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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말 걸기, 고통의 춤이 나를 살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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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말 걸기, 고통의 춤이 나를 살렸다 2

[탈춤과 나] 김명수의 탈과 춤 2

줄 위를 넘나드는 삶, 디아스포라

안성 청룡사에서 원경스님 주례로 황석영과 결혼하고 경기도 광주에서 살았다. 1988년 11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발기인대회가 있었다. 김명수도 춤 분과위원 발기인 중 한 명이다. 당시 민예총 사무총장 김용태, 현 예술의전당 사장 유인택이 민예총 실무 작업준비를 위해 연희동 집으로 자주 들락거렸다. 발기인대회 전에 각 분과 위원들 20여명이 우리 집에서 준비모임을 했는데, 밥상 5개를 붙여 음식을 차려 주었다. 귀국해서 김용태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런데 물 한 잔도 안주고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누구시더라?”라고 말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이 시작되고 말았다.

1989년 황석영이 방북하자 나는 바로 남산 안기부로 연행당했다. 부모님을 앞세워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차가 떠나자 아들 호섭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안기부 조사를 받는 옆방에 김용태도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나중에 1998년 내곡동 안기부의 조사 때 1989년 11월에 성신여대에서 열린 “참교육을 위한 민족문학의 밤” 행사에서 살풀이를 춘 것도 전국교직원노조와 얽어 심한 추궁을 했다. 하지만 이 행사는민족문학작가회의가 초청한 공연이었고, 연출은 문호근·주인석이 맡았다.

1990년 주한독일연방공화국 대사관 토마스 브리스닉 영사의 도움을 받아 베를린으로 향했다. 테겔 공항에서 가족 상봉을 했다. 만나고 얼마 후 황석영은 “가족과 함께 평양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말로 당신은 나를 못 믿는 건가?”라고 재차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내면의 벽에 부딪쳤다. 무작정 집을 나갔다 돌아와서 고민 끝에 혼자 가면 좋겠다고 거부했다. 북한에 한번 갔다 온줄 알았는데, 이미 세네 번 다녀왔다고 말했다. 감당할 수 없는 역사의 무게에 눌려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평양에 같이 가기만 하면 죽을 때까지 인생을 책임질게!”라며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다. 집에 손님이 온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전금철이었다. 결국 공허한 약속을 믿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한 달 만에 북한을 방문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줄 위를 넘나드는 삶이 시작되었다. 독일로 떠나기 몇 달 전 민족작가회의, 민예총 회원들과 함께 판문점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황석영 듣고 있냐!”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시간이 지나 판문점 북측 경계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평양무용단 무용수 4명과 나는 춤을 추고 있었다.

▲사진6. <서울 가는 길> 음악 윤이상 "가곡"(1972), 영상 이응노 "춤", 의상 김명숙, 출연:주재만, Benedetta Capanna, Bryon Carr, 정혜정, Bessie Schonberg, Dance Theater Workshop, 1997, 5 7-10 ⓒJack Vartoogian

1991년 김해춘 안무가 <계절의 노래> 시연회를 관람했다. 피바다가극단 단장이 김해춘 안무가와 함께 공동 창작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통일춤 <노동의 새벽>은 김해춘·김명수 공동안무, 박무준 작곡, 피바다가극단 무용수 15명이 출연한 남북합작의 작품이다. 김해춘은 최승희의 양아들로 피바다가극단 안무가이고 남북교류 공연 때 <쟁강춤> <손북춤> 등을 보여준 적이 있다. 피바다가극단 전속 교향악단이 연주를 하고 100여 명의 합창단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북한에서 처음 맨발로 춘 춤이고, 리허설 때는 평양음악무용대학 표기사들이 기록했다. 피바다 가극단 단장이 내가 명예안무가로 위촉되었다고 말했다. <노동의 새벽> 연습 중에 시인 박노해가 체포되는 장면을 초대소에서 TV로 지켜봤다. 남북문화교류 차원에서 작업을 했는데, 아직까지 볼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황해도 구월산도 둘러보고 장산곶에도 가보았다. 호섭이가 만화에서 본 장산곶매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다음 날 안내인이 새장에 장산곶매를 잡아 왔다. 평양동물원에 <호섭이매>라고 이름 지어 기증하고 가끔 보러 갔다. 은율 신천 봉산지역을 둘러보고 안내인에게 봉산탈춤이 보고 싶다고 했다. 예전에 살던 주민들이 거의 이주해서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 대신 1950년경에 촬영한 것 같은 봉산탈춤 16mm 필름 영상을 평양에서 볼 수 있었다. 흑백이고 탈춤 추는 장면과 사설하는 장면이 나오고 소리는 잘 안 들렸다. 야외에서 촬영됐고 5명 정도가 의자에 착석하고 있었고 김일성 주석 장면도 나온다.

북한에 머물고 있을 때 황해도 신천에서 백기완 선생의 누나를 만난 적도 있다. 어느 날 작가 최승칠이 자신도 이산가족인데, 장인이 임석재 선생이라고 이미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래서 ‘민속학자 임석재 선생 아니시냐. 얼마 전에 책도 쓰시고 살아계신다’고 말해 주었다. 며칠 후 임석재 선생 따님들이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때 그 집에서 맛있게 먹은 김치가 진짜 서울 김치맛 그대로여서 놀랐고, 한 눈에 봐도 임석재 선생을 보는 것 같이 닮아있었다. 나는 1981년 석관동 김금화 자택에서 열린 <만수대탁굿>에서 임석재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굿판을 보고 무서워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 등 뒤에서 임석재 선생이 시루떡을 주시면서 ‘잘 먹어야 공부도 하지’라며 격려해 주셨다.

김해춘 안무가하고 작업을 끝내고 황석영을 만났는데 “맡겨 놓은 여권을 찾아야 하고 먼저 나가 있으면 뒤따라 나가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호섭이 하고 둘이서만 먼저 베를린 집으로 돌아 왔다. 그 후 송두율 교수가 황석영이 북한에서 보낸 편지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미국에서 초청장이 올 것이니 가까운 시일 내에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추석 무렵 독일예술원 주최로 <세계문화의 집>에서 황석영 소설 낭독과 김명수 춤 공연을 했다.

▲사진7. 65th Anniversary Season, Jacob's Pillow Dance Festival, <Korean Shamanic Ritual Solos> Inside/ Out, 초청공연, 아들 황호섭(당시 9세) 찬조 출연, 1997, 8 9 ⓒ김명수

서울 가는 길, 베시 쉔베르그

1992년 12월 말경 독일을 떠나 뉴욕으로 왔다. 황석영은 <동아시아문화연구소>를 만들고 망명을 피하기 위해 인터뷰도 하고 영주권을 신청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주변 정리하고 귀국하라”고 하고는 1993년 4월 황석영이 한국으로 떠났다. 귀국 즉시 안기부에 연행되는 모습을 9시 뉴스에서 보고 알았다.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부소장 에드워드 베이커 교수가 전화로 “런던에 있는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세계본부가 <긴급 행동 촉구> 성명을 내고 양심수임을 천명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조만간에 우편으로 보낼거라”고 알려줬다. 국제펜클럽 본부 투옥작가위원회, 미국 펜클럽, 독일 펜클럽, 일본 펜클럽, 아시아워치, 독일예술원 등에서 오는 문건들이 긴 떡 뽑듯이 팩시밀리로 오기 시작했다. 작가황석영석방대책위원회가 “귀국하지 말고 뉴욕, 그 곳을 캠프로 석방 운동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황석영석방운동 행사 경비도 모두 지불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원고도 전부 전달했다. 그러나 책도 안 보내줘서 뉴욕 서점에서 사서 봤다.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으려고 학생 비자로 바꾸고 맨해튼에 있는 무용학교를 다니며, 고통의 춤이 시작됐다. 한편으로는 호섭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 오고 아이의 교육에도 주의가 필요했다. 그 때부터 10여개 단체를 상대로 성명서 번역, 단편소설 번역 등을 해서 각 단체에 보냈다. 1993년 전경자 교수에게 번역료를 지불하고 코넬대학 출판사(Cornell University East Asia Program)와 The Shadow of Arms를 계약해서 1994년에 책이 출판됐다.

내가 기획·제작했고 감옥에 있는 작가 황석영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출판했다. 문학평론가 권영민 교수가 “어떻게 출판하셨나, 한국문학번역원도 만들어지기 전인데…”라며 전화한 적도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를 재팬소사이어티에서 만나서 황석영 석방 요구서에 서명도 받고 작가 수잔 손탁 서명도 받았다. 황석영은 2000년 석방 예정이었고, 미국 이민법이 바뀌어 호섭이가 불법 체류자가 될 신세를 면하기 위해 영주권을 준비했다.

1997년 예술가 케이스로 영주권 추천서를 받기 위해, 베시 쉔베르그(1906~1997) DTW 주최 안무법 워크숍 인터뷰를 통과했다. <서울 가는 길> 음악 윤이상 “가곡(1972)”, 영상 이응노 “춤”, 의상 김명숙, 출연에는 주재만(뉴욕 컴플렉션 발레단 부예술감독), Benadetta Capanna, Bryon Carr, 정혜정 등이 작업했다. 이 작품은 1주일에 한번 만나 베시 선생에게 안무 과정을 보여 주고 같이 토론하며 석 달만에 완성했다. 그리고 “망명자의 폐허 그리고 재생”을 베시 쉔베르그 DTW 극장에서 5월에 공연을 했다. 그러나 공연 며칠 전 베시 선생이 돌아가셔서 추천서는 불발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존경하는 선생의 마지막 제자 중에 한 명이었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베시 선생의 삶을 떠올렸다.

미국 춤계에서는 매년 뉴욕에서 베시상을 제정해서 공연예술가들에게 수여하고 있다. 8월 제65회 “제이콥 필로우 댄스 페스티벌” 인사이드 아웃에 초청받았다. 호섭이가 직접 교장 선생님께 참가 허락을 받아냈고, 같은 반 친구의 부모인 Lynn Garafola(춤평론가)와 Eric Foner(역사학자) 부부의 도움을 받아 동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호섭이는 막간에 찬조출연 무대에도 올랐다. 연말에는 “1997 Dance Magazine Calendar” 사진작가 Beatriz Schiller가 찍은 내 춤 사진이 2월 캘린더에 실려서 영주권 신청에 도움이 된 것 같다. 1998년에 영주권 허가를 받고 2001년에 영주권 카드를 받았다. 뉴욕 링컨센터 공연예술공공도서관 댄스 컬렉션 큐레이터 Medeleine M.Nichols의 요청으로 제롬 로빈슨 댄스 컬렉션 국제 자문위원으로 일했다.

1999년 초 별안간 “앞으로 글만 쓰면서 시골에서 혼자 살고 싶다.”라는 글을 예고도 없이 팩시밀리로 보내왔다. 도대체 왜 나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에 같이 가자고 했을까? 이제 와서 황석영이 민낯을 드러내며 마치 여행을 다녀온 사람처럼 “별거 아니야.”라고 쉽게 말했다. 도대체 북한이 어디라고…. 텅 빈 마음 속 공허함에 아직도 벌떡 일어나 가쁜 숨을 몰아쉬기도 한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홀로 아리랑

2002년 8월 국제무용협회(CID-UNESCO) 주최로 <북한 무용계 현황과 남·북 협력 전망> 강연회를 예술의 전당 서예관 세미나실에서 했다. 주최 측에서 기자 간담회를 마련했는데, 기자들이 강연 내용을 묻기보다 황석영에 대한 질문을 했고 이를 계기로 이혼소송이 시작되었다. 그런 내게 2004년 <아리랑>공연을 위해 “김명수 후원회”가 생겨서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되었다.

▲사진8. The New York Times, Arts & Leisure, Dance, <인터뷰> By Sylviane Gold, Sunday, July 3, 2005 ⓒLois Greenfield

▲사진9. Newsday, Dance Review, <무용평> By Apollinaire Scherr, July 8, 2005 ⓒLois Greenfield

2005년 7월 <Arirang: Korean Ritual Solos> Dance Theater Workshop 극장에서 공연했다. 혼자서 90분 동안 퇴장 없이 마당극의 틀을 차용해 춤을 추고, 무대 위에 작은 방을 만들어 의상을 갈아입는 것까지 다 오픈해서 보여주었다. 아마도 데뷔 공연 이후 오랜만에 절박한 심정으로 몰입해서 춤을 춘 것 같았다. 다행히 극장 티켓도 매진됐다. “김명수의 춤에서는 그저 발을 내딛는 것조차 엄청난 기술을 필요로 한다. 마치 용암을 가로지르듯 다리를 앞으로 밀어내는 동안에 어깨와 머리가 울리면 바로 그 순간 인체는 정지되는가 하면 흔들린다.” 뉴욕 타임스 춤평론가 실비안느 골드 (인터뷰), “그녀는 정교한 손놀림을 통해 신에게 바쳐지듯 몸부림치는 요정이 되어있다. 또한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김명수가 직접 애처로운 아리랑을 부를 때였다.” 뉴욕타임스 춤평론가 클라우디아 라 로코(공연평), “이 여인은 마치 무인도에 갇혀 SOS 신호인 듯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의 시를 짓고 있는 듯 관객에게 아찔한 놀라움을 준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넘나들 뿐만 아니라, 그 둘의 차이를 없애는 한 여인의 예술을보고 있었다.”라는 뉴스데이 춤평론가 아폴리네어 셔(공연평)의 평가도 받았다. 그리고12월 THE SUNDAY STAR-LEDGER 춤평론가 로버트 존슨이 춤 부분 연말 결산(The Year in Arts/ 2005)에서 7월 Dance Theater Workshop에서 공연한 <Arirang>을 베스트 서프라이즈(BEST SURPRISE)로 선정했다. 제일 먼저 아버님 생각이 나 전화를 드렸다. “감옥에 면회 다니시며 고생을 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뉴욕타임스에서 나 보고 예술가래요! 곧 서울 가서 뵙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서울 도착한 날 아버님이 병원에 실려 가시고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결국 나는 망연자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뉴욕으로 돌아와서 생각하기를, 예술은 내면의 재객관화를 형상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6년 6월 The Duke on 42nd Street Theater에서 MODERN ECHOES OF THE ANCIENT <ARIRANG> 공연을 괘불 탱화를 무대 배경으로 설치해 다른 콘셉트로 아버님을 위한 추모 공연을 했다.

▲사진10. The New York Times, Weekend Arts Movies Performances, The Listings June 9-June 15, Dance <공연 소개> By Jennifer Dunning, Friday, June 9, 2006 ⓒLois Greenfield

나 개인에 관한 넋두리를 늘어놓기에 마음 속 깊이 거부감이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 오래된 흔적들을 뒤적뒤적거렸다. 상실의 고통이 점차 지나가면서 탈과 춤을 추던 추억들이 어렴풋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소중한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난 빈 집에서 투명인간처럼 서성거리며 홀로 평화의 춤을 추고 있다.

지금도 집으로 가기 위해 내 몸에 말 걸기를 한다.

고통의 춤이 나를 살렸다.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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