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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특집] 예관 신규식 선생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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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특집] 예관 신규식 선생을 다시 생각한다

충북 청주가 낳은 독립운동가·선각자…교육·독립 구국 활동에 헌신

▲예관 신규식 선생. ⓒ신규식선생유족회(신환우)

독립운동가 가운데 충북 출신 예관 신규식(1880~1922) 선생만큼 덜 알려진 인물도 없다. 예관 선생은 혼미했던 한반도의 근대사에서 교육자·독립운동가·외교관 등으로 불꽃처럼 살다 갔다. 최근 선생을 기억하고 추모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고 있지만 제대로 된 업적을 알기 위한 노력은 부족해 보인다. 그동안 발표된 학계 자료와 문중 후손을 통해 선생이 민족에 바친 노력을 따라가 봤다. <편집자 주>

예관 신규식의 생애

예관 선생은 1880년 충북 문의군 동면 계산리에서 태어나 1922년 43세의 나이로 중국 상해에서 순국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1896년 아관파천으로 알려진 고종 황제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으로 혼란해진 조선의 상황을 겪으면서 예관은 1990년 9월 육군 무관학교에 입학한 뒤 1902년 7월 6일 보병 참위로 임관된다. 이후 1907년 일제에 의한 군대해산으로 국운이 쇠퇴하자 고령신씨 문중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에 매진한다. 

예관 선생은 1908년 5월 근대식 교육을 지향하는 영천학계를 결성해 이미 고향에 설립한 문동학원(1901)·덕남사숙(1903)·산동학당 등을 중심으로 근대화 교육에 힘쓴다. 이어 1909년 신형우가 청주에 청동학교, 신승구가 문의에 문동학교를 설립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탄이 일어나자 예관은 음독자살을 시도한다. 가까스로 발견돼 목숨을 건진 예관은 상해로 건너가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여하면서 중국 혁명가들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예관은 이름을 신정으로 바꾸고 중국 혁명 주도단체인 ‘중국동맹회’에 가입한 뒤 1911년 10월 신해혁명에 참여한다. 신해혁명 후 손문을 비롯한 중국의 많은 공화제 지지 혁명가들과 교우한다.

예관은 이들과의 교우를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 마련 필요성을 느끼고, 상해로 몰려드는 독립운동가들을 결집한다. 동제사는 그러한 필요성에 의해 조직됐다. 1912년 5월 20일 예관은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홍명희 문일평 신건식 조성환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결성했다. 동제사란 위험에 맞서 한마음으로 어려움을 건너는 모임이라는 뜻이다. 독립운동을 위해 한뜻으로 모인다는 의미에 가깝다. 1913년 12월 7일에는 상해 프랑스 조계내 명덕리에 박달학원도 설립했다. 청년 교육이 목적이었다.

독립전쟁론도 주창했다. 1915년 3월에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를 예상해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각 지역에 따라 민주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임시정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들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해 독립운동의 역량을 한데 모을 필요성도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11월 3일 예관은 법무총장에 임명됐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분열과 중국 혁명 과정에서의 반란 사건은 예관을 병석으로 내몰았고, 결국 단식 25일만인 1922년 9월 25일 숨을 거뒀다.

“교육이 구국의 길이다”

예관은 쇠퇴한 국운을 되살리는 길을 교육에서 찾았다. 1913년 예관은 독립운동 기반 확대와 조직력 강화를 위해 중국 혁명가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 청년들을 중국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들 가운데 신채호와 김규식은 예관의 집에 기거하며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많은 청년이 예관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1913년 12월 박달학원을 개설했다. 주로 중국과 유럽과 미주 유학을 위한 예비교육을 목적으로 했다. 과목은 영어 중국어 지리 역사 수학 등이었고 기간은 1년 6개월이었다. 선생은 중국어 교사인 조성환을 비롯해 박은식 신채호 홍명희 문일평 조소앙 등이 담당했다. 이곳에서는 3기에 걸쳐 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무예를 중시한 예관은 이곳에서 군사훈련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교육을 위해서 이곳 출신 학생을 보정군관학교, 천진군수학교, 남경해군학교, 호북강무당, 운남군수학교 등에 보내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

이에 앞서 1912년에는 동제사를 조직했다. 동제사는 비밀조직으로 1913년 7월 28일부터 8월 13일까지 남경에서 동제사총회를 개최하는 등 각 지부의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중국 내에서 조선인들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동제사의 주요 인사로는 이사장인 예관 외에 총재 박은식, 홍명희, 문일평, 박찬익, 조성환, 농죽, 김용호, 신철, 신무, 민제호, 기감, 정환범, 김용준, 민충식, 윤보선, 이찬영, 김영무, 이광, 신우창, 한진산, 김정, 김덕, 변영만, 민필호, 김규식, 신석우, 여운형, 선우혁, 서병호, 장건상, 정원택 등이 참여했다. 동제사는 상해본부를 통해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던 독립운동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핵심 단체 역할을 했다. 조선 독립운동단체의 효시가 된 동제사는 중국과의 협력을 위해 신아동제사도 결성해 양국 간 협조 체제를 이끌기도 했다. 여기에 참여한 중국 혁명가는 송교인, 진기미, 호한민, 요중개, 추노, 대계도, 진과부, 서겸, 장부천, 오철성, 은여려, 장계란, 호림, 백문위, 여천민, 당노원, 당소의, 황개민, 양춘시, 장정강 등이었다.

“국내로 진격하자”

무관 출신인 예관은 무력을 길러 국내로 진격하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예관의 이러한 의지를 신한혁명당 결성에서 찾을 수 있다. 1914년 말쯤 예관은 박은식, 유동열, 성낙형, 이춘일, 유홍열, 이동휘, 이동춘 등과 비밀결사를 결의하고, 1915년 3월 이상설 등과 상해에서 조직과 임원을 선출해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본부와 지부로 나눠 본부에는 재정부와 외교부 교통부 등을 두고, 지부는 중국과 국내 여러 곳에 주무자를 뒀다. 전쟁 수행을 위한 군비 조달을 위해 중국과 중한의방조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신한혁명당은 이러한 무장부대를 근거로 국내 진공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무산됐다. 이후 예관은 박은식과 함께 대동보국단을 조직했다. 이후 ‘대동단결선언’을 선포하고, 독립운동계에서 공화주의적 노선이 이념으로 정립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든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사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특히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이론적 기틀을 만들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투쟁하자”

예관은 신한혁명당과 대동단결선언을 추진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전부터 구상해오던 임시정부 조직을 구성했다. 여기에는 여운형, 선우혁, 한진교, 김철, 현순 등이 참여했다. 1919년 4월10일 1차 임시의정원회의가 개최되고 정식으로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조직됐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정해졌고,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선포했다. 국무총리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이어 같은 달 13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내각에는 외무총장 김규식, 내무총장 안창호, 군무총장 이동휘, 재무총장 최재형,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 강화대사 김규식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예관은 이들 명단에서 보이지 않았다. 당시 예관은 신경쇠약증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소련과 국내에서도 다양한 임시정부가 설립됐고 후일 이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됐다. 예관은 1919년 11월3일 법무총장에 임명됐다.

“별이 지다”

예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수립 후 다양한 이견으로 분열을 거듭했다. 이러한 와중에 예관은 손문 정권과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손문 정권은 북벌계획이 미진해 도움을 줄 여력이 없음을 밝히고, 민주주의 이념 실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손문과의 회담에서 예관은 5개의 외교 조항을 전달했다. 이 문서에서 임시정부는 손문 정부에게 △손문 정부를 중국 정통 정부로 인정하고, 원수와 국권을 존중함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대한 학생의 중화민국 군교 수용 및 교육 △500만 원의 차관 승인 △조차지대를 허락해 독립군 양성 지원 등을 요청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격을 높이는 커다란 성과이며 임시정부가 본격적인 대일투장에 나서는 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다시 터진 임시정부 내분과 국제정치 무대에서 일본의 득세, 손문 혁명정부 내 진형명의 혜주 반란 등이 예관을 병석에 눕게 만들었다. 예관은 그토록 고대하던 독립을 생전에 보지도 못하고 1922년 9월25일 생을 마감했다. 그는 상해 ‘홍교만국공묘’에 안치됐다.

신환우 독립유공자 유족 대한민국건국회 동제사 회장 “예관 선생의 서거에 대한 베일이 벗겨지면 임시정부수립 및 독립투쟁의 역사도 새로 정립돼야한다”

예관 선생의 후손인 신환우(58) ‘독립유공자 유족 대한민국건국회 동제사’ 회장은 “예관 선생은 베일에 싸인 독립투사다. 예관 선생의 서거후 손문은 사흘 밤낮을 통곡했다고 한다. 또한, 헌시도 지었다. 선생의 서거에 대한 베일이 벗겨지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독립투쟁의 역사가 새로 정립돼야 할 것이다. 북한 정통성도 새롭게 조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 초기 역사에서 공화주의 혁명가는 예관 선생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9년부터 1921년 이후에는 공화주의와 공산당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등장한다. 상당수는 동제사와 예관 선생 휘하에 있었던 인물들"이라고 밝혔다.

이어 “현재 예관 선생은 족보에만 올라 있지 호적도 없는 상태다. 국적 회복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적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가 국적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고:이 기사의 자료는 지난해 12월 열린 동제사 박달학원 재조명 학술대회 ‘예관 신규식의 동제사 활동 평가’, 중국 연변대학교 경제연구소 안치섭의 연구발표를 요약 인용했음. 발표자는 ‘조선독립운동’1·2, 원서방; 추헌수 ‘한국독립운동사(자료)’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4·8; 오세창 ‘만국공묘에 잠든 한국혼-신규식’, 신승하 ‘예관 신규식과 중국혁명당인과의 관련 외 9편을 참고문헌으로 했다고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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