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2018년 7월 5일 노회찬 20대 국회 정의당 원내대표는 JTBC 이슈 리뷰 토크쇼 <썰전> 276회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했다. 시청률(4.4%, 분당 시청률은 5.1%)이 상승세를 나타내며 동시간대 1위를 차지했다. 노회찬은 "'좌파 정책'으로 성공한 나라가 어느 나라냐"는 자유한국당 안상수 의원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사이다 발언'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부러워하는 나라들,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이런 나라들 다 좌파정책 많이 썼죠. 영국은요, 보수당조차도 필요한 때 국민의료보장제도와 같은 그런 좌파정책을 썼습니다. 지금 영국 보수당 총수인 메이 수상의 지난 총선 공약 가운데 하나가 다시 영국을 대학무상교육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안상수는 준비한 듯한 칼을 뽑아들더니 '2012년 대선 기간에 각 후보들의 대학등록금 정책에 대한 블라인드 테스트 실시 결과 당시 새누리당의 정책공약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러나 노회찬의 대답을 듣고서 말문이 막힌 안상수는 그냥 헛웃음으로 화답하고, 듣고 있던 박형준과 김구라는 폭소를 터뜨렸다.
"거기 당명이 쓰여 있으면 그렇게 안 됩니다! 왜냐면 안 지킬 걸 아니까!"
오늘부터 다룰 <part 3>의 기록 이야기는 '스칸디나비아 복지모델'이라고 불리는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 "사회의 공기까지 바꾼, 인류가 도달한 가장 선진적 수준의 북유럽 나라들"과의 만남에 대한 것이다.
노회찬과 구영식의 인터뷰를 정리한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비아북, 2014)를 넘기다 보면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야기 속에 "사회의 공기까지 바꾼, 인류가 도달한 가장 선진적 수준"의 나라들이 등장한다.
구영식 : 노 대표가 생각하는 진보의 가치를 가장 현실적으로 실현한 나라가 있나?
노회찬 : 노르웨이, 스웨덴 등 북유럽 나라들이 인류가 도달한 가장 선진적 수준의 나라들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으로 보면 룰라 대통령도 훌륭한 사람이고, 철학 등에서 굉장히 많은 유사성을 느끼고 있다. 당으로 보면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도 진보정당들이 집권한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회의 공기까지 바꾼 경우는 북유럽 나라들인 것 같다. 한 훌륭한 사람이 대통령을 8년 했다거나 진보정당이 몇 번 집권한 것 이상으로 사회 자체가 큰 변화를 겪어서 사회 전체가 진보적인 사회로 나아간 곳은 북유럽 정도라는 얘기다. 진보적 가치관이 그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나 지배적 가치관이 되는 '굉장히' 진보된 사회에까지 이른 현실국가로는 북유럽을 꼽을 수밖에 없다.
구영식 : 북유럽이 진보의 가치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노회찬 : 진보정당의 오랜 집권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 배경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오랜 집권이라고 본다. 좋았기 때문에 다시 집권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또한 그 정책이 오랫동안 관철되는 속에서 대단히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고, 그것이 지배적 가치로 정착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노회찬의 길동무 박상훈 정치발전소 교장(정치학 박사)은 <(개정판) 정치의 발견: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폴리테이아, 2011)에 이렇게 적고 있다. 노회찬과의 이러저런 만남의 자리에서 박상훈이 특히 강조했던 내용 몇 가지를 골라봤다.
"당연히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다만 정책의 우선순위와 방향을 약간만 바꾸더라도 부조리한 현실을 개선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정치가 인간 사회의 미래를 모두 책임질 수는 없다. 그러나 예산의 일부만이라도 잘 쓰인다면, 결핍된 조건을 가진 많은 아이들이 내일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도록 도와 줄 수는 있다."
"정치가 중요하다는 것은 정치가 모든 것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상황 내지 인간이 만든 사회문제를 개선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력한 수단이자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집권할 수 있을 때, 사회적 약자 집단도 무시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온정에 의존하지 않는 주체적 시민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도 커진다."
"현재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는 110개 정도 된다. 이들 가운데 빈곤 인구의 비율이 낮고 계층 간 불평등 정도도 낮으며 비정규직의 규모도 적은 나라는 어디일까? (…)
요컨대 어떤 유형의 민주주의가 되어야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까?"
"국가 간 민주주의의 성취를 통계적으로 조사 연구한 성과들이 몇 개 있다. 그에 따르면, 가장 설득력 있는 결론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진보정당의 경쟁력(집권 기간, 득표 경쟁력 등)이 큰 나라일수록, 다른 하나는 (보통 노조 조직률, 노사협약 적용률, 노조의 중앙 집중화 정도로 평가하는) 노동조합의 힘이 강할수록 좋은 지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동을 배제하는 정도가 덜할수록 그리고 진보적인 정당들도 상당한 득표를 하고 집권의 전망도 있는 나라들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박상훈이 말한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사회"는 어떤 나라일까? 무엇보다도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이 제 역할을 해온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 북유럽 나라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설국열차>와 '남궁민수의 세계' : "오히려 스웨덴이나 핀란드, 노르웨이가 새로운 세계까지 열어가고 있다고 본다"
2019년 노회찬의 1주기를 앞두고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는 그를 불러냈다.
"그의 1주기가 빨리도 왔다.
(…)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한 것이다.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2013년'이 소환됐다. 박근혜 대통령 임기 첫해였던 그해 봉준호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설국열차>가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했다(9월).
어느 평론가는 이 영화가 '역사의 동력은 바깥을 향한 무모한 열정임을 역설'했다고 평했다. 그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 등 거의 평생을 '바깥을 향한 무모한 열정'으로 살아왔던 이였다." (구영식, 「노회찬이 본 설국열차, 6년 전 미공개 인터뷰: [노회찬 1주기] '남궁민수의 세계'를 품었던 사람, 그를 기억하며」, <오마이뉴스>, 2019.7.25.)
구영식이 불러낸 '그'는 바로 노회찬이었다. 2013년 8월 28일 서울 시청 근처. 영화 <설국열차>의 관객 1000만 명 돌파를 코앞에 두고 구영식은 노회찬을 만났다. 구영식이 공개한, 노회찬과의 미공개 인터뷰 내용에는 '국가사회주의(러시아)', '혁명이냐 개량이냐' 등의 표현이 들어 있다. 좀 길지만 노회찬의 생각을 잘 엿볼 수 있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소개한다.
구영식 : <설국열차>를 본 소감은 어떤가.
노회찬 : 남궁민수는 계속 도는 열차 속에서 밖을 관찰한 결과 밖이 녹고 있었다. 즉 빙하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한 노선이다. 무력에 의존해 그 안에서 좀 더 나은 것을 추구하려는 개량노선과, 무력을 동원하지 않는 혁명노선이 재밌게 설정된 구도였다.
점진적으로 개선할 것인가? 아니면 판을 완전히 바꿔서 이 상황을 완전히 벗어날 것인가? 이런 문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개량이냐 혁명이냐'라는 대립구도와도 연결된다.
대개 보면 혁명은 무력을 동원하고 개량은 타협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싸우지 않으면, 즉 무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개량이 안되는 상황이다. (웃음) 그래서 그렇게 무력을 써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큰 비전이 없다. 그런 구도가 참 재밌었다.
구영식 : 저도 <설국열차>를 보고 '혁명이냐 개량이냐'라는 좀 진부한 화두를 떠올렸다. (웃음) 노 대표가 그 열차에 있었다면 어느 쪽에 섰을까?
노회찬 : 저는 남궁민수 노선이 맞다고 생각한다. 러시아는 혁명을 했지만 유토피아로 간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억압체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스웨덴이나 핀란드, 노르웨이가 인간성의 발현이나 민주주의 등의 측면에서 국가사회주의(러시아)가 도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까지 열어가고 있다고 본다. 물론 거기에도 자본주의의 여러 가지 모순이나 폐단이 있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도식으로 보면 '혁명이냐 개량이냐'로 보이지만, 국가사회주의가 혁명적 언사로 가득 차 있기는 했지만 별로 나은 세계를 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의 또 다른 형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개량으로 폄하되었던 노선들이 지금 더 혁명적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아닌가? 영화에서 소수가 지배하는 부당한 압제와 평등하지 못한 열차 속에서 싸우는 것 자체는 정당하지만, 그렇게 싸우고도 그 열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그 싸움에는 한계가 있다. 바퀴벌레 대신 다른 걸 먹는다거나, 물자를 좀 더 공평하게 배분하는 정도의 상황 개선은 있을지 몰라도, 계속 도는 열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남궁민수가 문을 열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 아닌가? 자본주의의 모순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정당한데, 어떤 노선과 방식으로 극복할 것인가?
그와 관련해 소비에트 방식은 좋은 대안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회조차도 가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북유럽) 노선에 더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구영식 : 저는 남궁민수의 대사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저게 하도 오래 닫혀 있으니까 이젠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저것도 실은 문이란 말이다." 문은 누구나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건데, 아무도 그 생각을 못했다. 꼬리칸에서 황금칸까지 가는 것만 생각했지 문을 열고 나갈 생각은 전혀 안했다.
노회찬 : 브라질 노동자당(PT)의 룰라가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얘기했다. 그러나 다들 개인이 경쟁 속에서 한 칸 한 칸 앞으로 나아가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아주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서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는 별로 안한다.
진보정당은 늘 개인이 한 칸 한 칸 앞으로 가는 경쟁은 이기기도 힘들거니와 이겨봤자 그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주장해왔다. 진보정당이 새로운 사회로 가자, 사회 전체의 새로운 제도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하자고 하는 것이 남궁민수가 말한 혁명이다.
그런데 대개 '그것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스웨덴이니까 가능했고, 인구가 500만 명밖에 안되니까 가능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는 불가능하다'는 선동이 많다.
한 칸 한 칸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이것은 결국 경쟁을 통해 나아지려는 것이다. 완전히, 크게 사회 자체를 바꾸는 발상은 하지 않았다. 열차 사람들이 그동안 벽으로 봐왔던 것이 사실은 문이었다. 그래서 그 문을 부수는 것이 새로운 발상이다. 그전에는 아무도 하지 않았고, 남궁민수만이 했던 발상의 전환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서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자는 것과 같다.
구영식 : <설국열차>에는 네 개의 세계가 있다. 열차의 설계자인 윌포드의 세계와 열차 반란을 주도한 커티스의 세계, 윌포드와 공조해온 원로 지도자 길리엄의 세계, 문을 부수고 열차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남궁민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노 대표는 누구의 세계에 가까운가?
노회찬 : 남궁민수의 세계다. 열차는 안에 모순과 갈등이 있지만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다.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달라져도 크게 달라지는 게 아니다. 근본적인 변화는 남궁민수의 발상과 지향에서 시작된다. 즉 궤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기 때문에 어렵긴 하지만, 그 길이 맞지 않나 싶다.
노회찬이 떠나고 1년 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은 '노회찬 없는 진보정치의 미래'(2019.7.26.)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 그 노회찬이 떠난 지 1년이다.
사회운동도 어렵지만 정치도 어렵다. 이상이 아닌 현실에서 최선과 차선, 심지어 차악을 추구해야 하는 탓이다. 권력과 영광이라는 보상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윤리적 도전을 감당해야 한다.
노회찬은 '그 힘든 길에서 인간적 풍모, 매력을 유지하면서 나날이 전진할 수 있도록 스스로와 인생 전체를 걸었던 사람'이다. 그는 '진보와 정치 사이의 좁은 오솔길'에서 진보의 이상과 척박한 현실 사이의 접점을 부단히 탐색했다.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진보적 가치는 노동시장 안에서는 국가가 노동자를 보호하고 노동시장 밖에서는 든든한 사회안전망이 떠받치는 사회, 즉 북유럽식 사민주의에 가까웠다. 진보정당은 이를 구현할 도구였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part 3>에서는 "'스칸디나비아(북유럽) 복지 모델'과의 만남>이라는 틀로 "사회의 공기까지 바꾼" 북유럽, 즉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와 타게 에를란데르, 노르웨이의 에이나르 게르하르센, 핀란드의 마우노 코이비스토‧타르야 할로넨과 노회찬의 조우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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