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성향의 스티븐 브라이어 연방대법관이 27일(현지시간) 올해 6월말 은퇴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총 9명으로 구성된 미국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은 종신직이지만 도널드 트럼프 정부 기간 동안 3명의 대법관이 임명되면서 대법원의 정치 성향이 보수 절대 우위로 굳어지자 브라이어 대법관이 은퇴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고 보여진다. 올해 83세인 브라이어 대법관은 빌 클린턴 정부 때 임명돼 28년째 대법관직을 수행해왔다. 연방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한 뒤 상원에서 인사청문회와 표결을 거쳐 임명된다.
특히 트럼프 임기 막판이었던 2020년 9월 '진보'의 상징격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대법관이 사망한 뒤 후임 인선 과정이 그의 은퇴 결심에 중요하게 작용했다.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대법관 후임으로 강경 보수인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이 임명되면서 연방대법원은 보수 성향 대법관이 6명이 됐다. 이런 보수 절대 우위 구도로 인해 낙태권, 성소수자 권리, 총기 규제 등 대법원의 결정이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 이슈들이 과거로 회귀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연방대법원이 보수 절대 우위 구도가 만들어진 것은 공화당의 엄청난 꼼수 때문이기도 하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인 2016년 2월 대선을 9개월 앞둔 시점에서 대법원 공석이 생겼을 때, 오바마 대통령은 메릭 갈랜드 현 법무부 장관을 당시 대법관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공화당의 미치 매코넬 당시 상원 원내대표는 "유권자들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새 대통령이 후임을 임명해야 한다"는 이유로 인준 절차를 진행하지 않고 버텼다. 결국 이 공석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뒤 닐 고서치 대법관으로 채워졌다.
2020년 긴즈버그 대법관은 대선이 두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사망했지만, 공화당은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라는 태도로 4년 전 발언을 뒤집고 후임 인준을 초스피드로 진행했다.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은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인준 절차를 마쳤다. 당시 긴즈버그 대법관의 유언은 '내 후임은 새 대통령이 채우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지만, 트럼프와 공화당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진보진영에서는 브라이어 대법관이 진보 대법관을 후임으로 임명할 수 있을 때 은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브라이어 대법관이 이를 수용한 셈이다.
브라이어 대법관은 27일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은퇴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그는 대법관으로 일해온 것에 대해 "도전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었으며 특권이자 영광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브라이어 대법관에 대해 "이 나라가 분열된 시기에 재판부를 하나로 모으려는 가장 모범적인 공직자였다"고 치하했다.
바이든은 이어 그의 후임으로 대선 때 약속했던 것처럼 흑인 여성 대법관을 지명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그는 "비범한 자질, 자비심, 경험, 성실함을 갖춘 사람을 지명하겠다"며 "이 분은 미국 연방대법관으로 지명된 최초의 흑인 여성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바이든은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과 협의를 거쳐 '2월말 이전'에 지명자를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앞서 후보 지명 후 13일 만에 첫 청문회를 가졌던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과 유사하게 인준 청문회를 최대한 신속히 개최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최초 흑인 여성 대법관 후보로는 커탄지 브라운 잭슨 연방항소법원 판사, 레온드라 크루거 캘리포니아 대법원 대법관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도 후보군 중 한명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다만 브라이어 대법관 후임으로 진보 성향의 흑인 여성 대법관이 무사히 임명된다 하더라도 '보수 6 대 진보 3'이라는 보수 절대 우위 구도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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