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국대사나 주한미군 사령관은 재임시에는 물론이고 퇴임 후에도 국내에서 융성한 대접을 받는다. 이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미국 언론보다 국내 언론에서 훨씬 비중있게 다뤄지는 것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해리 해리스 전 주한 미국대사의 발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1월 5일 워싱턴타임스 재단이 주최한 화상 세미나에서 "종전선언에 서명한 다음 날 과연 무엇이 바뀔지 자문해 봐야 한다"는 발언을 필두로 다양한 발언을 쏟아냈다. 국내의 대다수 언론은 이 발언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반면 구글 뉴스를 검색해보면, 외신의 보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해리스의 발언 가운데 가장 눈에 띤 대목은 정전협정 예찬론이다. 그는 "나는 항상 종전선언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정전협정이라고 불리며 수십 년간 잘 작동해왔다"며 정전협정을 두고 "훌륭하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해리스는 또 "북한을 대화 테이블에 앉게 하기 위해 제재를 완화하거나 합동 군사훈련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는다"면서 "그것은 이미 시도했지만 실패로 가는 확인된 길"이라고 말했다.
팩트부터 잘못된 것이 수두룩하지만, 해리스가 정전협정을 기반으로 한반도에서 현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은 분명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전체제의 핵심은 한미동맹과 군사력 강화에 의한 대북 억제에 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과 군비경쟁이 고조될수록 군산복합체의 수익도 늘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해리스가 한반도 현상 유지를 강조한 데에도 이러한 이해관계가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태평양사령부 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를 거쳐 작년 12월 중순에 미국의 주요 방위산업체인 L3Harris의 이사진으로 합류했다.
이 회사는 2020년에 미 국방부로부터 약 62억 달러의 계약을 수주하는 등 최근 몇 년 사이에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정치후원금도 대폭 늘리고 있다.
'회전문'을 타고 들어온 해리스에 대해 L3해리스의 최고경영자인 크리스토퍼 쿠바식은 "해리스의 지식과 경험은 우리의 글로벌 입지와 파트너십을 확장하는 데에 엄청난 자산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이 회사의 홈페이지를 보면 "L3해리스는 대한민국에 25년 넘게 국방 기술 및 해법을 제공해오면서 탄탄한 입지를 공고히 해왔다"며, 한국의 육해공군은 물론이고 경찰과 해경에도 다양한 "기술적 효용성을 제공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판매 물품과 서비스도 전자전에서 조종사 교육에 이르기까지 수십 가지이다.
한국은 미국의 대표적인 무기 수출 시장이자, 올해 국방비가 55조원에 달할 정도로 시장성도 날로 커지고 있다. 이런 한국이야말로 L3해리스가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시장이 아닐까? 태평양사령부 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해리스야말로 한국 시장을 확장하는 데에 더 없이 좋은 인물이기에 이 회사가 그를 영입한 것은 아닐까? 위에서 소개한 해리스의 발언은 이에 보답하기 위한 성격이 짙은 것은 아닐까?
국내 언론은 해리스의 발언을 일제히 보도하면서 '전 주한 미국대사'라는 직함을 달았다. 그러나 '현 L3해리스 이사'라는 점을 지적한 언론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주한 미국대사라는 직함은 그의 발언이 마치 상당한 권위가 있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지불식간에 국내 언론이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할 현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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