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이 만든 국가 미국에서 인종문제는 태생적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1863년 노예해방, 1963년 민권법 제정 등을 통해 인종적 불평등이 형식적으로 해소된 듯 보이지만 2021년 현재에도 인종주의는 여전히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지난 19일 시위 현장에서 총기를 난사해 2명을 살해하고 1명을 중태에 빠뜨렸던 18세 백인 소년 카일 리튼하우스가 '무죄' 평결을 받은 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로 폭증한 아시안 혐오범죄 등이 그 방증들이다.
백인 우월주의를 부추겨 집권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공화당)이 2020년 대선에서 패하고 조 바이든 행정부(민주당)가 들어서면서 '공화당 주(레드 스테이트)'들을 중심으로 확산된 '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 교육 반대' 움직임도 미국에서 인종주의가 갖는 힘을 보여준다.
'CRT 교육 반대'는 트럼프가 장악한 공화당에서 민주당 세력을 상대로 벌이는 '문화 전쟁(Culture War)'에 속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한국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했던 '국정 한국사 교과서' 사태를 연상시키는 2020년대 미국 내 역사 교육 논란의 정치사회적 함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첫번째 기사 바로 가기 : '트럼프 문화전쟁'의 격전지가 된 미국의 학교)
8개주에서 '반 CRT 법'이 통과됐으며, 21개주에서 관련법 제정 움직임이 있다
11월 25일(현지시간) 현재 미국 50개주 중 29개주에서 CRT 교육을 금지하는 법이나 다른 제재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CRT 반대'를 처음으로 주장한 크리스 루포의 'CRT 법제화 추적기', https://christopherrufo.com/crt-tracker)
애리조나, 아이오와, 아이다호, 뉴햄프셔, 오클라호마, 테네시, 텍사스, 노스다코타 등 8개주에서는 이미 관련 법안이 통과됐다. 나머지 21개주(앨라배마, 아칸소, 코네티컷, 플로리다, 조지아, 아이다호, 아이오와, 켄터키, 루이지애나, 메인, 미시건, 미시시피, 미주리, 노스캐롤라이나, 노스다코타,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사우스캐롤라이나, 사우스다코타, 유타, 웨스트버지니아, 위스콘신, 와이오밍)에서는 주 의회에서 관련 법안을 제정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안소현 케네소 주립대학 교수(사회교육학)는 <프레시안>과 화상 인터뷰에서 "CRT 교육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드는 것 자체가 오히려 CRT가 맞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CRT는 미국에서 인종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며 인종주의는 개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통해 시스템화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안 교수는 "정치경제문화적 파워를 지닌 백인들이 모여 CRT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킬 수 있다는 자체가 미국사회에서 인종차별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며 인종차별주의는 일부 인종차별적인 개인들의 일탈이 아닌 법으로 허용된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며 "백인 우월주의와 제도화된 인종주의는 교육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백인 학생과 백인 학부모 또는 백인 정치인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내용을 못 가르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킬수 있는 권력"이라고 지적했다.
인종차별 가르치면 교사 면허정지...KKK, 홀로코스트도 비판하면 안된다
이처럼 공화당 주(레드 스테이트)와 경합주(퍼플 스테이트)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CRT 반대' 흐름은 교육 현장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있나?
각 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CRT 교육을 금지하는 법안들은 교사가 미국 역사 뿐 아니라 현재의 사회 문제에 대한 수업을 할 때 어느 한 쪽의 입장이나 시각만을 가르쳐서는 안 되며, 개별 학생이 자신의 인종이나 성별에 기인해 불편함, 죄책감, 분노 등 심리적 고통을 느끼게 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오클라호마주의 경우 관련 행정지침을 통과시켜 교사들은 금지된 개념들 중 하나라도 가르칠 경우 교사 면허가 정지되고, 해당 학교도 제재를 받을 수 있다. 학부모들과 시민들은 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교사들을 고발할 권한을 가진다. 일부 학군에서는 "다양성(diversity)", '백인 특권(white privilege)" 등의 용어 사용 자체를 금지시켰다.
이런 규정 때문에 남북전쟁 이후 흑인들에게 사적 테러를 가했던 백인 우월주의 집단인 'KKK'(쿠 클럭스 클랜)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 등과 같은 반인륜범죄에 대해서도 과연 긍정적인 측면을 가르칠 수 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오클라호마주에서는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과 시민 권리를 위한 변호사 위원회(Lawyer's Committee for Civil Rights Under Law) 등이 지난달 'CRT 교육 금지' 법안이 역사적으로 소외된 학생들의 공정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약하고 교사들의 교육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미국판 '분서갱유'...노벨평화상 수상자 전기, 아동문학상 수상작도 '금서'
또 'CRT 교육 반대'에 영향을 받은 백인 학부모들 사이에서 '금서' 운동도 일고 있다. 일부 주지사, 주의회 의원 등 정치인들도 이런 여론을 등에 업고 관련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그렉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지난 5일 텍사스 교육위원회 협의회(Texas Association of School Boards)에 보낸 편지에서 "점점 더 많은 학부모들이 공립학교 도서관과 공교육 시스템의 책들에서 매우 부적절한 내용들이 발견되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며 "외설적 이미지와 내용물들은 학교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밝혔다. 애벗은 동일한 서한을 주 교육청, 교육위원회, 주립 도서관 관계자들에게도 보냈다.
주지사의 서한은 매트 크라우스 텍사스 하원의원이 공립학교 도서관에서 배치된 책들에 대한 하원 차원의 조사를 실시한다고 밝힌 지 일주일 만에 나온 것이다. 크라우스 의원은 교육감들에게 "학생들이 인종, 성별 때문에 불편함, 자책감, 괴로움 또는 다른 형태의 심리적 고통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주제"를 포함하는 교과 과정이나 책들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그는 이 서한에 소위 '문제'라고 여겨지는 850권의 책 목록을 첨부하기도 했다. 텍사스 교사 협의회는 이에 대해 "마녀 사냥"이라고 비판하며 반대하고 있다.
텍사스 휴스턴의 한 학군에서는 흑인 소년이 백인들이 다수인 사립 중학교에 진학해 적응하는 과정을 다룬 <뉴 키드(New Kid)>라는 책도 금서 목록에 포함시켰다. 이 책은 그래픽 소설 중 최초로 지난 2018년 뉴베리상을 받아 주목을 받았다. 이 상은 해마다 미국 아동문학 발전에 가장 기여한 책에게 주는 상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요크(York) 학군에서는 지난해 10월 전원 백인인 교육위원회에서 특정 책과 영상 자료에 대한 교육 금지 지침을 내렸다. 이 목록에는 흑인 인권 운동가인 로자 파크스 관련 책, 201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파키스탄의 여성 교육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전기,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영화 '히든 피겨스'의 원작 소설,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인종주의를 다룬 내용, 미국의 공영방송인 PBS에서 만든 인종차별 관련 다큐멘터리 등이 포함돼 있다.
백인 학생들만 편안하면 유색인종 학생들은 불편해도 상관 없다?
안소현 교수는 학부모들의 '금서' 운동이 이전에도 있었다며 백인부모와 단체의 압력에 의해 제대로 된 검증과 연구 없이 추진하다보니 엉뚱한 책을 '금서'로 지정하는 해프닝도 벌어진다고 말했다. 텍사스 교육위원회는 지난 2010년 <불곰아, 불곰아 뭐가 보여?(Brown Bear, Brown Bear, What Do You See)>라는 그림책 시리즈를 3학년 교과 과정에서 삭제한 일이 있었다. 그 이유는 저자 중 한 명인 빌 마틴 주니어를 <윤리적 마르크스주의 : 해방의 단정적 명령>이라는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쓴 빌 마틴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육위원회를 통해 지정되는 '금서'들은 외설, 폭력 등 비교육적 내용이 문제가 된다기 보다 저자가 유색인종이거나 백인 우월주위,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 등 미국 주류 백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기반한 책인 경우도 많았다.
안 교수는 "CRT 교육 반대는 다문화, 인권, 세계시민, 비판적 사고력, 다양성 교육을 원하는 교사들을 통제하는 작용을 하며 반대로 이를 가르치기 원하지 않았던 보수적인 백인 교사들에겐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고 말했다.
또 인종차별, 빈곤 등으로 가뜩이나 교육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다수의 유색인종 학생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고 강조했다.
안 교수는 정치권에서 실제 교육적 관심과는 별개로 이런 정치적 기획을 밀어붙이고 그로 인해 교사와 학생들이 피해를 보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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