과 가치를 향해갑니다. 저는 이것을 일종의 '변칙의 기술'이라고 일컬어 왔고, 이 기술이야말로 현대 미술가로서 배워야 하는 미학적 전략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여성이 남성을 연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국극은 또한 '젠더의 수행성'을 현현하고 있습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남성 역할은 여성이 좋아하고 원하는, 용맹한데 자상하고 로맨틱하기까지 한 캐릭터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전혀 다른 남성의 이미지요. 거기서 일종의 근대적인 낭만적 연애 서사를 학습하기도 합니다. 자유연애의 가능성을 상상하기도 하죠. 일제 침략기에 소위 '식자층 여성'이나 접할 수 있었던 연애소설이나 서구적 연극 문학 같은 것들이 대중문화의 형태로, 여성의 언어로, 여성의 욕망으로 구현되고 있으니, 당시 여성들에겐 훨씬 더 생생한 현장이었겠지요. 여성 팬들이 정말 많았어요. 여성들에겐 문화예술의 향유나 외출도 허용하지 않던 경직된 사회에서, 딸이 공연 보러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가 '가기만 해봐라,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 이런 식이었을 텐데(웃음), 여자만 나오는 공연이라고 하면 보내주기도 했다더군요."

프레시안 : 남성 역할의 배우가 특히 인기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남자 같은 여자',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잖아요.

정은영 : "동경하는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동성애적 욕망을 마주하기도 했었던 듯해요. 단지 연기일 뿐이라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데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생겨나는 거죠. 의지로 멈출 수가 없고요. 이런 동성애적 욕망은 사회에서 완벽하게 금기시되죠. 그런데 극장 안에서는, 공연이 벌어지는 시간만큼은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당시 여성국극 배우가 되겠다고, 혹은 좋아하는 배우의 시중을 들겠다고 가출하는 소녀들이 많아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었어요. '사생팬'이라고 할 수 있는 팬들이 구애도 많이 했고 혈서를 보내기도 했대요. '자신은 여성 간의 사랑, 이런 걸 다 뛰어넘을 수 있다'면서요. 특히 남성 배역 배우들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죠. 돌아가신 조금앵 선생님과 한 열성 팬과의 '가상결혼식 사진'은 여성국극 연구자들이 무척 좋아하고 아끼는 사진이죠. 이런 흐름 속에서 여성국극은 전근대적 과거에서와는 명백히 다른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고, 새로운 스펙터클을 체험시키는 것은 물론, 성별이나 사랑과 같은 다소 전형적인 재현에 다른 욕망을 기입하게 되는 것이죠. "

프레시안 : '성별 재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정은영 : "우리는 남성, 여성이란 이분법적 성별 구분이 생물학적이고 불변의 것이라 믿는 관념이 강해요. 그런데 여성국극 안에서는 이 관념이 흔들리죠. 여성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요. 주디스 버틀러가 이야기한 젠더론과 맞닿는 지점이에요. '젠더란 사실은 퍼포머티브한 것이다',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적인 것이다'라는 담론이요. 이런 담론이 여성국극이라는 퍼포먼스라는 장르 안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반복된 거죠. 그런 점이 제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점이었어요.

그런 일례도 있어요. 무대에서 남역을 하는 분들은 남자 옷을 입는 게 자연스러웠죠. 배역에 집중하려고 무대 밖 일상에서도 남자 옷을 입고 다닌 분들이 있었대요. 선생님들 표현으로는 '가다마이를 입고 명동거리를 활보했다'고 해요. 물론, 어떤 분들은 자신은 무대에서만 남역을 할 뿐이라고 일상에서는 오히려 더욱 '여성스럽게' 계신 분들도 있고요.

남자 옷을 입고 다니면 남자들이 와서 시비를 걸곤 했대요. '네가 남자냐, 여자냐'면서요. 그런데 당시 여성국극 배우는 오늘날의 아이돌 같은 존재였고 남자라 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여자였어요. 시비를 걸다가도 여성국극 배우라면 그냥 갔대요. 그런 경험이 여성에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경험은 사실 현대에 '성공한 여성'이라 해도 잘 체험하지 못하거든요. 그런 경험을 하신 분들은 자신이 중요한 인물, 중요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걸 체감한 거고요. 자부심이 대단해요. 여성국극이 사장된 후엔 매우 가난한 삶을 사신 분들이 많은데도 여성국극 배우라는 자부심을 지금까지도 절대 놓지 않으셨어요."

프레시안 : '여성'의 모습을 하지 않는 여성, 여성성을 수행하지 않는 여성. 당시로써는 상상하기가 힘드네요. 자신의 커리어로 사회적 명예를 얻었다는 점에서도요.

정은영 : "동시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집단.' 의 가시화도 당대 여성들에겐 매우 큰 고양감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하네요. 현실은 여성을 결핍되고 비독립적인 존재로 치부하면서 아버지나 남편에게 기대도록 요구하는데, 여자끼리만 뭔가를 하고 심지어 그렇게 해도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사회적으로도 유명인사가 됐잖아요. 이러한 매혹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어요.

여성국극의 기원을 조금 들여다보아도 좋을 것 같아요. 해방 전에 '기생'들은 일제 통치의 영향으로 '권번'에 소속되어 있다가, 해방 후에 권번이 와해하고 '기적'에서 이름을 내리게 돼요. 소위 기생 출신의 여성 중 많은 수가 음악적 기능을 가진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국악계로 모여들게 됩니다. 해방 이후 여성 명창의 수가 드라마틱하게 늘어나는 이유도 이 같은 정황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기생 출신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인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시달려야 했어요. 이들은 자신의 위상과 권리를 위해서 '여성국악동호회'라는 조직을 구성하게 됩니다. 이 단체를 통해 자신들의 예술가적 위상을 보호하고 또한 공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여성국악동호회'의 창단기념 공연으로 만들었던 '옥중화'는 이후 여성국극 공연의 전신이 됩니다. 단체가 조직되고, 그 활동을 이어가고, 그것이 이후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 등을 볼 때, 이는 명백하게 자발적인 페미니스트적 실천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이런 역사적 맥락도 페미니스트로서 쉬이 지나칠 수 없었던 중요한 지점이기도 했고요."

여성국극의 '퀴어함'

프레시안 :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2008년부터 진행해왔는데요, 긴 기간이었습니다. 시작할 때의 취지가 뭐였나요? 처음과 달라진 부분은요?

정은영 : "말씀드렸듯이, 처음엔 진짜 생각 없이 따라간 거예요. 친구 따라 강남 갔다가……. 매혹을 만났죠. 처음엔 계속 리서치만 했어요. 제가 알고 있는 게 너무 없었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여성국극이 뭔지 조차 사람들은 모르니까 초기작업들은 그저 이미지로 존재를 기록하는 것, 제 앎을 계속 축적하는 것 정도에 그쳤죠. 재현하고 보여주는 거에 집중했던 거예요. 작업을 길게 이어오면서 여성국극을 알게 된 사람도 많고 제 작업도 관심을 받으면서 그저 기록하고 재현하는 것 이상의 욕심이 생겼죠. 근래에는 <정년이>라는 웹툰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오히려 중장년층보다 10~20대 여성들이 여성국극에 비교적 친숙하더라고요. 하여튼, 이제는 단지 역사를 재현하거나 가시화하는 건 제 임무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좀 더 철저하게 사회적인 예술가로서,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를 여성국극의 속성과 관계 시켜 이야기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여성국극으로부터의 배움이나 탈배움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다시 보는 거죠. 프로젝트 초기와 정말 많이 바뀌었죠. 처음엔 긴급한 기록에의 소임이 있었고, 지금은 비로소 저의 창작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프레시안 : 최근의 작업을 소개해 줄 수 있나요?

정은영 : "제가 근래에 공을 들인 작업 두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하나는, 2016년에 서울에서 초연하고 팬데믹 전까지 매년 투어공연을 한 <변칙 판타지>라는 연극작품이에요. 여성국극이 사장되고 나서 배우들이 설 무대가 없어요. 1세대 배우들은 그래도 영화를 누렸었죠. 2세대는 1세대만큼의 인기를 누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영락을 모두 봤죠. 마지막 세대 배우들은 여성국극의 명맥이 끊겼다가 부활기에 우연히 유입된 세대예요. 3세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무대를 떠나면 정말로 여성국극은 완전하게 자취를 감추는 꼴이 되기에 '마지막 세대'인 셈이죠. '마지막 세대'라고 할 만한 배우가 한두 명 남아있는데 이 친구들이 저와 비슷한 나이예요. 젊지도 않죠. 설 무대가 없으니까 배우로서 갈등하죠. 생계는 당연히 안 되고요. 생계를 다른 일로 해결한다 해도 무대가 없으니 자신이 배우인지조차 혼란스럽고요. 이 작품에서 함께 작업한 배우가 바로 마지막 세대 배우이고, 일상을 포기하고 미친 듯이 여성국극에 달려들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대도 동료도 없어요. 선생님들은 노쇠해서 삶의 방향을 함께 맞춰 나갈 수도 없죠. 많이 배운 것도 없고, 남역 연기를 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배우로서의 특장점도 없는 것 같이 느끼죠. 그 외로움과 좌절, 그러나 완전히 무대를 떠날 수 없는 미련 같은 복잡한 감정 따위를 조금 더 정치적인 언어로 이끌고 싶었어요. 이 배우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죠. 완전히 세상에서 잊힐 뻔한 한 배우가 '주연으로' 무대에 서고, 동료 그룹을 만나고, 연기를 하는 것만큼이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방법을 고민했어요. 그렇게 이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프레시안 : 여성국극을 다뤄왔지만, 미술작가가 '연극공연'을 만드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일 텐데요, 연극을 만들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정은영 : "연극을 하게 된 건 '남산예술센터'에서 저에게 작업의뢰를 하면서였어요. 지금은 없어진 극장이죠. 한국 근대 연극사에선 아주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고요. 남산예술센터에 가보니, 극장이 전형적인 그리스 원형극장을 흉내 내 만든 구조였어요. 그 극장을 보자마자 '그리스 원형극장처럼 생긴 곳이니까 그리스 코러스 극을 하나 만들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연극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비극/ 그리스 코러스"를 연극을 잘 모르는 미술작가가 더듬더듬 만들어 보는 거죠. 그리고 그리스 비극의 주요 인물, 즉 고통과 갈등을 경험하는 주인공의 자리에 무대를 잃은 여성국극 남역 배우를 세우고, 당대 공동체의 존경받고 지혜로운 원로들이 맡았던 코러스의 자리에 우리 사회가 지워내려고 노력하는 성소수자를 세우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바로 게이 합창단인 '지보이스 G-Voice''를 초대했습니다.

게이 코러스와 여성국극 마지막 세대 배우가 무대에서 만나 대화를 하고 각자에게 직면한 여러 문제를 노래, 춤, 대화, 마스터 클래스 등을 표방해 드러냅니다. 그리스 비극/코러스의 한국화되고, 퀴어화되고, 현대화된 버전이라고 할까요? 연극 언어를 잘 모르던 시절이기도 했고, 많은 인원이 움직여야만 하는 연극의 특성 때문에, 만들 때는 힘들었는데, 이 작품이 의외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어요. 낯선 도시로 이동할 때마다, 그 지역의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찾아 조사하고, 성소수자 합창단을 찾아서 협업을 제안했어요. 거절당하면 임시로 작품을 위한 합창단을 모집했습니다. 대만, 일본, 인도 등에서 공연했고, 저희 주연배우는 매번 다른 문화권의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노래를 부르는 합창단과 만나 무대 위에서 사회적 연대를 만들어 갔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서로 다른 도시의 성소수자의 위상을 파악하게 되고, 각 문화권 안에서 지켜내고자 하는 사회적 협의 등에 대해 당사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2017년,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 입번안을 위해 투쟁하던 대만 성소수자들의 자긍심과 맹렬한 투쟁을, 도쿄의 모든 게이 코러스에게 거절을 당하고 임시로 꾸렸던 합창단과의 눈물의 인터뷰를, 공연장소였던 인도의 고아로 기꺼이 날아와 준 뭄바이 LGBT 합창단의 우정어린 협업을 여전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작품은 2019년 11월의 교토공연을 끝으로 팬데믹과 함께 세계 투어를 마친 셈이 되었습니다. "

프레시안 :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요?

정은영 : "다른 하나는 여성국극과 현대 공연예술가들의 상상적 계보를 만드는 작업이에요.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첫선을 보인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이라는 작품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현대 미술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커리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네요. 비엔날레 현장은 당대의 현대미술의 이슈들과 담론들이 뜨겁게 격돌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작가로서 무척 중요한 커리어를 넘어서기 위해 이전의 관성과 안전함에 기대는 것은 비겁한 일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더 도전적이고 치열한 작업을 해내고 싶었죠. 여성국극의 가시적 이미지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스러져간 과거의 사건이 지금 우리에게 왜 중요한지를 역설해야 했지요. 자전적 연극을 통해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연극배우, 페미니스트적 저항으로서 드랙킹 공연을 해석하는 드랙킹 퍼포머, 중증장애를 드러내는 불구의 신체를 퍼포먼스화하는 여성장애인 배우,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을 전자음악의 비트에 기입하는 전자음악가, 이 네 분에게 협업을 제안했어요. 여성국극의 배제된 역사, 퀴어하고 이상한 미학들, 신체를 부단히 다시 구성하는 퍼포밍들, 안전하고 편안한 시각적 체험을 방해하는 혼미한 섬광과 신체를 쿵쿵 울리는 과잉한 사운드의 감각들,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퀴어적 전회'를 상상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한 작업입니다. 이 작업은 현재 국내에서 전시 중이기도 한데요, 4월 10일까지 인천 개항장에 있는 인천아트플랫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여성국극과 퀴어 예술의 계보가 어떤 점에서 상성이 맞았나요?

정은영 : "우선은 이미지적으로 유사한 지점들을 찾아내기도 했고요, 제가 앞서 말했던 어떤 '변칙의 기술'을 미학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이건 저의 해석이지 정통한 의견은 아닐 거예요. 여성국극은 전통예술인 판소리에서 파생됐어요. 그렇지만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진 않아요. 매우 서구화된 형식으로 변형을 추구했죠. 근데 또 완전히 서구화하지도 않아요. 전통적인 장르 위에서 크게 비틀지 않으면서 점차 모던한 형태의 공연을 만들어요. 전통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전통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가끔은 스스로 전통이라 우기면서 꾸준히 변칙술을 고안하죠. 전략적 수사들. 재현의 뒷면을 만들어 두고 조금씩 맥락적으로 변형하고 또 머무르는 것. 저는 이러한 방식이 퀴어 예술이 취하는 많은 저항적 미학의 사례들과 무척 닮아있다고 느낍니다. "

프레시안 : 젠더의 측면에선 어떤가요?

정은영 : "여성국극 무대는 그야말로 '젠더트러블' 그 자체죠. 성별을 연기하는 행위를 통해 공연 전체의 정서가 퀴어해지는 것 이외에도, 그 과정에 깊이 참여하고 있는 배우들의 젠더 수행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배우는 연극을 통해 자신이 퀴어임을 확인하기도 하고, 어떤 배우는 자신이 절대 퀴어가 아님을 확인하기도 해요. 그런 과정에서 젠더라는 것이 굉장히 유연하다거나, 또는 고정돼 있다거나 하는 자신만의 답을 만들어가시더군요. 정언명령으로서의 '불변의 생물학적 젠더'가 아니라, 자신들이 '수행함으로써' 젠더가 신체에 새겨지는 과정을 누구보다 깊이 인지하게 됩니다.

현대의 퀴어 공연자들은 이러한 측면을 잘 학습하고 공연을 구상하기도 하지요. 무대를 통해 젠더나 장애에 관한 여러 언설들에 직면하고 관계하고 대립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들은 모두 공통으로 '수행함으로써'만 '퀴어해'지는 것 같습니다. '퀴어'그 자체를 파고든다기보다는 어떤 방식으로든 실천함으로써 퀴어를 부단히 다시 구성한다고 생각해요. '퀴어함'이란 끊임없이 새로 발견하는 수행적인 과정이라고 보는 입장이죠.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장르, 다른 문화적 조건들 속에 있는 이들의 상상적 계보는 이런 생각들을 바탕으로 시도해 본 것입니다."

'퀴어'를 드러내다, '퀴어함'을 드러내다

프레시안 : 최근에 대중 미디어에서 퀴어를 소재로 한 작품이 늘어난 것 같아요. 오랫동안 퀴어를 주제로 작업을 해온 입장에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나요? 또 대중예술에서 다루는 퀴어에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나요?

정은영 : "아직은 퀴어를 다루는 작품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너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기도 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문제가 있는 재현을 왕왕 만나게 되니까요. '퀴어'라는 것은 정형화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퀴어 정체성이 불변하는 것도 아닐 테고요. '퀴어 예술', '퀴어적 소재'와 같은 정의가 금 긋는 내부를 더 신중히 들여다볼 필요도 있겠지요. 그 정의 바깥에 존재하는 작품들을 퀴어적 관점으로 다시 보거나 퀴어화하는 시도들도 필요할 테고요. 퀴어함을 발견하고 실천하고 분석하는 과정들도 필요할 겁니다. 퀴어 예술이라 불릴만한 것들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다시 읽기를 시도해보자고 하고 싶습니다."

프레시안 : '퀴어재현'에 대해 조금만 더 이야기 해주신다면요?

정은영 : "제 세대는 무척 경직되고 보수적인 과거에서 점차 거리를 두고 자유를 쫓던 분위기속에서 20대를 보낸건 같아요. 저항적 담론과 정치적 입장들이 꽤나 관용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을 운좋게 보냈지요. 그런 흐름이 제가 지금의 작업적 토대를 지키는데 영향을 미쳤겠지요. 또한 여성, 소수자, 장애인, 난민, 기후 등의 이슈가 세계적으로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시절에 작업을 이어가다 보면, 제가 어떤 핵심적인 이슈를 깊이 파고 들고 있다고 해도, 여타 첨예한 이슈들과 맞물려 교차적으로 사고 할 수밖에 없어요. 저 역시 초기에 '여성'에 관해 이야기 했지만, 그러다 보면 결국 이 여성은 어떤 여성인가 라는 질문에 대면하게 되죠. 혹은 무엇이 여성을 여성이게 하는가 하는 질문도 못본척 할 수 없죠. 여성과 환경이, 장애가, 퀴어가, 인종이 교차하거나 대립하기도 합니다. 더 복잡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해야만 하죠. 특히 미술언어는 비 언어적인 측면이 있고, 해석의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있기 때문에 더 복잡하고 섬세하게 읽어내아만 해요. 어떤 한 단면만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죠. 특히 중견 이상의 작가라면 더더욱 삶의 경험도 다양해 졌을테고 그 무엇도 단순화하거나 균질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여성, 소수자, 장애인, 난민, 기후 등의 이슈는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 뿐 아니라, 미술계 전반에서도 중요하게 관점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근 5년 사이 전세계 미술계가 이같은 주제에 집중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제가 다루는 작업의 주제의식들이 주요하게 평가되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도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소위 '타자의 문화 정치학'이라 할만한 관점이 주류 미술계와 더 이상 반목하지 않고, 하나의 안전한 자원이나 태도로 무비판적으로 반복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한국은 세계적인 흐름과는 조금 동떨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퀴어뿐 아니라 난민, 기후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 낯선 주제인 것 같아요.

정은영 : "자신의 문제로 체감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난민 문제 같은 경우, 이미 유럽에선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어 수많은 연구와 정치적 입장들이 오갈 뿐 아니라 예술 현장에서도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발언 되고 있을 때, 한국은 강 건너 불 보듯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제주 예멘 난민 상황이 보도되고 나서야 문제의 시급성을 느꼈죠. 그리고 난민에 대한 가장 저열하고 혐오적인 의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어요. 그 혐오를 정의로운 것으로 둔갑시키기까지 했죠. 심지어 페미니스트라는 타이틀을 단 어떤 집단은 노골적인 혐오를 보내기도 했고요. 이렇게 지구적 정황에 둔감한 채로 현재 도래한 다른 문제들, 즉 환경, 기후 문제에 대해서도 이대로 방기한다면 미래는 불 보듯 뻔하겠지요. 더구나 현재 국내정치의 수사가 만들어내는 여성, 퀴어, 이주민,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는 어떤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지 정말 난감합니다. 적어도 현대 미술가들은 이러한 악의의 정치와 동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

▲정은영 작가 ⓒ연합뉴스

예술이 퀴어할지라도…예술계는 '퀴어하지 못해 미안해'

프레시안 : 그렇지만 미술계도 대단히 남성중심적이지 않나요?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요. 예술가 당사자로서 어떻게 보나요? 또 직간접적인 경험이 있을까요?

정은영 : "아마 많은 예술가가 예술계 내 성차별이 있다고 강하게 느끼지만, 또 동시에 점점 개선해가려는 노력이 존재한다는 점에 동의할 거예요. 한국 사회를 강하게 각성시킨 미투(me too) 운동의 절반쯤은 예술계 내 성폭력을 근절하고자 하는 의지였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유수의 미술 행사 및 전시들에 여성 작가의 비율을 높이려는 의지도 여전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작가뿐 아니라, 기획자, 미술관의 관장, 비평가나 미술 연구자/저술가의 여성 비율이 차츰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량적 변화는 물론, 미술계 안에서 오가는 소통언어, 전시의 주제와 관점, 작가 개개개인의 젠더 감수성도 비교적 개선되어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낍니다. 물론 모든 것이 마냥 긍정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교적 많은 변화의 흐름이 요동치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 유명 미술 콜렉티브의 일원인 Y 작가와 미술 명문이라 알려진 홍익대 A 교수의 성폭력 사건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논쟁 속에서 결론이 나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미술계를 이루는 핵심적 부분인 미술대학은 여전히 압도적 비율의 남성 교수와 압도적 비율의 여성 학생들 간의 격차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업실천의 차원에서는 매우 자유롭고 진보적인 공간으로 보이는 미술계도, 아카데미나 미술관, 혹은 미술 정책 등의 공적 영역을 두고 본다면 그 보수성을 탈피하기엔 아직 어려워 보입니다."

프레시안 :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차별은 아무래도 영향이 클 것 같습니다. 차별금지법의 핵심이기도 하고요.

정은영 : "대학 내에서 학생들을 만나다 보면 더더욱 차별금지법에 진심이 됩니다. 교수자-수강자, 정규직-비정규직, 남학생-여학생의 권력 차가 눈에 보이는 집단이기도 해서인 듯해요. 동시에 매우 다양한 위치와 경험을 가진 이들의 사회이기 때문에, 더더욱 차별과 혐오에 대한 인식이 민감해져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겁먹고 움츠러든 이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 곳이 교육의 공간인 '학교'라면 틀림없이 무언가 잘못된 것이겠죠. '겁먹지 말고 당당해져라'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게 몇몇 사람의 의지에만 맡겨서 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법제화된 상황 안에서라면 훨씬 더 다양한 개개인의 목소리가 존중받고 상생하는 풍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프레시안 : 조금 다른 얘기인데 예술에서의 풍성한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나요? 한편으론 '예술은 너 좋자고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은영 : "'저 좋자고 예술을 하면서 왜 대가를 바라는가'라는 소리를 가끔 들어요. (웃음) 문화예술계는 정부 지원을 필요로 하는 비중이 큰데, 국민의 세금을 예술가들에게 왜 지원해야 하냐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예술이 매우 공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 있다고 생각해요. 대중적으로도 '문화 콘텐츠가 가진 힘과 가치'를 이제는 많이들 인식하게 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예술이라는 것이 어떤 성과를 내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기존의 경제적 논리가 잘 적용이 안 되는 분야이기도 하죠. 작가들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준비 기간 동안 작업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국가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국가 주도의 문화지원 제도는 예술가들의 긴급 구호나 복지예산과는 다른, 순수하게 문화적 가능성과 미래에 투자하는 공적비용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20대 후반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신진'의 시기에 가장 많은 실험과 트레이닝을 하면서 작가로서의 역량을 키웠고, 그 지속성을 만들어 가는 데에 국가지원금의 혜택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프레시안 : 누구에게 어떻게 지원을 해주느냐도 어려운 문제일 텐데요, 과거 정권에선 정치적 코드에 따라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블랙리스트 사건'도 있었고요.

정은영 : "블랙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애초에 경쟁이 치열한 구조인 건 맞아요. 지원금이 필요한 예술가는 많은데 지원금 예산은 한계가 있잖아요. 적은 수를 선별해 많이 지원해 주거나 많은 수를 선발해 적게 지원해 주거나.. 어떤 방법을 선택해도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는 구조예요. 거기에 심의위원의 취향이나 코드에 맞지 않으면 선정되기 어려운 구조인 것도 분명해요. '블랙리스트 사건'은 이런 지원 심사 체계에 '정치적 코드'라는 조건을 넣은 것이라 볼 수 있겠네요. 지원제도의 오랜 슬로건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였는데, 자신의 존립 조건을 뒤집어버린 것이죠. 예술계를 정치적 코드로 갈라놓았다고 해야 할까요. 블랙리스트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많은 예술가가 정말 큰 타격을 입었어요. 후유증도 깊고요.

이후 지원 체계를 보완하려고 예술계에서는 다양한 노력이 이뤄지고도 있습니다. 특히 심의위원들의 구성에 공을 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돈의 문제인 것이고 (웃음) 어떤 지표로 돈을 주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일이죠. 정치적 검열만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검열도 문제라고 느끼는 작가들은 정치적 코드에 저항하는 만큼이나 이 자본의 권력 관계에도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때문에 지원금을 보이콧하는 작가들도 움직임도 존재하는데, 이들은 국가지원금이 아니라 예술가 스스로 자생하는 성장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결국 '차별금지법'

프레시안 : 앞서 아카데미 등 공적인 영역은 보수성이 강하다고 했어요. 심사도 공적인 영역 중 하나인데요. 지원이 필요한 신진 작가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검열할 수도 있고요.

정은영 : "네. 사실 신진뿐 아니라, 모든 작가가 어떤 특정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비용이 절실히 필요하죠. 상대적으로 신진작가의 경우 지원금 이용 경험이 적고, 지원서에 행정 언어를 채우는 것에 능숙하지 못하니 경쟁 구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원금들도 각 단계적 목적과 용도에 따라서 세세하게 구분되면서 점차 변화하고 있기도 해요. 이 역시 사용자들의 의견과 요구가 반영된 긍정적 변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프레시안 : 그 밖에 혹시 더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정은영 : "미술 현장에서 어떤 차별과 부조리에 대한 감각이 갑작스레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 이전부터, 특히 대학 내에서 교육과 준비의 과정 중에 자연스레 공유되고 동의를 받는 일이 무척 중요할 것입니다. 근래 미국에 유학 간 학생으로부터 안부 이메일이 왔어요. 소소한 유학 생활에 대한 내용도 들어있었는데, 첫 수업에서 교수가 모든 학생에게 어떤 대명사(pronoun)로 불리고 싶은지를 묻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했는데, 그럴 수 있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다고 하더군요. 사실 한국에서도 분명히 마음속으로 수업 시작 전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는 경험이 필요한 학생들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조차도 그런 내용으로 수업을 시작하는 것에 얼마간의 주저함을 느껴요. 돌아보니 2003년, 제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당시에도 교수가 첫 수업의 첫 말문을 이렇게 열었던 것 같아요. "우선, 이 강의실에서 화재나 재난 상황이 생기면 양옆의 비상구로 천천히 질서를 지켜나가라. 그리고 내가 강의 중에 여성, 외국인, 장애인, 퀴어 등, 소수자에 관한 어떤 부적절한 말을 한다면 주저 없이 강의를 중지시켜라." 

오랫동안 잊고 있었어요. 수업을 이렇게 시작하는 시도조차 해 본 적이 없었죠. 사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처음 만난 이들과의 첫 대화를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혹 분위기를 경직시키거나 더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유학 간 학생으로부터 다른 예술의 언어를 배우게 됐다거나 공부가 재밌어졌다는 소식이 아닌, 느닷없는 '성별 대명사' 이야기를 듣고 참 씁쓸해졌어요. 매 순간 학생들에게 "너무 겁먹지 마라",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반복하며 용기를 주려고 노력하고는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누군가에게는 긴급한 생존의 문제인지도 모를 어떤 부분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하게 되었어요. "좋아지고 있다", "노력하고 있다." 정도로는 부족해요. 의외의 순간에 뼛속 깊은 차별에 공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섬뜩하기도 합니다. 차별금지법은 예술계뿐 아니라 모든 곳에서, 모두를 위해 긴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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