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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 없는 대중 경제'를 다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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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 없는 대중 경제'를 다시 살펴본다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2. 죽산 선생 마이크 잡다

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중 10편을 골라 주 2회(수, 토요일)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https://blog.naver.com/tongwoohn/222631939375)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 25편)을 볼 수 있다. 편집자

1. 김구 선생 마이크 잡다

2. 죽산 선생 마이크 잡다

3. 마륵사(마륵사) 선생 마이크 잡다

4. 일곡(유인호) 선생 마이크 잡다

5. 김재준 목사 마이크 잡다

6. 강원룡 목사 마이크 잡다

7. 스코필드 박사 마이크 잡다

8. 서인주 도사 마이크 잡다

9. 이지 스톤 마이크 잡다

10. 땅 속 운동권 마이크 잡다

내가 이승에서 60년 전생을 살고 저승에서 한 갑자 넘어 지내다 다시 이승으로 환생한 소회를 적으려니 감회가 벅차다. 1959년 7월 31일 나의 사형집행 직전 내가 청한 목사의 성경 구절 낭독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의 죽을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내려서 놓아라 한데….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를 새기며 예수의 부활과 같이 의가 부활하고 내가 부활할 것을 믿었다.

내 재심이 기각되자 딸 호정이 이화여전 영문과 은사 박마리아에게 직접 올린 탄원서가 그 이튿날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는 슬픈 이야기. 그 당사자 이기붕 일족이 비명에 간 인생사를 저승에서 접하니 어두운 감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 많은 일이 벌어지고 많은 생각을 해왔지만, 20세기를 살았던 내가 21세기에 환생해서 이 시대를 어떻게 관전하며 그간의 소회를 밝힐 기회를 잡으니 목이 메어 어떤 이야기도 잘 나오지 않는다.

3·1운동 때 처음 1년 옥고를 치렀다. 유도로 매치는 왜놈 형사가 그 정도로 팥죽이 되었으면 아픈 흉내라도 내어야 하지 않나 해도 나는 굴복하기 싫었다. 이후 나는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중앙대학 전문부를 이수하며, 당시 일본사상계를 풍미하던 무정부주의 생디칼니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접촉하고 탐독했다. 조선공산당 만주분국장을 맡았다가 러시아 당시 쏘비에트 동방노력자대학에 들어가 지도자 양성 코스를 밟기도 했다.

귀환 시에 상해에 체류하며 코민테른 극동지부장을 맡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6년을 복역하며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혹한을 견뎌야 했다. 언필칭 모범수로 지내며 신구약을 여러 번 통독했다. 석방 이후에는 요시찰 인물로 긴 유폐 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해방을 맞고 인천지역에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이후 수립된 정부에 참여하자 여러 정치적 억측이 뒤따랐으나 오직 실사구시 이용후생 경세치용이 현대정치의 기본이라 생각했다.

나는 제헌헌법 기초위원으로 참여해 균등경제 농지개혁에 역점을 두었다. 경자유전의 원칙을 관철하기 위해 진력했으나 여러 음해로 미흡한 유상몰수 유상분배에 그치고 만다. 동족상잔의 참화를 감내할 수 없는 민족의 명운 앞에서 나는 평화통일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대선에 나서기도 했다. 다시 평화통일과 균등복지를 공약으로 대선에 나서서 희대의 부정 투개표에도 2백만 표(25%)를 상회하는 득표를 얻었지만 당황망조한 이승만의 법살로 결국 처형당하게 된다.

▲죽산 조봉암 선생

▲3대 대통령선거 죽산 조봉암 출마 포스터 ⓒ죽산 조봉암 선생기념사업회

허나 내가 통일과 진보정치의 마지막 희생이 되어야 했을 것인데, 이후의 쿠데타 세력에 의해 수다한 애국자가 처형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살아 있으니 슬픈 일이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미소 패권경쟁과 남북 양 당사자 간의 멸공통일 적화통일이 으르렁대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민족공멸의 파멸을 막아야겠다는 충정으로 선언적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이후 내가 옳았다는 것이 실증되었으니 여한은 없다.

다만 북진통일 멸공통일이 사라졌다고 해서 통일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떻게 자주권과 민주주의를 신장시켜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가는 아직도 지난한 과제로 우리를 애타게 한다. 국가란 공동체는 민족을 토대로 했을 때 견실하게 커 갈 수 있음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다인종 국가인 미국은 기독교라는 종교적 힘으로 버텨왔으나 대소 불협화음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안가한 노동력이라도 후환을 경계했어야 했다.

그간도 통일 염원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다소 정략적인 흠이 없진 않았지만 1972년 7·4성명은 통일을 향한 전 민족의 비원을 담아냈다.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남북 간에 접촉이 있었고 드디어 2000년 6·15공동선언으로 민족 연합, 연방제가 논의되면서 통일의 꿈은 한껏 부풀었으나 어느 쪽도 국론통일을 못 보고 구호에 그쳤다. 2007년의 10·4선언도 남북 최고의결기구의 비준까지는 이르지 못해 쌍방에 실망만 안겼다.

남북불신의 골이 그만큼 깊은데다 우리 힘으로 국제역학 관계를 벗어나기란 지난함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이러고서야 언제 민족공영 경제공동체를 이룰지 암담할 뿐이다. 2018년 4·27 판문점선언에 이어 9월 평양선언이 나오는 등 괄목할만한 진척이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북미 간 긴장만 고조시키고 남북 간 정상 간에 전화 한 통도 못하는 실정이니 통일 논의는 장식품에 불과한가. 한미 간에도 의견이 엇갈리니 실로 남북화해 협력은 더 안 되는 것 아닌가,

점점 통일 논의는 민중들에게 절망만 안겨주다 단념으로 정착되는 현실이며, 특히 젊은 세대들의 통일 열기는 냉소로 식어가는 형편임을 지울 수 없다. 싱가포르에서 떠오른 희망 새가 하노이에서 고꾸라지니, 과연 당국자들이 우리를 둘러싼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점치고 있는지 실망만 거듭될 뿐이다. 선무당 사람 잡는다더니 모두 어느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다고 해야 옳다. 무겁고 어두운 심경이다.

휴전 70년인데 종전선언과 평화 협정이 무에 그리 어렵고 새로 걸림돌이 자꾸 생긴단 말인가. 한반도 전면비핵화를 지렛대로 하는 좀 더 과감한 행보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숫제 한 백 년을 넘겨볼까 하는 체념이 스멀거림을 참을 수 없는 형국이다. 민중의 각성에 따라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다고 낙관해 보는 게 겨우다. 아니 전부다. 그러나 어떻게 통일을 향한 민중의 열기를 고양할 것인가에 이르면 다시 무거운 심경에 빠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미 민주당·공화당 정권이 어떻고 해봤자 밤낮 그 타령이요 비싼 돈 써가며 수군수군 허질러 다니며 잘난 체 사진 찍어봤자 이제는 기대하는 국민도 점점 줄어든다, 자꾸 전면전 국지전 해가면서 통일을 오히려 위험시하기도 하지만, 북이 핵을 가지고 있는 한 전쟁은 불가능하단 게 상식이다. 그냥 복지사회 그 한 차원 높은 민족공동체라야 하니 민족이 바탕에 깔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민족이 더 소중한 근간이 되고 그리하여 통일이라 하면 안 될까.

그리하여 그냥 우리끼리 평화협정 상호교류 내 걸고 막무가내 교섭은 안 되는가. 안 그러려면 못 그러려면 통일 꺼내지도 말고 주변 정세에 맡기는 게 차라리 속 편할 셈이다. 바이든 정권이 북한 호칭을 North Korea에서 DPRK로 바꾼다고 희망을 가질 것이 아니라, 미국 방송에서 말끝마다 S. KOREA가 어떻고 휴전선이 어쩌고 설레발 떠는 것은 어떤가. 국면이 자꾸 군사적 장에서 정치 외교의 장으로 넘나드니 차라리 우리의 관심을 놓는 게 어떨까이다.

월남은 공산화 무력통일, 독일은 자본주의 흡수통일, 남북예멘은 정치 통합에서 분열과 재통합을 반복한다. 이질적 남북체제의 오랜 고착화, 다른 운영, 다른 생활관행으로 인한 간극의 심화로 통일의 절실성이 많이 둔화하고, 신자유주의 개인주의의 편만으로 통일 무관심 통일 불필요론이 거익 심화되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민족 없는 복지공동체는 연목구어일 뿐인데도. 지구상 특유한 5천 년의 단일민족 역사. 그 풍만한 자산은 버려지고 마는가.

나아가 유라시아와 태평양의 관문인 한반도의 분단은 세계인에게 지구 동맥경화의 병리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통일은 관념적 염원을 넘어 당위론적 존재론적 최고 가치로 모든 민족 구성원의 합의가 쉽게 도출되는 텃밭인 셈이다. 문제는 상호신뢰와 역지사지, 구동존이, 화이부동의 금도와 도량의 부족에 있다. 아무리 정권이 소속 정당의 정치적 이해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나 통일문제는 정권 수준을 넘어선 민족공동제의 존립 기반임을 명심해야 할 것 아닌가.

다만 남북관계의 가중치 인식과 이해관계의 온도 차로 통일에 대한 여론이 분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의 단합된 힘이 발휘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면 대중의 역할은 상상외로 증폭될 것이다. 그 촛불혁명 민주주의 전진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을 우리는 목도했다. 정권이 책무와 결기로서 자존자결의 행보를 명확히 하면 못 걷어 낼 장애가 있겠는가. 아킬레스건으로 되는 대미 관계도 훨씬 자율성과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주동적 상수로 자리매김할 통일한반도는 통일독일을 능가하는 선망의 강대국으로 비상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1994년 제네바 핵 협정 체결로 북미 관계가 타결되리라는 전망 하에 대북 투자의 국제적 경쟁이 가동되고 일본통신성 주도 연구프로젝트로 당시 향후 10년간 6천억 달러 이상의 대북 투자를 입안했다 하지 않는가. 그것은 미국 석유메이저자본의 독자적 대중 진출에서 소외된 일본재계의 통한회복책략과 관련된다는 판단도 있는 터이다.

통일 방안과 방향은 이미 정부 민간 상호 간에 여러 번 합의되고 선언된 바 있다. 문제는 그 결의와 노력과 이행 속도다. 개별적 이해를 넘어 대동공영의 대의를 좇아 우리 내부의 견해 차이와 남북 간 간극을 현실로 인정 이해하고, 공동선 공동이익의 공통분모 최대공약수를 찾아 연방 연합의 단계적 이행을 진척시키면 안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통일을 앞당기고 그 논의를 활발히 부채질하려면 급선무가 국가보안법 철폐임을 제2의 유언으로 남기고 싶다.

이제 통일 외에 또 다른 나의 ‘수탈 없는 대중경제’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임금만이 경쟁력이었다. 별다른 자원도 없고 기술도 빈약했던 개발경제 초기 노임만이 경쟁력의 원천이었다. 농촌과잉노동력, 근면한 청소년들의 피와 땀이었다. 눈치 빠른 기업인들의 왕성한 사업 의욕도 그 몫을 다 해 오늘의 산업화를 이루었지만 이에 따른 빈곤 노동자의 양산과 빈부 양극화는 어느 지경인가. 그 자손들의 전망이라도 밝은가. 수탈 없는 대중경제란 그런 게 아니었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산업 금융은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게 국제화되어 있고 노동자가 저임에서 벗어날 날은 쉽게 오지 않을 듯하다. 비대해진 대외지향적 경제 규모에 비해 노동자의 설 땅은 점점 비좁아만 간다. 미국에 의존하여 선도적으로 중진국에 진입했던 남미가 왜 저 지경인가. 오랜 부정부패 독재 자본도피의 말로 아닌가. 물량성장이란 대단한 게 아니다. 어설픈 눈에는 경탄할 정도지만 내용을 따져보면 의외의 복병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많은 전문가가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의연 세계 최장 노동시간, 월 100명 가까운 재해사망, 일 50명에 이르는 염세자살. 비정규직 1,000만 시대. 다 뭣들 하고 있는지 안타깝다. 자가 소유자 반절, 전근대적 임대료와 소작료가 뭔 차인가. 경자유전이라 했지만 이젠 주민유택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살지 않는 집은 매매를 유도하고 주택채권을 발행해서 정부가 매입 실거주자에게 분양하면 어떤가. 민생혁파와 평화통일은 동전의 양면임을 호소한다.

그날

-경림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녘길에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이름은 모른다 달도

뜨지 않는 어두운 그날

님은 가도

-웅봉

오호, 님이시여!

그렇게도 쉽게 이슬이라시니

어떻게 이 몸 홀로 살으오리까

오랫동안 비바람에 굳건하시더니

이제 이렇게도 비극이시렵니까

오호, 님이시여!

처음 뵈올 때 믿음직한 넓은 품

모든 희망을 걸었습니다

설마 하던 생각 알뜰히 여기시지 않고

너무도 허전히 가신단 말입니까

오호, 님이시여!

큰 나무 어이 바람 안타리까마는

위하여 싸우시던 못난이 손에

이렇게도 허전히 가시다니

날뛰는 방자 꼴 어이 보리이까

오호, 님이시여!

슬어야 해도 오지 못 할 님 되셨음에

피우려던 진달래 애처로이 버리시고

가시며 외치신 말씀 쟁쟁하온데

어이 괴로운 눈 감으셨나이까

님의 뿌린 피 거름 되어

피우시려던 진달래 꼭 필 것입니다

-1959. 07. 31.

오작교

-웅봉

金風을 簫瑟히 곡하여

蟋蟀의 울음

저 壁을 깎누나

때는 七月이라 하늘은 七夕인제

아 잃어진

내 小女여

-196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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