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의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헌법 개정은 국민의 위대한 승리였다.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후 7번의 대선에서 어김없이 지켜졌고, 민주화 이후 역대 정권들의 민심 이반에도 불구하고 최소정의적 접근의 민주주의는 공고화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쿠데타에 의한 군사정권 추방과 대통령 직선제에 집착한 온건 자유주의 세력과 유사 군부와의 타협은 노동과 인권의 보호, 경제적 강자와 약자의 격차 완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등 불평등과 경제정치적 권력 집중을 막는 장치 마련에 관심이 없었다.
노태우 정권 이후 모든 정권에서 예외 없이 사회적 갈등과 대립은 심화됐고 사회적 원심력은 증가했다. 보수 정권과 진보 정권을 막론하고 한국사회의 자산과 소득 불평등은 물론 저출산율과 자살율의 증가, 젠더와 세대 대결의 양상은 확대재생산 일로에 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문제는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발전이 과연 가능하겠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각 부문별로 문제의 성격과 양태는 다르지만 이러한 총론적 갈등의 기저에는 정치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시민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정치에 대한 문제의식에 여러 갈래가 있지만 한국정치의 승자독식 구조가 정치의 본령인 갈등의 조정과 타협, 협치, 권력분산에 의한 연대 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결선 없는 다수 대표제, 소선거구는 승자의 완승과 패자의 퇴장을 결과할 수밖에 없다. 지난 선거에 도입되리라고 예상됐던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준연동형이라는 해괴한 제도로 전락하고 꼼수 위성정당이라는 기상천외한 기형아를 탄생시켰다.
정치는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선이 역대 선거와 특별히 다른 점은 정치담론이 실종됐다는 점이다. 18대와 19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피상적으로나마 정치개혁과 대통령제의 권력집중 완화와 관련한 정치이슈를 제기하기라도 했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의 윤석열 후보에게서 정치담론을 찾을 수 없다. 현재의 승자독식 대통령제는 전임 대통령들의 불행으로 이어졌다.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과도한 권력집중으로 인한 양대 진영의 적대와 증오의 대결 정치가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번 대선은 양대 선거 진영의 선거대책위원회 구성 이슈, 상징적 이벤트와 검증되지 않은 인사들을 내세워 표를 얻으려는 얄팍한 정치공학, 상호비방과 비난, 음해와 가짜뉴스, 네거티브와 마타도어가 선거공간을 지배하는 구태정치 등으로 점철되고 있다. 선거정치가 증오와 적대를 재생산하고 갈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선거에 참여하는 인물과 집단들의 이익쟁취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면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국민의 대의기구로서의 입법부,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사법부, 입법·사법과 균형을 맞추는 행정부의 삼자가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입각하는 시스템이 대통령제다. 그러나 한국의 대통령제는 미국의 순수 대통령제와 달리 강한 의회를 보유하지 않는다. 사법부는 언제든지 행정부에 의해 휘둘릴 수 있는 구조다. 기본적인 대통령제의 얼개에서 벗어나 있고 내각제의 의회 중심 민주주의와는 한층 거리가 멀다. 이러한 변이 민주주의가 지금의 한국정치의 부패와 무능의 근본 원인이다.
행정부를 견제해야 할 입법부의 구성원이 갑자기 내각에 편입되어 행정부 일원으로 변신하는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기형적 동거, 양당제라는 명분으로 적대와 대립을 정당화하는 극한 진영정치, 국회, 청와대, 지방자치단체, 공기업을 전전하며 이권 카르텔에 기생하는 퇴행 정치 등이 한국정치의 특징 들이다.
90일 남은 대선에서 여타의 의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금의 권력구조를 공생이 가능하고 적대적 대결 구도를 청산 할 제도로 개혁할 수 있느냐의 의제를 던지는 일이다. 의회주의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순수 대통령제를 확립해 나가든가, 승자독식을 막는 연정과 다당제의 내각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증오와 진영에 기반한 정치는 끝내야 한다. 그러나 이재명, 윤석열 두 후보에게 이러한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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