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R검사, mRNA, 코호트 격리, 노심용융, 세슘, 시버트, 배아줄기세포, 체세포핵이식, 버블제트.
우리가 코로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황우석 파동, 천안함 사건을 겪기 전에 이런 단어는 일상 용어가 아니었다. 2018년에 누군가 'mRNA가 뭔지 알아?'라고 물어봤다면 '모른다'고 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상식이다. 이들 사건의 공통점은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이 단어들은 우리 사회 전체가 이 사건들의 원인을 따라가고, 의문을 품고, 또 되풀이하지 않으려 공부해 왔던 흔적들이다.
지난 3일 대선 후보 TV토론회에서 나온 대화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다. 알이백(RE100·Renewable Energy 100%,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캠페인, 리 백이든, 알이 백이든, 알이 원 헌드러드든 읽는 방식은 자유다.)과 EU택소노미(EU Taxonomy, EU 녹색분류체계) 이야기다.
이재명 : EU 택소노미가 중요한 의제인데 원자력 관련 논란이 있다. 원전 전문가에 가깝게 원전을 주장하시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갈 건가?
(…)
윤석열 : EU 뭐란 걸 저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좀 가르쳐달라.
(…)
이재명 : 지금 그럼 RE100은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이십니까?
(…)
윤석열 : RE100이 뭐죠?
민주당은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느냐"고 비난하고, 국민의힘은 "모를 수도 있다"고 반박한다. 하나는 원전 문제고, 하나는 재생에너지 문제라 두 가지가 다르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탄소중립까지 가는 여정에서 에너지 문제는 원전, 재생에너지, 석탄에너지 산업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이런 지적까지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혹자는 일반에게도 생소한 단어와 개념을 불쑥 던진 이재명 후보를 두고 '엘리티즘'이라고 비난한다.
'알이백'과 'EU택소노미' 자체도 '그린 워싱'일 수 있다는 논쟁은 일단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TV토론회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의 두 가지 쟁점은 이거다. '모를 수도 있는가'라는 문제, 그리고 '엘리티즘'이라는 문제.
코로나 팬데믹처럼 기후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코로나와 달리 기후위기에 감염될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지금 닥치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일까. 당장 내일 북한이 미사일을 시험발사한다면 온갖 무기 체계의 재원과 가격에 관해 각종 '군사 엘리트' 느낌의 전문 용어가 무심하게 인터넷을 도배할 것이다. 홍준표 의원이 윤석열 후보에게 '작계 5015'를 묻고 윤 후보가 얼버무렸어도 아무도 홍 의원에게 '엘리티즘'이라느니 '밀리터리 매니아'라고 비판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이백과 EU택소노미라는 '어려운' 단어를 썼다고 이것이 '엘리티즘'으로 공격받을 줄은 사실 몰랐다.
이재명 후보가 윤석열 후보에게 질문하는 방식이 적절치 못했다고 할지언정, '알이백'이라는 단어 사용을 문제삼는다면, 기후위기 용어는 곧바로 '엘리티즘 프레임'에 갖힌다. 인류가 맞닥뜨린 기후위기 관련 용어가 '엘리티즘 프레임'에 갖히고, "대통령 될 사람이 RE100 이런거 모를 수도 있는거 아닌가(윤석열 후보)"라고 하는 태도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만, 모르는 걸 당당해하는 건 문제가 된다. 정치가 저잣거리로 내려와야 한다는 말은 맞지만, 정치 수준이 저잣거리 수준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말엔 동의할 수 없다. 토론회를 퀴즈쇼 처럼 활용하면 안된다는 지적도 맞지만, 모르는 걸 당당해하는 것은 더 문제라고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기후위기에 엘리티즘 프레임을 씌워 온 것은 주로 보수 엘리트들이다. 특히 미국에서 트럼프는 "기후변화는 미국의 사업을 방해하려는 중국의 사기극"이라고 주장하며 파리협정 탈퇴를 공언했고,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그들에게 'RE100'을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 하면 몰라도 되니까. 넷플릭스 영화 <돈룩업>의 한 장면같은 일이다. 몰라도 된다. 쳐다 보지 말라.
다행인 건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비판적 목소리도 나온다는 점이다. <헤럴드경제> 4일자 "RE100이 뭐죠? 尹 토론에 野 보좌진마저 '최악…유능한 보수 어디갔나'" 제목의 기사를 보자. 국회 보좌진이 참여하는 익명 SNS 계정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는 국민의힘 소속 보좌진이라고 밝힌 작성자는 "본인이 화두를 던져온 에너지 분야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RE100의 기본개념조차 알지 못해서 'RE100이 뭐죠?'라고 되묻는 등 함량 미달의 후보"라는 비판이 올라왔다고 한다. "(국민의힘 쪽에서) '소주 이즈백은 아는데 RE100은 뭐냐'는 황당한 반응부터 '나도 모른다'며 자신들의 무지함을 오히려 당당하게 드러냈다"라며 "무능과 무지를 드러낸 후보를 필사적으로 옹호하는 모습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광기 속에 탄식했다"는 말도 나왔다.
윤석열의 문제는 '무식하다는 것'이 아니다. 탈원전 폐기, 즉 원전 확대 등을 통해 2050년 탄소중립(이산화탄소 순 배출양 '제로')를 이루겠다는 그의 공약으로 미뤄봤을 때, 그에게 '에너지 정책의 청사진'이 있을 줄 알았다. 사실상 원전 확대에 제동을 걸고 있는 'EU택소노미'를 어떻게 헤쳐갈 것인지, 신재생 에너지 사용 캠페인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철학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말하자면 윤석열 후보는 그간 '에너지 전문가'인양, '그린 워싱'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기후 위기와 관련된 용어를 물었다고 그 태도를 엘리티즘으로 공격하는 행태가 기후위기와 관련된 토론을 더욱 위축시킬까 우려스럽다. 이런 분위기는 '트럼프 세력'과 같은 '반지성주의'의 먹잇감이 되기 쉬워진다. 그러다보면 '기후변화는 중국의 획책' 따위의 황당한 음모론이 비집고 들어서게 된다.
기후위기 해결이 '실현 불가능한 어떤 것'이고 '현실을 모르는 엘리트들의 어떤 것'이라고 치부되기 쉬운 시절이다. 이매뉴엘 월러스틴은 이상 세계를 뜻하는 유토피아에 학문을 의미하는 어미 istics'를 붙여 '유토피스틱스(Utopistics)'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는 저서 <유토피스틱스>에서 유토피스틱스를 "역사적 대안의 진지한 가치평가 행위고, 대안 가능한 역사적 시스템의 실질적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유토피아라고 하는, 실현 불가능한 천상의 세계를 지상으로 끌고 내려와 대안적이고 실질적인 낙원으로 갈 수 있는 방법들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후위기 문제와 원전 안전성 문제가 '뜬구름 잡는 어려운 이야기'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월러스틴은 "모든 것을 전과 같이 유지하려면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말을 인용한다.
오히려 이번 대선 TV 토론회 논란의 최대 수확은 알이백과 택소노미가(그것들이 '그린 워싱'이든 아니든) 드디어 시중 언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기후 위기와 관련해 대선주자들이 새로운 말들을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은 논쟁을 일으키길 바란다. '기후 위기 토론회'를 따로 열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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