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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주년 3.1절] 전북 만세운동의 불쏘시개 '군산 3.5만세시위' 함성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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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주년 3.1절] 전북 만세운동의 불쏘시개 '군산 3.5만세시위' 함성 속으로

ⓒ이하 군산시, 국가보훈처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독립만세가가 울려 퍼진 곳은 바로 전북 군산이다.

군산의 3.5 만세시위는 영명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이 계획한 것으로 군산 민중들의 참여 이후 전라북도 곳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의 불쏘시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천도교계에서도 군산 옥구군지부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을, 기독교계와 연합헤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운동이 계획되기도 했다. 이처럼 '종교·교육·노동계'가 한데 뭉쳐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전개한 군산의 3.1운동은 전민족적, 전민중적 봉기라는 3.1운동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17년에 군산청년야학이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민족교육을 위한 많은 학교들이 설립된 가운데 이중 하나가 미국 남장로교 계열의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였다. 

1896년 4월,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과 드루(Alessandro D. Drew, 유대모)라는 두 명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군산에 교회를 짓고 남장로교 선교를 시작했고, 1900년 하나의 선교 지역에 교회와 병원, 학교를 모두 갖춰 전도 효과를 극대화하기로 결정한 남장로교의 제9차 연례회의에 따라 군산에도 구암교회, 군산예수병원 그리고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가 설립됐다.

◆ 군산 3.5 만세시위를 주도한 교사들 – 이두열, 고석주



군산의 3.5 만세시위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전을 다니던 김병수로부터 시작됐다. 1919년 2월 26일 김병수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으로부터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일으켜달라는 부탁과 함께 독립선언서 200장을 전달받은 뒤 모교인 영명학교로 향해 스승인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를 찾아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교사들을 소개받았다.

함경남도 영흥 출신인 이두열과 전북 옥구 출신인 고석주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이두열은 영명학교 교사, 고석주는 구암교회 부속 여학교 교사로 두 사람은 같은 교사였던 박연세, 김수영 등과 함께 3월 6일 군산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이두열과 고석주, 두 사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독립선언서 인쇄 작업. 그러나 영명학교에서 만세 시위가 준비된다는 첩보를 들은 일제 경찰이 들이닥치면서 준비하던 독립선언서가 발각됐고, 이두열과 고석주를 비롯한 교사들과 학생들은 체포됐다.



체포된 이두열은 1919년 4월 30일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했고, 고석주도 같은 재판에서 같은 죄목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고석주는 출옥한 이후에도 민족운동에 투신했고, 충남 서천에 교회를 개척해 계몽운동과 농촌운동에 힘썼다.

◆ 군산 만세시위를 지원하고 해외에 알린 영명학교 교장 '윌리엄 린튼'의 증언

"3월 1일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폭력이나 무질서는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 봉기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감옥은 한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있었다.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총검에 짓밟혔으나 누구도 (폭력적) 저항을 하지 않았다"



이 증언은 린튼이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 지역 신문인 애틀란타 저널 기고문이다.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Atlantian tells how Koreans are seeking liberty)'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상황을 기고한 것. 이후에도 린튼은 계속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주장했다.

◆ 식민지 교육을 불태운 노동자 김수남


김수남은 동료였던 이남률과 함께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우기 위한 계획을 논의한 뒤 이남률은 신분을 속이고 군산부 전주통의 신림약국에 가서 은밀히 알코올을, 김수남은 장재동에서 불쏘시개로 사용할 솜을 구매했다. 3월 23일 밤 11시에 다시 모인 두 사람은 인기척이 없는 학교로 숨어들어 학교 건물 동남쪽 출입구에서 솜에 알콜을 적신 다음, 성냥으로 불을 지폈다. 방화 이후에 일제 경찰에 붙잡힌 김수남은 1919년 5월 2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방화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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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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