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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해방인가, 김일성 세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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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해방인가, 김일성 세상인가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14~15화

14. 전쟁의 포화 속으로

"대장님! 드디어 해방입니다! 해방!"

"무슨 소리야?"

"북한이 6월 25일 남침을 해서 서울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답니다."

"그래? 올 것이 왔고만."

산아래 마을에 나갔던 한 산사람의 전갈을 받고 이현상은 벌떡 일어났다. 평소 감정을 잘 나타내지 않지만 ‘이승만이 도주한다니 드디어 해방’이라는 반가운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조금 뒤 그의 얼굴에는 묘한 어두움이 스쳐지나갔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북한에서 있었던 김일성 추종자들과의 충돌이 떠오르면서, 이러다가 남한마저도 해방을 위해 가장 치열하게 투쟁한 박헌영 선생님이 아니라 김일성의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대장님, 헌데 듣자니 경찰 놈들이 도주하면서 마을에 있는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모아다가 골짜기로 끌고 가 다 처형했다고 합니다."

"개새끼들! 천벌을 받아 죽을 놈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좌익 척결을 위해 좌익들을 전향시키고 대한민국에 충청을 맹세하도록 강제로 가입시킨 조직인데, 경찰 등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좌익뿐만 아니라 무고한 농민등도 다수 가입시켜 한국전쟁 전에 30만 명 이상 가입한 조직이다.

이현상은 이승만 정권이 패주하며 옛 동지들과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강제로 가입시킨 무고한 민간인들을 얼마나 죽였을지 가슴이 메어지고 분노가 치솟았다(이처럼 처형한 보도연맹 가입자수는 1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이 동지, 서울이 해방됐고 이승만 정부는 도주 중이라면서요?"

소식을 들은 한산스님이 병삼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스님, 그렇답니다."

"그러면 저는 병삼이를 데리고 과천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이정 선생님이 서울로 내려오실지 모르니."

"그러시지요. 저는 전투상황에 대한 정보를 더 모으고 병력도 모아서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서울서 뵙겠습니다."

현준은 지리산 생활 한 달 만에 한산스님을 따라 서울로 향했다. 내려올 때와는 달리 함양, 김천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 올라갔다. 가는 길에는 피난길에 올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피난민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현준아 서두르자.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실지 모른다."

한산스님은 하루라도 빨리 서울로 올라가 이정 선생님의 소식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어린 현준은 생각하지 않고 발걸음에 속도를 냈다. 7월 말의 땡볕과 더위는 현준의 걸음을 더욱 힘들게 했다.

추풍령고개를 넘어 황간을 지나 영동에 들어섰다. 영동 노근리에 들어서자 멀리 위로 철도가 지나가고, 아래로는 자동차들이 다니도록 만들어진 아름다운 쌍굴다리가 나타났다. 헌데 아름다운 다리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다리 근처에서 역한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가까이 가보자 놀랍게도 사방에 총을 맞고 죽은 시체들이었다.

다리 밑의 시체들은 그래도 형태라도 남아있었지만 다리 위 철도 위의 시체들은 포탄에 맞은 듯 갈가리 찢겨 형태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놀랍게도,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들 시신이었고 여자와 어린이도 많았다. 특히 7월말 더위에 시신들은 빠르게 부패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이런 일이?"

산전수전을 다 겪은 스님조차 말을 잇지 못했다. 현준은 역한 냄새에 코를 가린 채 놀라움과 충격에 얼이 빠져 울지도 못 했다. 학살의 현장은 9살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한산은 누가 이 같은 학살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인민군은 아직 이곳까지 내려오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승만 정부가 저질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이들이 목격한 것은 50년 7월 26일 있었던 미군의 노근리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의 현장으로, 그 학살범들은 국군이 아니라 미군들이었다(2000년 AP통신 보도로 세계에 알려진 이 사건은 전쟁 초기 미군 선발대가 연패하고 윌리엄 딘 소장이 포로로 잡히자 화가 난 미군이 피난민 속에 위험분자가 숨어있을지 모른다며, 폭격과 기관총부대로 200여명 피난민을 학살한 반인류적 범죄행위였다.).

▲ 1950년 7월 말 미군에 의한 대량학살이 자행된 영동 노근리의 쌍굴다리 ⓒ손호철

한산스님은 노근리를 지나 북서쪽에 있는 영동 용산면으로 향했다. 조금 전에 본 충격 때문에 둘은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세 시간 정도 걷자 용산면의 한 골짜기를 지나가게 됐다.

"한 여름에 웬 한기가!"

골짜기에서 느껴지는 으스스한 기운에 한산스님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골짜기로 가까이 가자 다시 역겨운 냄새가 하늘을 찔렀다.

"아이고, 여기에도…"

역한 냄새가 시체가 부패하며 내는 냄새라는 것을 직감한 한산스님은 울음소리 같은 신음을 냈다. 가까이 가보니 예상대로 많은 민간인들이 죽어 있었다. 특히 젊은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스님, 사람들 손을 다 전깃줄로 묶었네요."

현준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모두 두 손이 전깃줄로 묶여 있었다. 수갑을 채우기에는 너무 인원이 많아 전깃줄로 묶어서 이리로 끌고 와 집단적으로 처형한 것이 분명했다.

"아, 이 동네 보도연맹 사람들인 것 같구나."

한국전쟁 직후 정탐을 나갔다가 온 이현상 부대의 산사람들이 이야기한 보도연맹 가입자 처형 현장인 것이 확실했다. 이들의 처형은 노근리 학살보다 훨씬 전에 벌어진 만큼, 부패한 시신 냄새가 훨씬 심했고 신원을 알아보기 어려운 시신들이 많았다.

▲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이루어진 보도연맹원 대량학살 ⓒ미군 기록사진

"현준아, 아무리 갈 길이 멀지만 이대로 올라갈 수는 없구나. 너무 훼손되어 자손들이 찾아와도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시신들은 우리가 화장을 해주고 가야할 것 같다."

스님은 시신더미에서 시신 상태를 확인해 훼손이 심한 시신들을 골라 따로 모았다. 현준도 구역질이 나는 것을 참으며 스님을 도와주었다.

"현준아, 너는 태울만한 마른 나무들을 구해 오너라."

현준은 산으로 올라가 산아저씨들이 하던 대로 나무를 구하기 시작했다. 시신 위에 나무들이 쌓이자 한산스님은 불을 붙였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극락왕생하소서,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현준도 스님을 따라 불경을 외어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김삼룡 동지, 이주하 동지, 이관술 동지, 정태식 동지가 모두 무사해야하는데…"

한산은 잡혀간 동지들의 안위가 걱정이 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죄 없는 농민들도 이렇게 처형하는 판에 이승만이 남로당의 핵심인 이들을 살려두었을 리 없다는 불길한 생각이 엄습했다. 하지만 이들을 북한에 잡혀있는 조만식과 교환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으니 이들을 쉽게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며 걸음을 재촉했다.

▲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고 묻은 긴 무덤 ⓒ손호철

15. 과천에서

"스님, 저 산 관악산 아니에요?

"맞다. 어려서 네가 이 동네서 자랐는데 기억이 나느냐?"

"저 산만 기억이 나요."

"하긴, 네 살 때니 기억이 안 나겠지. 어쨌든 이제 다 왔다."

한산스님과 병삼은 이옥숙이 병삼을 키웠던 과천 아지트로 향했다.

▲ 원경은 어렸을 때 관악산이 보이는 과천 아지트에서 자란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한국전쟁 후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손호철

"누구 있습니까?"

"아이고, 스님 어서 오십시오!"

"정태식 동지, 살아있었군요."

"아저씨~"

"병삼아, 건강하니 다행이다."

현준은 정태식에게 달려가 안겼다. 오랜만에 현준이 아니라 병삼이라는 이름을 듣자 반가우면서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정 동지가 김삼룡, 이주하 동지 구출작전을 펴다가 잡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어떻게 지냈습니까?"

"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인민군이 내려와 이승만 도당이 급히 도망가는 와중에 한 양심적인 수사관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빼내줘서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천만 다행입니다. 헌데 김삼룡, 이주하 동지는요?"

"전쟁이 터지자마자 이승만이 남산으로 끌고 가 총살시켰다고 하네요."

"나무관세음보살! 조만식과 교환협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한 가닥 희망을 가졌었는데…"

한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 동지, 헌데 이정 선생님 소식은 들었습니까?"

"아직 평양에 계시고 서울은 안 내려오신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은 돌아가신 분들이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혁명과업을 본격적으로 재개해야지요."

"맞습니다. 살아남은 동지들을 모으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중단됐던 <해방일보>도 빨리 만들어야지요. 스님은 먼 길 오시느라고 피곤하실 터니 병삼이와 쉬십시오. 저는 이것저것 알아보러 나가봐야겠습니다."

▲ 이승만 정권에 체포되었지만 김삼룡 이주하와 달리 살아남은 정태식의 경성제대 시절 사진 ⓒ원경스님

며칠 뒤 집 앞에 소련제 군용차가 멈추고 군복을 입은 미모의 여성이 내렸다.

"스님!"

"이게 누구야? 소산이 아니냐?"

김소산은 인민군복에 빨간 부츠를 신고 손에 채찍을 들고 있었다.

"예, 사냥개 오제도 검사의 추적을 받고 있다가 인민군이 내려와 이렇게 살아났습니다."

"다행이구나."

"참, 병삼이는요?"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지만, 건강하게 잘 있다. 병삼아!"

스님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숨어 있던 병삼이가 나타났다.

"병삼아 이리로 와 봐라. 누나가 한번 안아보자."

소산은 병삼을 꼭 안아줬다.

"병삼이가 몇 달 사이에 좀 큰 것 같구나.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 아버지를 빨리 만나야 하는데! 내가 시간이 있으면 너를 평양에 데려다 줄 텐데 시간이 없구나. 하긴, 이정 선생님이 조만간 서울로 내려오실 터니 조금만 참아라."

"스님, 저는 바빠서 가봐야겠어요. 조금 더 기다리면 이정 선생님이 내려오실 거예요."

"그래 너도 몸조심하고."

이것은 소산과 한산, 그리고 병삼이 만난 마지막 순간이었다(김소산은 인천상륙작전 뒤 북으로 가지 않고 서울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195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총살당했다.).

▲ 김소산을 주제로한 반공영화 포스터. ⓒ한국영상자료원

소산이 떠난 뒤 정태식이 들어왔다.

"스님, 아무래도 이정 선생님이 못 내려오시나 봐요. 이정 선생님이 오셔서 이쪽 조직을 재건하고 해방작업을 이끄셔야 하는데…"

"물론 그쪽에 일이 많겠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라 김일성이 선생님을 잡아두고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북쪽에 고립되어 있는데, 자기의 최대의 경쟁상대라고 할 수 있는 선생님을 내려 보내 물 만난 물고기로 만들어주려고 하겠어요?"

"그런 것 같아요."

한산과 정태식은 긴 한숨을 쉬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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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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