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머리를 깎다
"이거 입어봐라."
한산스님은 병삼, 아니 현준에게 승복을 하나 준 뒤 말했다. 동자승을 위한 작은 승복이 있었는지 옷이 그런대로 맞았다.
"여기 바닥에 앉아라."
밖으로 나가자 한산스님 옆에 서있던 주지 서동월스님이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시키는 대로 바닥에 앉자 젊은 스님이 큰 칼로 현준의 머리카락을 밀기 시작했다.
"나무석가무니불."
"나무관세움보살."
한산과 서동월은 옆에서 불경을 외웠다.
병삼이 스님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시대에 의해 강제된 스님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한산은 병삼이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머리를 깎아야 하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팠다. 이정 선생님은 병삼의 머리를 깎인 자신의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이 같은 반동의 세월이 얼마나 계속될 것인지, 가슴이 답답했다.
유일하게 믿을 사람인 한산스님이 살기 위해서는 머리를 깎아야 한다고 말했고 스님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머리에 떨어지는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 현준은 자신도 모르게 한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알아볼 것이 있어 다녀올 테니, 주지스님 말 잘 듣고 있어라."
한산스님이 떠나자 현준은 또 다시 버려졌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럴수록 그는 불안감을 잊기 위해 넓은 절의 마당을 쓰는 등 열심히 잡일을 했다. 특히 오랜 역사를 증언하는 중후한 각황전 앞을 쓸고 있으면, 그 이유는 모르지만, 마음이 너무 편해졌다.
"혜화동과 예지동에서 몇 번 본 이현상 아저씨 기억나지?"
"예."
"이현상 아저씨가 피아골 쪽에 있는 것 같다. 그쪽으로 떠나야겠다."
며칠 뒤 나타난 한산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스님, 골짜기가 너무 예쁘네요."
"그렇지? 특히 가을에는 단풍이 기가 막히지. 이 땅에서 가장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 여기란다."
"그렇겠네요."
골짜기를 걸어 올라가자 작은 절이 나타났다.
"다 왔다. 연곡사란다. 작지만, 상당히 의미가 있는 절이란다."
"의미가 무슨 말이지요?"
"아~ 뜻이라는 말이다. 임진왜란 때는 왜놈들이 불을 질렀고 조선조 말에는 의병운동의 본거지여서 왜놈들이 다시 불을 지른 곳이다. 왜놈들이 물러가자 미국과 친일파 놈들이 판을 치고 있고 아버지를 따르던 애국자들은 이 지리산으로 올라가고 있으니, 또 다시 이 절이 불타지나 않을지 걱정이다."(한산의 걱정처럼,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빨치산이 숨어들 수 있다는 이유로 이 절을 다시 불 질렀다. 이 절은 이후 중건되었고 입구에 피아골에서 죽어간 이들을 위한 추모비를 세웠다.)
연곡사에서 며칠 머문 뒤 한산스님은 현준을 데리고 본격적으로 지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지리산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다.
한참을 오르자 핑크색이 산을 뒤덮고 있었다. 5월이니 만큼 꽃들이 활짝 핀 것이다.
"스님, 너무 예뻐요."
"그렇지? 철쭉이라는 꽃이다. 그런데 잎에 독이 있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으면 안 된다. 그래서 개꽃이라고도 부른단다. 개나리는 먹어도 되지만 철쭉은 절대 안 된다. 버섯도 마찬가지다. 보기에 예쁜 버섯일수록 독이 든 못 먹는 버섯이란다. 살아가면서, 무엇이든 절대 겉으로 보기 좋은 것에 넘어가면 안 된다. 알았느냐?"
"예 스님."
중턱으로 올라가자 산이 깊어졌다.
"웬 놈들이냐?"
중턱에 다다르자 산사람들이 나타나 총을 겨누었다.
"이현상 동지를 찾는데요."
"아 스님!"
바로 뒤에 예지동에서 몇 번 본 낯익은 아저씨가 나타났다.
이현상이었다.
13. 부용산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저녁이면 빨치산들은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처음에 한 사람이 시작하면 한 사람씩 따라 부르기 시작해 어느 새 모두가 합창을 하고 있었다. 현준은 어린 나이에도 구슬픈 그 멜로디가 너무 좋아 자기도 모르게 이를 따라 부르게 됐다.
"아저씨, 이 노래가 무슨 노래지요?"
"부용산이라는 노래인데, 슬픈 사연이 있는 노래란다."
"슬픈 사연이요? 사연이 뭐에요?"
"현준이는 사연이라는 말을 아직 모르겠구나. 사연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저 아래 바닷가 쪽에 가면 벌교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자란 박기동이라는 학교 선생님이 있었단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고 글을 잘 쓰는 분인데 몇 년 전 여동생이 결혼을 하자마자 병이 나서 어린 나이에 죽었단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부용산 중턱에 동생을 묻고 와서 동생을 그리며 시를 썼는데 그 시가 바로 이 노래가사란다. 그런데 다음해 이 아저씨가 목포의 한 여자중학교로 전근을 갔는데 거기에서 한 음악 선생과 아주 친해졌단다. 이름이 뭐라더라…"
"안성현입니다."
다른 빨치산이 거들었다.
"맞다, 안성현이다. 현준아, 너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노래 알지?"
"알아요. 학교에서 배웠어요."
"안성현 선생님이 이 노래를 만든 뛰어난 음악 선생이란다. 박기동 선생님이 이 선생님과 친해졌는데 이번에는 안 선생이 아끼는 제자가 결핵이란 병으로 죽었단다. 그래서 제자를 그리며 박기동의 글에다가 만든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 이 노래를 알게 된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 노래를 학예회에 발표하게 해서 목포에서 유명해졌고 전라도 지역에 퍼졌단다."
"근데 왜 이 구슬픈 노래를 산에서 부르는 거지요?"
한산스님이 물었다.
"스님, 그 구슬픈 멜로디와 가사가 저희들 신세 같아서 부르고 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하도 이 노래를 우리가 산에서 부르니까 안 선생님이 학교에서 해직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고, 망할 놈들! 이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해직을 시키다니!!"(안성현은 결국 월북을 했고 박기동도 호주로 이민을 가야 했다. 부용산은 잊혀졌다가 원경, 빨치산 출신 등을 통해 70~80년대 운동권에 알려졌고 1997년 안치환이 정식으로 발표했다.)
마침 순찰을 돌고 돌아온 이현상이 나타났다.
"현준아, 이제 자야지."
"예."
현준은 이현상 아저씨를 따라 나섰다. 이현상 부대는 3~4명이 조를 짜서 아지트를 만들고 잠을 잤는데 현준은 이현상 아저씨, 한산스님과 동굴 속에서 잠을 잤다. 야외에서의 취침이 편할 리 없었지만, 다행히 5월말이라 겨울과 같은 혹독한 추위는 아니었다.
"현준아, 운동하자."
한산스님은 시간이 나면 현준에게 당수, 검도 등 무술훈련을 시켰다. 특히 한산은 검도가 뛰어났다. 반동과 폭력의 시대에 이정의 유일한 핏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기방어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준도 열심히 무술을 배웠다.
현준의 무술연습을 지켜보고 있자, 문득 한산의 머리에는 이 땅의 산사람들의 역사가 영화처럼 지나갔다. 한반도의 산사람은 조선조말 제국주의와 봉건제에 저항해서 일어난 동학군이 일본군과 관군, 그리고 양반군의 연합세력에 처참하게 짓밟힌 뒤 살아남은 일부가 산으로 들어간 데에 그 뿌리가 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지리산 등에 들어와서 숨어 살았다면 일제 말에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징용, 징병을 피해 젊은이들이 지리산 등으로 들어왔고 원시적이지만 일제에 저항해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해방 후 이들은 산에서 내려왔고 산사람들은 사라지게 된다.
이후 빨치산이라고 부르는 산사람들이 생겨난 것은 1946년 10월 미군정의 친일파 중용과 농지개혁 거부 등 식량정책 실패에 따른 식량난으로 대구민중이 봉기한 뒤이다(대구 10월항쟁). 봉기 주도세력들이 미군정과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산으로 올라와 ‘야산대’가 됐다.
별 존재감이 없었던 야산대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48년 10월 여수 14연대가 봉기 후 순천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다. 이들은 49년 겨울 식량과 추위를 견뎌내기 어려운 동계토벌작전에 대부분 목숨을 잃고 극소수만이 살아남았다. 한산스님과 현준이 만나 생활하고 있는 이현상 부대가 그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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