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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륵사(麻勒士) 선생, 마이크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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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마륵사(麻勒士) 선생, 마이크 잡다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3. '아우들 먼저 든 형부적금(兄富積金)

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중 10편을 골라 주 2회(수, 토요일)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https://blog.naver.com/tongwoohn/222631939375)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 25편)을 볼 수 있다. 편집자

1. 김구 선생 마이크 잡다

2. 죽산 선생 마이크 잡다

3. 마륵사(마륵사) 선생 마이크 잡다

4. 일곡(유인호) 선생 마이크 잡다

5. 김재준 목사 마이크 잡다

6. 강원룡 목사 마이크 잡다

7. 스코필드 박사 마이크 잡다

8. 서인주 도사 마이크 잡다

9. 이지 스톤 마이크 잡다

10. 땅 속 운동권 마이크 잡다

1. 나와 민족공동체

원시인이 사람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동물과 같은 약육강식 우승열패가 아니라 억강부약 상부상조를 통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었다. 그 인식은 XP2라는 소통 능력의 변이를 통해서 꾸준히 전개되는 가운데, 그보다 더 오랜 세월 연마된 동물성이 자주 현재화되어 그 꿈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원시공동체가 무너지고 불평등사회가 반복되지만 공동체는 꾸준히 발전해 오늘에 이른다.

그간 수많은 폭동과 반란을 거쳐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 같은 대사변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는 데는 실패했다. 서민은 혁명 구호에 현혹되어 날뛰었지만 혁명 세력은 영화를 챙기기 바빴다. 무주공산 천지였던 에머슨의 아메리카와 달리 이미 차지할 재산이 없었던 독일의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의 철폐까지 주장했지만 허사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인류의 오랜 꿈은 여전히 여기저기서 꿈틀거리며 현시를 겨냥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공동체가 많은 사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터전이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 왔다. 해방 전후 어린 나이에 주변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를 알게 되었고 옳다 싶어 전선에 뛰어들기도 했다. 철들어 학업에 전념하면서 공동체를 위한 경제정책을 천착하는데 열을 올렸다. 민족경제론이었다. 한민족이 하나 되어 모두 잘 살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2. 선열들의 꿈

해방공간에서 우리가 접했던 독립혈사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인생이었다. 나라가 기울어졌을 때 봉기한 동학군은 20만 넘게 희생되었고, 나라가 쓰러졌을 때 20명 가까운 열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의병은 얼마나 창궐했는가. 방향을 잘못 잡아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기도 했지만, 간도와 연해주로 넘어가면서 왜병과 맞서 싸운 독립군은 얼마나 됐으며, 낯선 땅에 겨우 터 잡은 동포들의 희생은 또 얼마나 컸겠는가.

돌이켜보면 갑오개혁, 특히 단발령에 반대하는 최초(1894)의 의병이 유교의 성지 도산서원(안동)을 중심으로 봉기하였으며, 이어서 명성황후 시해에 분기한 을미의병과 동학의 척양척왜 함성이 독립운동의 기폭제 아니었나. 인의예지라 하지만 의기남아 의혈남아들의 의분심은 다분히 기질적인 것이라 해도 사친이효 사군이충(事親以孝 事君以忠)의 오랜 가르침이 작분(積分)된 탓 아니겠는가. 그게 바로 역사요 전통이요 우리 민족의 긍지 아니겠는가.

한편 그렇다 해도 의병 혁명군보다 이를 방관하거나 선뜻 나서지 못하는 백성이 더 많았고, 나아가 ‘몸만 다치자 그런다고 되겠느냐’에서 ‘제 성질에 못 이겨 저러지 군자는 휩쓸리지 말자’고 경원시하는 양반행세도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근대화에 눈뜬 유림의 협동학교가 같은 유림의 민보군에 의해 피습 당하고(숙지 교사 참수), 그 민보군 3,500명이 동학군 우세지역인 예천을 도륙 내기도 했다. 그 열혈들 그 동패들이 모두 독립군의 거센 물결이었다.

그러나 독립이 정확히 뭔지 따지는 독립군은 많지 않았다. 거기에 독립이 눈에 보이는지, 그 가망은 있는지 어떻게 쟁취할 것인지를 따지지도 않았다. 그러니 모두 독립 신도들이라야 맞다. 당시 우리 교민 간도 60만, 연해주 20만 또는 만주 1,000만, 간도 200만이라고도 했다. 특히 간도·연해주 교민은 거듭되는 흉년과 민란을 피해 100여 년 전후로 고향을 떠나 겨우 정착한 민생들이었다. 거기에 신도들이 몰려들었으니 얼마나 혼란스러웠겠는가.

신흥학교 중심의 우당·석주 두 가문의 총재산이 있었다고는 하나, 더하여 국내외로부터의 각종 성금을 기대했다고는 하나, 또 더하여 청나라 실권자들의 언질이 있었다고는 하나 성금은 일제에 막히고, 또 만주마저 왜놈들에 짓밟히니 독립군들의 절망이 어땠으며 교민들의 피해는 또 상상을 초월했을 것 아닌가. 수확기를 따라 앞다투어 찾아들고 병장기 장만을 위해 수시로 귀금속을 챙기니. 거기다가 독립군마저 사분오열이었으니 이를 어쨌으랴.

한때 한국독립단이 만주에 100여 지단·지부가 있었다니, 나아가 각자도생으로 사병화된 각축전은 어땠으며, 더하여 독립군이 다녀간 흔적을 찾는 일제 보복 만행을 생각하면 실로 다들 순교자들이라 해야 옳다. 그 독립순교자들에게 원자탄은 하느님이 내려주신 선물이라야 맞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독립군들. 쫓겨간 러시아에서, 국부군 막사에서 새우잠을 자던 독립 신도들, 연안에서 태행산에서 홍군보다 더 용감하게 싸운 팔로군들,

절망보다 더 참혹한 무망을 딛고 그래도 부하를 다독거리며 억지웃음을 지어야 했던 지휘관들. 전쟁이 끝났다니 우선 기뻤지만 간구한 지난날과 땅속 묻힌 무수한 용사들을 생각할 때마다 금창이 미어져 왔다. 착잡한 심정으로 우물우물하는 사이 들려오는 소식은 종잡을 수 없었다. 미·소에 의해 조국이 분할 점령당한다니 나라는 장차 어찌 되는 거며, 우린 어디로 귀국해야 한단 말인가. 한때 강대국이 조선의 독립을 보장했다고 했는데 어찌 된단 말인가.

3. 아! 해방

시원한 대답을 얻기는 어려웠지만, 우리가 꼭 패전국은 아니니 점령이야 오래가겠는가. 마음 놓는 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다만 한결같이 분명한 것은 조국을 짓밟고 있는 왜놈들을 쳐내야 하고, 이들과 놀아나 호강을 누린 친일 주구들을 처단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막상 보아하니 미군 점령의 이남에서는 미군에 의해 왜놈들이 보호를 받았고, 그놈들의 앞잡이가 되었던 조선인들은 미군을 등에 업고 희희낙락하기 바빴으니 독립군의 억장은 무너져 내렸다.

국회에서 통과된 반민특위법은 대통령의 반대로 시행되지도 못했고, 악질 주구들은 모조리 석방되어 대통령 비호세력이 되었다. 이에 반항하는 국회의원조차 공산당으로 몰려 처벌을 받아야 했다. 여전히 일제 때 상전을 모셔야 할 평민들에게 새로이 미군을 등에 업은 또 다른 상전이 다가왔다. 자연 다수 국민인 민중들의 삶은 뒷전이었고, 역점은 늘 기득권세력의 강화발전에 두어지게 마련이었다. 무엇 때문에 독립이었고 그러려고 독립운동이었나 땅을 쳤다.

이후 민족정기가 내동댕이쳐진 체 오직 반공만이 판을 쳐대니 민생의 고달픔은 가실 날이 없었다. 하나 북의 공산정권이 있는 한 미군 점령 하의 남의 진보는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었다. 남의 사회주의 선호가 70%를 넘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같은 점령지 일본에서 노조가 부활하고, 한때 진보정권이 수립된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이르면 남한에서의 진보 운동은 또 다른 의병,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었다. 결국 소신을 위해 희생된 순교자들이었다.

얻은 게 뭐냐고 따져 들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공동체 정신 함양과 민족정신 고취를 무엇에다 비하랴. 지금 우리 경제 현실은 안타깝게도 민족공동체와 너무 멀리 와 있다. 공업화는 세계적 추세라 하지만 마을공동체로 꾸릴 수 있었던 농업을 방치한 것은 민족경제의 토대를 허무는 일이었다. 무엇이 되든 돈이 되는 것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덤벼들었으니, 경제주권 훼손은 말할 것도 없고 벌어진 빈부격차는 어찌할 건가.

4. 흔들리는 공동체

그 많은 선열의 희생으로 지켜진 그나마의 공동체는 다시 와해하고 마는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아주 물 건너갔는가. 어언 5천만에 이른 우리 동포들. 노동인구 3천. 월수 2백만 원 미만 비정규직 천만 명. 월수 3백만 원 이상 정규직 천만. 월수 오백만 원 이상 은수저 오백만. 월수 천만 원 이상 금수저 5백만 명, 더하여 세계 최장노동 시간, 세계 최다산재사망(월 70명), 세계 최다절망사(일 40명). 어림잡아 그렇다. 거기에 정규직이라고 시급 만 원 결사반대라니 어쩌랴. 가히 약육강식이라야 옳다.

가열찬 민주화 열풍에도 끄떡없이 저지른 군부독재의 전과 아닌가. 사람은 어려서부터 자립을 배운다. 남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걷기 위해서다. 국가의 자립은 주권을 공고히 하는 데서 출발한다. 주권이 약했던 조선조. 그것마저 50여 년간 일본에 빼앗겼던 울분. 다시 패전으로 점령당한 끝에 얻어진 허약한 국권. 그로 인해 일그러진 공동체. 생각할수록 허물어지는 선열들의 자립 의지 아닌가.

자연 해방 초기부터 젊은이들의 자립 의지는 강했다. 지식인들은 점령군을 거부하고 무상원조에 독이 들었다고 의심했다. 흐물흐물한 시세를 틈탄 모리배를 규탄했다. 친일파는 모리배의 배면이었다. 군정 조사에 주민 대부분이 사회주의 선호로 나온 배경이기도 했다. 군정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토지개혁으로 이를 모면하려 했다. 대학은 달랐다. 저마다 자립 균등 강화를 꿈꾸는 가운데 남침이 있었으니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정신을 차린 지성들은 자주독립을 외쳤다. 유수 대학 모두에 뿌려진 그런 씨앗들이 얼마 안 되어 4·19의 기폭제가 된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농촌을 좀 먹는 잉여농산물을 거부하고 각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노사갈등에 민감했다. 이런 움직임이 6·3 사태(굴욕 외교반대)로 탄압을 불러들여 마침내 학생운동은 지하로 잠복한다. 더러는 꽃잎처럼 떨어져 나갔고 더러는 쭉정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다들 자립경제요 민족경제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은 얼마나 가열차게 전개되었는가. 그러나 학생운동의 지하화는 운동역량이 매장되는 주요한 전기가 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정치투쟁은 사실상 민생을 사각지대화했다. 비밀투쟁 조직이란 오랜 역사성을 가진다. 자연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게릴라 방식 ML이다, NLL이다 하니 해방정국에서 펴본 좌익과 무엇이 다르랴. 결국 성공보다는 또 하나의 순교길이었다.

왜 우리에겐 이렇게 누대에 걸쳐 순교길만 보이는가. 5천 년을 이어 온 조선의 혼이었다. 조선을 조선으로 보전해온 민간신앙이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했지만, 우금치의 죽창가요, 만주벌판의 독립행진곡이요, 건국준비위원회의 인민공화국이요, 4·3이요, 여순이요, 피범벅이었다. 학생운동이 의회를 점령한들 후과가 없긴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구호는 정치지만 정책은 아니었다. 고지 점령은 후련하지만 내놓을 준비는 없었다.

반면 미국 눈치를 알아챈 유학파들과 젊은 장교들이 앙앙히 경제개발에 달려드니 남미는 저리 가라였다. 독재와 부정부패 속에서의 고도성장이었다. 60년이 흐른 오늘 국내경제는 세기적 자본금융을 틀어쥔 미국경제에 편입되고 만다. 종속이다 착취다 해 봤지만 쏟아지는 거대물량에 기죽여야 했다. 모두 세계 경제의 일원됨을 구가하기 바빴다. 병든 경제의 통증을 못 느끼니 지난날의 고통과 희생은 거름에 불과했다.

5. 사해동포주의

그러나 나는 지금 다시 민족경제를 부르짖고 싶다. 미 제국이 중국금융을 붕괴시키고, 97년 우리나라처럼 서방 자본이 들어가서 헐값으로 은행과 기업을 차지하려고 날뛰고 있단 얘기도 들리지만, 한편 세계 유일의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국내경제가 계속 파행을 겪고 있어 민족국가의 안정성과 정형성이 어느 때보다 돋보이고 있다. 우리가 외국 노동자를 마구 끌어드리며 다문화가정 운운하는 짓은 사해동포라는 제국주의 깃발을 들이대는 꼴이다.

빈부는 어디나 있게 마련이며, 그것이 사회발전에 큰 동력이라는 너스레는 또 어떤가. 또 세계 경제 재편 과정에서 빈부가 크게 완화될 걸로 보지만 빈부의 종속화는 결국 빈부 문제를 해결 난망으로 몰고 갈 것임이 틀림없다. 결국 공동체 의식의 강화와 공동체간의 상호존중만이 종국적 해결방안임이 더 분명해지는 상황이다.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의 성공을 들어 선·후진국 간의 상호협력 보완이 열매 맺는 듯 요란하지만 깊이 따져봐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특히 지난번 일본이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소재부품을 수출 금지했을 때는 우리가 능히 국산화로 그 충격을 넘겼다고 해서 뿌듯해하기도 한다. 최근 어느 원로 과학자가 우리나라 제품 중 우리가 발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개탄한 바 있다. 무릇 제품은 설계와 제조기술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특히 우리만의 설계가 중요하다. 우리만 할 수 있는 설계를 발명품이라 한다. 남의 설계를 복사해서 만든 제품도 많지만, 우리만의 설계라야 고가품이 된다.

반도체는 집적회로다. 손톱 반만 한 크기에 머리카락 16분의 1로 회로를 집적하면 16k 디램이 된다. 80년대 중반 삼성이 처음 성공했을 때 중역들에게 타이 핀을 만들어 돌렸다. 그 후 급속히 메가가 나오고 기가가 나왔다. 반도체가 2차 대전 중 발명된 초자기술이라서 우리가 따라잡기 쉽다는 권고를 쉽게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그러나 오늘같이 전자제품이 판을 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회로설계 능력이 없는 우리도 큰 호황을 맞이했다.

설계 입력은 우리가 하고 그 시설 소재(와이퍼)는 일본에서 들여온다. 소위 파운드리였다. 요즈음은 메모리도 내구력이 강한 것은 낸드라 해서 우리가 만들기 쉽지 않다. 나아가 스스로 회로를 찾아가는 비메모리 분야는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 더하여 엄청난 투자가 있어야 한다. 미국과 일본이 파운드리를 한국과 대만에 허용한 것은 정확지는 않으나 맹독성 세척 현상액과 고통스러운 현미경 고화질 고해상 점검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독극물은 특수 배수로를 통해 바다로 들어가지만 암을 유발하기도 한다 하고, 현미경 점검에 시력이 상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요즈음 미국 측 요청으로 삼성이 미국에 대규모 파운드리를 세운다 하니 추측이 틀렸거나, 아니면 고용 사정 등 미국도 급했거나, 미국이 무해 무독 생산방식을 개발했거나가 아니겠는가 다시 추측해 본다.

6. 다시 민족공동체

어쨌거나 그래서 오늘의 현실을 내 말 안 듣더니 꼴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초라한 운동권의 신세 또한 매한가지다. 정치투쟁이란 어차피 감투싸움이다, 운동권이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면 노동자 신세가 저 꼴로 남아있었겠나. 노동계에 일시 몸담았던 운동권에마저 버림받았으니 누굴 의지해 커가겠나. 그래서 이젠 깊이 따지지 말자. 어차피 유무상통 장단보완 아니겠는가. 그렇다 쳐도 기술이라면 노력 아니겠는가. 많은 브레인들이 부정부패에 매달리고, 또한 공동체 장래보다 당장의 평안을 누리려 한다면 기술약진은 구두 선일 뿐이다.

끈기 있게 이어진 독립운동을 본받아야 하거늘 머리 좋으면 법대 의대요 소질 좀 있다면 스포츠 연예런가. 문제는 기초과학이요, 기초부터 파고들어야 신기술의 얼개가 보인다. 그리하여 일본은 얼마나 많이 노벨상을 탔는가. 우리 자연계 의대, 의대 하지만 우수인력은 모두 임상지원이요 기초지원은 찾기 힘들다. 대학병원이 식당 매점 장례식장 같은 부대 수입이 있어야 운영될 수 있다니 도대체 재원은 모두 어딜 헤매고 있는가. 케이블카 출렁다리인가.

인문계란 듯 손 놓을 수 있을쏘냐. 운동권은 겉멋이 아니다. 그 많은 선열이 열정 하나로 일어섰다 해서 또 몸 바쳐 순교했다 해서 이를 이어갈 후배들의 전략 전술이 늘 그 타령이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경제투쟁을 노동자에게만 맡겨놓지 말고 뜻있는 자 모두 노동계로 달려가야 한다. 한자리하겠다는 정치투쟁보다 기초과학 하듯 이젠 국제경제에 편입되고 있는 국가 경제의 문제점을 파헤쳐야 한다. 간고한 세월을 이겨낸 선열을 떠올려야 한다.

이제는 금융시장 자산시장에까지 파고드는 국제 금융 세력에 온 신경을 써 그 교란과 편취와 예속을 막으면서 안으로는 빈곤층의 실상도 그만큼 파헤쳐 일그러진 공동체의 살길을 마련해야 한다. 민족문제란 결국 공동체 문제요, 많은 선진국이 지향하는 복지사회도 나와 이웃이 모두 잘사는 나라 아니겠는가. 지금 특히 남북문제 핵 문제를 제쳐두고 갈 길이 험난하지만, 그래도 가야 할 길이 그 아니겠는가. 더는 방황할 여유는 없다.

더 높은 승리를 위한 욕망을 접고 많은 유지들이 고통스러운 취약계층을 위해 친서민 친노동적 입장에 서서 무실업·무재해·무저임을 내세우면 많은 호응이 있지 않겠는가. 그간의 황금만능 헬조선을 타기할 대신 이 나라 지식인들이 저소득층에 대한 보다 깊은 애정을 모으면 많은 양심 세력의 활빈무대가 펼쳐질 것 아닌가. 공허한 동포애나 막연한 이웃사랑보다 다방면의 활동가들과 대학 및 학회들이 연대하면 그 무대가 더 잘 넓어질 것 아닌가.

7. 그 비원

I. 지금 의열지사님들께 마이크를 쥐여 드리고 현하 한국 정세 하에서 후배들을 꾸짖으시거나 훈계하시거나 아니면 앞날을 내다보시고 장려하게 진로를 밝혀주시길 간청드리오면 어떠하실까. 독불장군처럼 성질나는 대로 내뱉으신다고 후배들이 공감하리라 생각하시진 아니실 터이니 고민 끝에 오래 꾸려놓으신 귀감을 들려주시지 아니하시겠는가. 그리하여 선열님들이시여. 삼가 간절히 배청, 배청하옵나이다. 선열님들이시여 통촉하소서.

II. 목숨 걸고 싸우신 끝에 마주한 분단 현실, 나아가 외군 주둔까지를 감내하셔야 할 비참함에 땅을 치고 통곡하시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시고 막상 마이크 앞에 서시면 어쩔 수 없이 극고생 하신 과거가 떠오르시고 때론 억울함도 호소하시고 싶으시겠사오나 다시 한번 가다듬으시고 입을 여시면 일언으로 분단극복이요 복지국가 아니시겠는가. 한 때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순진하게 외쳤지만, 분단은 끄떡없고 복지는 거북걸음이니 안 그러시겠는가.

III. 우리 힘만으로도 할 수 있는 복지인데 세계 최장노동시간. 최다재해사망. 최대자살율에 비정규직 천만을 바라보니 이 어인 일인가. 개탄하시는 선열님들의 넋두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듯 안타깝고 죄스러운 심정 가늠하기 어렵사옵니다. 추상같이 꾸짖으시는 말씀이시면 많은 후배들을 번쩍 정신 나게 하신단 생각이옵니다. 제일 치열하게 싸우신 의병님들이 마이크를 잡으시면 우레같이 벽력같이 외치시다 기절하시리라 짐작되나이다.

IV. 그래서 우리의 다짐은 선열님들이 채근하시리라 믿사옵는 ‘빈부공존 공동부유’의 길을 개척함이라 여기나이다. 그 남은 길은 오직 ‘빈민시민연대’ 또는 ‘빈부공영연대’와 같은 시민운동 밖에 없다는 외람된 생각이옵니다. 선열님들이 앞장서시면 많은 후손 후배 후학들이 힘차게 줄을 지어 움직일 걸로 확신하옵나이다. 선열님들이시여. 통촉하시어 후진들이 기필코 선열님들의 유지를 높이 받들고 전진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시길 복망하나이다.

V. 다만 많은 나라가 가족 같은 친근감에 어울린 공동체로 출발하였기에 선열님들의 간고한 독립투쟁은 곧 그 민족공동체의 기반을 되찾는 건국의 길이었음을 상기할 때마다 분단 현실을 놔두고 달리 복지국가의 번영을 꾀함이 본말전도라 꾸짖으시리라 믿사오나, 암담했던 국권 상실기에도 기도하는 심정으로 몸을 던져 이를 극복하신 선열님들의 뒤를 이어 분단극복을 위한 저희의 투쟁 기도도 보다 절절히 이어지도록 신칙해 주시옵길 간망하나이다.

VI. 시절이 많이 변하와 후진들이 맞닥뜨린 앞날이 손바닥 보듯 분명하다 해도 세계를 주무르는 강대국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기는 쉽지 않다고 사료되오며, 특히 일제에 의한 민족 말살 시도를 상기하면서 나아가 민족상잔의 비극을 연상하면서 어지간한 고통은 감내하기 어렵지 않다는 다소 안이하거나 체념 섞인 판단이 횡횡함을 나무라 주시옵기 앙망하오며, 민족정기가 약화할 때 민족이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는 역사적 사실을 깨우쳐주소서.

VII. 그렇다고 지난날 독재 타도나 민주화 열기에 휩싸여 몸을 아끼지 않은 많은 의기 남아 의분 청년들이 걸어 온 길을 쉽게 따라가지 않도록 인도해 주소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절벽을 마주한 듯한 암담한 시기에도 빈약한 무장으로 일제에 대든 투혼은 오늘 후진들의 혈관을 흐르고 있사오나, 이제는 적정을 살피며 힘을 비축하고 능히 대소 돌파력을 갖춘 용사들이 나서야 할 때라 여겨지오니 아직 모자란 경우에는 힘을 합쳐 뒷받침하게 하여주소서.

VIII. 더하와 저희가 노려야 할 구국의 목적은 모든 국민이 잘사는 복지건설에 있어야 하옵고, 결국 민족공동체의 완성에 그 뜻이 모아져야 하겠사오나 아직 후진들이 선열님들의 그 고귀한 뜻을 저버리거나 잘못 알아채고 어느 사회에나 약육강식의 논리가 있는 줄 안다면서 인류 구원의 이상인 공동체 건설의 꿈을 헛되게 바라보는 철부지가 있음은 개탄스럽사오니 선열들이시여! 굽어살피시어 이 망종들을 삼제하여 주시옵기 간원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결의]

선열들의 순교 정신을 짚어보며 또 다른 하나님의 축복인 복지국가 건설에 매진하려는 우리들의 결의가 굳세고 그 소원이 절절할진대 나아가 다방면의 활동가들 각종 학회 학생들과 연대하여 연구 활동, 모금 활동을 전개하며 SMS 인터넷 기타 언론기관을 통해 여론을 환기하면 많은 동조 세력을 확충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기본적인 자세로 친서민적 입장에서 무실업·무재해·무저임(삼무연대)을 표방하고 활동하면 어떤가.

[그리하여 주요활동으로는]

가. 저소득층 실태조사 취약계층 동태 파악

나. 노동자 의견 청취, 각종 청원 소원 직·간접 소통 강화

다. 관련 요로 방문 개선책 논의(정부·기업·언론 대담 등)

라. 재해 현장 방문 경위 청취조사

마. 피해 가족과 연대(요로에 예방책 건의)

바. 노동운동 지원으로 노조 자생력 강화

사. 톨게이트 수익 실태 파악

아. 노동자 가족 및 그 주변과의 연대

자. 기타 경제학자·정치학자 보안법 재심 무죄 확정된 인사와의 유대 강화(고인들의 넋두리 수집 등)

차. 구조적으로 빈곤층이 광범하게 자리하고 개선은커녕 거의 신분화돼 가는데 중산층마저 소득주도성장을 파탄시키며 최저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현실을 감안 초록 동색 찾기 시민운동 전개

카. 어용노조 육성, 민생노조 폭압 특혜재벌과 부패특권의 기생 또 기아 선으로 몰린 납품업체와 부를 거머쥐려는 치열한 약육강식 현장을 색출고발.

전원일기

그래서 우린 다시 뭉쳤다.

아득한 옛날 아니 꼭 60년 전 임인년

경제개발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니

아니 그 12년 전 경인년의

동기간 싸움으로 피범벅이 된 손을

채 씻지도 못하고 우리는 모두 공장을 향했다.

아니 그 70년 전 신미년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해방하기 위해 기포(起包)한 지 20년

허나 금수강산 울어 젖힌 벽력 함성 내지르고

임란 이래 300년 지친 몸을 우금치에 뉘었었다

그래도 우리의 가난은 꼼짝도 안한 채

세월 따라 무심히 60년을 더 참아낸 아픔의 끝

우린 다시 이를 악물었지만 가난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우린 마지막으로 다시 뭉쳤다.

어차피 모두가 잘살기는 어렵기에

형님 먼저 힘내시라고

아우들은 다 같이 적금을 들었습니다.

형부적금(兄富積金)!

형님 잘되시기만 빌고 빌던 어느 날

국민소득 2만불 시대가 꿈이런 듯 자랑차게

하늘을 날았습니다, 분명 생시였습니다

형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우야 잘 참아줬다.

우린 모두 주름진 손을 맞잡았습니다

형님이 슬그머니 주머니에 손을 넣으셨습니다

아 이번엔 제부적금(弟富積金)!

어머니 아버지 한시름 놓으시니

어즈버 천기(天機) 발심(勃心)에

5천 단목(檀木) 화합창이라 뭣을 더 바라리

-의열지사 넋두리 마당쇠도 싱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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