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LCD (현 삼성디스플레이) 출신 남성 노동자가 근로복지공단에 '태아산재'를 신청했다. 아버지의 업무 환경으로 인한 태아산재 신청은 국내 최초다.
태아산재는 부모의 업무 환경 탓에 자녀의 선천성 건강손상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제도를 말한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 7월부터 <반도체 아이들의 가려진 아픔> 기획을 통해 '태아를 수급 주체로 인정하는 산재법 개정' 필요성을 집중 보도하고 있다.
삼성 LCD 노동자 출신 최현철(가명, 40) 씨는 1일 아버지의 업무 환경으로 인해 선천성 희귀질환을 앓는 아이를 출생했으니 태아산재를 인정해달라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최 씨의 아들 지후(가명, 14) 군은 차지증후군(CHARGE Syndrome)을 앓고 있다. 이 병은 시각신경 이상, 난청, 심장질환, 생식기 이상, 발달장애 등 여러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게 특징이다. 1만 명당 1명꼴로 앓는 선천성 희귀질환이다.
최 씨는 2004년 삼성 LCD 천안 사업장에 입사해 2011년까지 약 7년간 일했다.
그는 유리기판 위에 화소를 조절하는 층을 만드는 ‘TFT 공정‘에 배치됐다. 공정 마무리 단계에서 제품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는 설비 관리, 독성유기용제인 이소프로필알코올(IPA) 용액을 흰 천에 부어 장비 닦는 일을 주로 했다.
'산업안전보건공단' 사이트에 공개된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에 따르면 IPA는 생식독성물질로 구분된다. 임신율 저하, 태아 사망 증가 등 생식 독성이 나타났다는 동물 실험 결과도 있다.
최 씨는 아내가 지후를 임신한 2007년 무렵에도 IPA 용액을 다뤘다. 정자의 생산주기를 감안할 때 아버지의 경우 임신 전 3개월의 유해요인 노출이 태아 생성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최 씨는 지난 2019년 1월 차지증후군을 앓는 지후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삼성보상위원회에 신청했다. 삼성지원보상위원회는 그해 5월께 자녀질환을 이유로 최 씨에게 경제적 지원금을 보상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최 씨가 신청한 태아산재를 인정할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동안 유산, 선천성질환아 출산 등은 여성 노동환경에서만 그 원인을 찾았기 때문이다.
남성인 최 씨는 법안 제정이라는 까마득한 장벽 앞에 서있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법)은 부모의 업무상 요인으로 인해 선천적 장애나 질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산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2021년 12월 기준 태아산재 관련 개정안이 총 5개 발의됐지만, 모두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임신한 여성 근로자를 중심으로 이뤄진 논의 탓에 남성 근로자는 적용 대상에서 아예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
학계에선 전자산업에 종사하는 아버지의 유해 노출에 의한 태아의 건강손상 가능성을 이미 오래 전부터 살펴왔다. 대만에선 1980년부터 1994년 사이 반도체 산업에 근무한 남성 노동자의 자녀 약 5700명 사례를 연구했는데, 수태 2개월간 반도체 산업에 고용된 남성 노동자의 자녀의 경우 선천성 기형으로 인한 사망이 3.26배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김명희 국립중앙의료원 공공보건의료연구소 연구원은 “현재 발의된 개정안은 수정란 형성 이전 단계에서 부성 측 노출에 의한 태아 건강손상 가능성을 배제했다“면서 “태아 산재보상 요건에 부성 측 노출 연관성을 포함하는 게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백도명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명예교수는 "모성보호와 동등하게 부성보호에 대한 필요성이 사회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면서 "이제는 생물학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아이를 가지려 해도 그렇지 못한 여성과 남성 모두를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부성보호 또한 우리 사회가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반도체-전자산업체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 반올림은 "근로복지공단은 전향적으로 태도를 바꾸어 아버지의 태아산재도 인정하고, 향후 이뤄진 태아산재법 논의에서도 아버지 태아산재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 씨는 입장문을 통해 근로복지공단을 향한 바람을 밝혔다.
한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고용노동법안심사소위원회 정기회에 태아산재 관련 산재법 개정안을 1일 상정했다.
환노위 소속 장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0월에 진행된 국정감사에서 “태아산재 제도의 발전 방향으로 아버지로부터의 산재 이슈까지 고민해야한다고 본다“며 엄마가 아닌 아버지의 업무 환경으로 인한 태아 산재 인정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 제휴기사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