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시리즈 모아보기)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⑯ 들어가는 글 유럽의 사회민주당으로부터, 한국의 진보정당에게 (☞바로가기)
⑰ 키어 하디 上 민주노동당에서 영국 노동당을 봤다 (☞바로가기)
⑱ 키어 하디 下 민주노동당의 첫걸음..."50년 후엔 진보가 집권할 것" (☞바로가기)
⑲ 켄 리빙스턴 上 영국의 '빨갱이 켄', 지금의 런던을 만들다 (☞바로가기)
⑳ 켄 리빙스턴 下 "한국의 '레미제라블'은 치러지지 않는 장례식장에 있다" (☞바로가기)
㉑ 빌리 브란트 上 독일의 빌리 브란트는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었다 (☞바로가기)
㉒ 빌리 브란트 下 "파독간호사, 파독광부라 하지 말고 '애국자'라 해야 합니다" (☞바로가기)
㉓ 장 조레스 上 국회로 간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 그리고 노회찬 (☞바로가기)
㉔ 장 조레스 下 진실과 정의 앞에 선 '삼성 X파일 사건' (☞바로가기)
㉕ 프랑수아 미테랑 上 최악의 경제 상황에서 "오페라극장 만들자"는 '문화 대통령'이 등장했다 (☞바로가기)
㉖ 프랑수아 미테랑 下 역사·음악·음식...프랑스를 만든 '문화의 힘' (☞바로가기)
㉗ 빔 콕 上 (☞바로가기)
노회찬, 네덜란드를 두 번째 방문하다 : '노회찬에게 희망을 묻는다'
2015년 4월 23일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네덜란드 가셔서 그곳 사람들 키 큰 것에 너무 놀라거나 부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머리는 더 크실거에욧~!! 아자아잣~!" (페친 김해룡 님의 글) 노회찬이 임순례 감독의 새 영화 <제보자> 시사회에서 만난 유연석 배우와 사진을 찍으면서 트위터(2014.9.17.)에 남긴, "응사 이후 좋아하게 된 배우 유연석 군을 만났습니다. 키는 저보다 크지만 얼굴은 저보다 작더군요. 쌤쌤입니다^^"는 글을 패러디한 것이다.
※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들은 네덜란드 국민들이다. 2015년 네덜란드 남자들의 평균 키는 184㎝, 여자들의 평균 키는 171㎝라고 한다. (<한겨레>, 2015.5.5.) 한국의 경우 2013년 만 17세 남자 평균 키는 173.2cm, 여자는 160.8cm로 조사됐다.
2015년 3월 중순, 부부 동반 네덜란드 두 번째 방문기 : "노회찬 전 의원은 저에게는 마지막 기대주거든요"
2015년 노회찬 정의당 전 대표와 김지선 여성의전화 부회장 부부는 네덜란드 동포들의 초대로 3월 13일부터 19일까지 6박7일간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방문했다. 암스테르담 지역 동포 강연(3.14.), 네덜란드 사회당 사무총장 면담(3.16.), 에라스무스대학교 부설 국제사회연구소 초청 강연(3.16.)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사회적 합의모델기구인 SER(사회경제위원회) 방문(3.18.), 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 방문 및 관장 면담(3.18.), 유럽 중세 상업의 중심지 벨기에 겐트(Gent) 탐방 등의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왔다. 초청자 중 한 사람인 네덜란드 교포 장광렬 씨가 전 일정을 수행했다. 10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장광렬이 10년 만에 노회찬을 초청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광렬의 대답이다.
※ 장광렬은 2000년 민주노동당에 가입해 그해 가을 중앙당에서 아셈(ASEM) 국제회의 당시 대안포럼 국제행사 담당자로 당 활동에 처음 참여했고, 2001년 2월 대우자동차 대량정리해고 때 '대우그룹회장 김우중 체포결사대' 프랑스 원정 때 현지 지원을 했었다. 그는 2003년 7월에 설립된 한국 정당사 최초의 해외지구당인 민주노동당 유럽지구당의 초대 사무국장을 지냈고, 2008년 진보신당 초대 유럽지역위원장을 지내며 유럽 내 진보정당운동에 몸담았다.
2008년 3월 1일 장광렬은 '네덜란드에서 인사드립니다'는 글을 진보신당(3.16. 창당) 당원게시판에 올렸다.
초청 이야기 한마당-노회찬에게 희망을 묻는다 : "한국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책이 잘 팔린 이유"
네덜란드에 도착한 노회찬의 첫 일정은 3월 14일 네덜란드 교민회 초청 강연이었다. 주제는 '노회찬에게 희망을 묻는다'였다. 장소는 교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암스테르담 바로 밑의 암스텔뻬인으로, 국제적으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의 일산이나 분당 같은 곳이라고 한다. 강연의 주요 내용을 몇 개 추리면 이렇다.
강연 1부를 마친 노회찬은 2부에 질의응답을 받았다.
한 방청객은 "1992년 대학생 때 백기완 대통령후보 선거운동을 했을 때, 찌라시를 시장에서 돌리는데 그 내용을 이해하는 국민들이 별로 없었다"며 "노회찬 대표의 강연은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쉬운 말이라서 좋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보세력이 이렇게 많이 국민에게 친근하게 변했다는 걸 보게 돼 감개무량하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다음날인 3월 15일 일요일에 노회찬과 김지선 부부 일행은 공식일정 없이 헤이그 인근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동포 가족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했다. 유럽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도 일요일은 대부분의 행사가 자제된다고 한다. 노회찬과 김지선 부부 일행도 네덜란드식으로 휴식을 취했다.
네덜란드 왕실을 정점으로 귀족들의 문화를 제외하면, 네덜란드에는 세 개의 문화가 있다. 그것은 개신교, 가톨릭, 그리고 노동계급(사회주의) 문화다. 세 문화권 모두 일요일에는 쉬자는 데 의견 통일을 보았고, 대부분의 상점은 일요일에 문을 닫았다. 물론 네덜란드 사회도 점차 미국화돼 일요일 시내에서 쇼핑하는 사람들이 늘어서 암스테르담 시내 중심가는 1년 365일 옷가게와 관광상품점들이 문을 열고 있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네덜란드 사회당 방문과 헤이그 대학 강연
3월 16일 월요일. 노회찬-김지선 일행은 장광렬의 안내 속에 네덜란드 사회당(Socialistische Partij, SP) 중앙당사가 있는, 700년의 역사를 지닌 아머스포르트(Amersfoort)로 갔다.
노회찬의 네덜란드 2차 방문 당시 유럽 대부분 나라들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우경화'되고 신자유주의적인 경제노선이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네덜란드의 경우는 노동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대안으로 더 왼쪽에 있던 정당들을 선택하게 되는데 네덜란드 사회당 역시 이런 부류에 속했다.
잎서 살펴본 빔 콕의 네덜란드 노동당(Partij van de Arbeid, PvdA)은 1894년 창당한 사회민주노동당을 계승해, 1946년에 창당된 네덜란드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1940년대부터 네덜란드 좌파의 대표적인 정당으로 있었던 유서 깊은 정당으로, 네덜란드 복지제도의 기틀을 확립한 정당이다.
네덜란드 사회당의 경우 창당 당시 명칭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네덜란드 공산당'이었다. 1971년 주로 68세대로 이뤄진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마오이즘(모택동주의) 정치서클에서 시작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폐기하고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전면 수용했다. 선거를 통한 집권을 표방한 뒤 선명한 좌파 노선을 걸었다. 1994년 약 1.5%의 지지를 받으며 2석으로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 2012년 선거에서는 9.7%의 지지를 얻어 제4당으로 15석을 확보했다.
참고로 입헌군주국 네덜란드는 다당제 국가로, 의회가 상하원으로 구성돼 있으며 실권을 쥔 하원은 전국단일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고, 상원은 광역지방자치의원들의 투표로 결정된다.
네덜란드 사회당 중앙당사를 방문한 노회찬 부부는 얀 마라이네슨 전 당대표와 한스 반 하이닝언 사무총장과 대담을 했다. (장광렬, 「좌파정당 진보정당,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기반해야: 노회찬과 함께 한 네덜란드-벨기에 여행기-3」, <레디앙>, 2015.4.13.)
1970년대 사회당을 창립하고 당을 노동당 다음 가는 좌파정당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당의 대표를 지낸 얀 마라이네슨은 브라반트 지방 작은 공업도시 오스(Oss)에서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자신문>을 집집마다 돌면서 배포하면서 지역에서 성장해온 정치인이었다.
얀 마라이네슨은 "우리가 무엇을 하려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대중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냐가 중요하다"며 대중노선을 강조했다. 사회당은 캠페인이나 방송 인터뷰에서 항상 대중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와 활동방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지식인의 현학적인 언어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중앙당사 빨간색 탑에는 '사람이 우선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한스 반 하이닝언 사무총장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경제정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노회찬은 한국은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지방자치제, 정치범 석방 및 사면 복권, 언론 출판의 자유 향상 등을 이루었고, 바로 한 달 뒤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대중적 노동운동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1992년 총선 이후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가 시작돼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과 2004년 원내 입성을 거두었으나 진보정당 내부의 갈등으로 현재는 정의당이 국회의원 5석으로 제3당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이어 한국의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로 돼 있어 양대 보수정당이 나눠먹기를 하고 있고, 이런 벽 때문에 진보정당은 비례명부에서는 10% 이상의 득표를 하지만 의석수는 훨씬 적다며 진보적 성향의 유권자들의 표가 동등하게 대접받도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네덜란드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 1950년에 설립된 공공기관인 네덜란드 SER은 노조연맹, 사용자연맹, 정부가 지명한 독립적 인사 등 노사정 3자 대표 각 15인 등 총 45명으로 구성(1990년 이후 각 11인, 총 33명으로 축소)된 공공자문기구로 정부는 정책을 의회에 상정하기 전에 SER의 법적‧정책적 자문을 구한다.
한스 사무총장은 "사회당이 성장하게 된 것은 네덜란드에 노동-자본의 힘겨루기에서 자본의 힘이 너무 강해진 신자유주의 시대에 신물을 느낀 노동자들이 사회당을 찍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자기 당이 성장하는 것은 좋지만 노동자들이 고통이 커지고 있는 현실은 결코 즐겁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하며 씁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사회당 대표단 면담을 마친 뒤 노회찬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재벌과 노동자'를 주제로 에라스무스대학교 국제대학원(ISS) 초청 강연을 했다. 3월 18일에는 SER(사회경제위원회)을 방문해 '사회적 합의모델'을 주제로 좌담회를 했고, 이준 열사 기념관장과의 면담을 한 뒤 네덜란드 지방선거 개표 파티에 참석했다.
※ 참고로 37개 정당이 참여한 2021년 네덜란드 총선에서는 '자유민주국민당' 21.87%(34석), 사회자유주의 정당으로 이른바 '강남좌파'들이 가장 많이 지지하는 '민주66' 15.02%(24석), 극우 성향의 '자유당' 10.79%(17석), 자유주의 중도 우파 노선을 추구하는 '기독민주애원당' 9.50%(15석)를 획득했다. 좌파 진영의 경우 '사회당' 5.98%(9석), '노동당' 5.73%(9석), '녹색좌파당' 5.16%(8석)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유럽 주류 좌파 정당이 약화되고 있는 반면,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 등에선 주로 극우 정당, 그리스·스페인에선 극좌 정당들이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와 관련한 여러 해석 가운데 "좌파 정당의 자양분이 됐던 토양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분석에 주목해봄직하다. (고정애 특파원, 「유럽 좌파가 몰락한 까닭은…」, <중앙일보>, 2016.12.11.)
닫는 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노회찬-김지선 부부 : '불출 노회찬'
네덜란드 방문 중에 잠깐 시간을 낸 노회찬-김지선 부부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이 전시돼 있는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이스 왕립박물관(Mauritshuis, The Royal Picture Gallery)을 방문했다. 대표 소장품은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665)는 렘브란트, 프란스 힐스와 함께 "17세기의 전형적인 자본주의 국가"였던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3대 화가 중 한 명인 얀 페르메이르(Jan Vermeer, 1632~1675)의 명화로, 이름에서 말하듯이 소녀가 걸고 있는 진주 귀고리를 그림의 초점으로 사용했다. 네덜란드가 절대 해외 전시를 허락하지 않는 작품으로 유명한 이 그림은 '북유럽의 모나리자' 또는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리며 '회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소녀'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대해 오페라 해설가 한형철은 한 칼럼(<중앙일보>, 2021.3.21.)에서 이런 호기심을 던지기도 한다. "그녀의 두건이나 의상을 보면 신분이 귀하지 않은 것은 틀림없지요. 종교화가 사라진 당시의 네덜란드 화가들이 주로 부자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생계를 유지했는데, 왜 화가는 신분이 낮은 소녀를 그렸을까요, 혹시 그의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뮤즈였을까요?"
사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특정한 인물을 모델로 한 초상화라기보다는 '트로니(tronie)'로 보는 편이 적합하다는 견해도 있다. 트로니는 '얼굴'을 의미하는 17세기 네덜란드어다. 부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로 과장된 표정을 보여준다는 특징과 함께 트로니는 특별히 아름답게 만들어졌거나 혹은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색다른 의상을 입은 모델을 가슴 높이까지 그린 전형적인 인물화'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2020년 5월 20일 tvN의 <유 퀴즈 온 더 블록>(55회)은 "세계적인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숨겨진 비밀이 밝혀져 큰 화제를 모았다"며 퀴즈를 냈다. 네덜란드 연구진이 최신 기술을 이용해 그림을 정밀 분석한 결과, 소녀의 얼굴에서 이것이 발견한 것인데요. 이전의 일부 미술학자들은 소녀에게 이것이 없는 것을 근거로 작품 속 인물이 허구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 아리송한 문제의 정답은 '속눈썹'이었다.
2020년 마우리츠하이스(Mauritshuis) 왕립미술관의 연구팀은 적외선을 활용한 여러 차례의 촬영 등을 통해 2년간 그림을 조사하면서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그림 가장 바깥층의 아래에 숨겨진 몇 가지 비밀을 밝혀냈다. 연구팀에 따르면, 속눈썹 외에도 베르메르가 그림을 완성하기 전 소녀의 귀, 머리에 둘러싼 스카프의 위치, 그리고 목의 뒷부분의 위치를 변경한 것이 확인됐고 현재 어두운 색으로 칠해진 소녀의 배경이 원래 짙은 녹색의 커튼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연구팀은 여전히 그림의 실제 주인공을 찾아낼 수 없었음에 아쉬움을 표명하면서도 오히려 이런 미스터리가 관람객들로 해금 그녀가 누구일까 추측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Mintgreen,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누구일까?」, <brunch>, 2020.8.11.)
2020년 5월 서울 강서구 원당곱창에 모인, 노회찬과 함께 진정추 진보정당추진위원회와 진보정치연합 활동을 함한 '길동무'들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두런두런 나눈 이야기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불출 노회찬'의 이름을 있게 한, 김지선의 모사 작품은 현재 노회찬재단 '노회찬의 서재, 봄'에 자리를 잡았다.
인문학 작가 박홍순과 민간인 신분 조국과 노회찬의 풍자적 언어 : "법 앞에 만 명만 평등", "강요된 엄숙함의 그물을 뚫고 웃음이 터져 나올 때 희망의 숨통이 열린다"
노회찬이 떠나고 1년이 지난 2019년 7월, 노회찬재단은 전태일기념관에서 '노회찬 1주기 추모미술전시회'('함께 꿈꾸는 세상 노회찬을 그리다')를 열었다. '노회찬을 추모하며 함께 꿈꾸는 세상을 그린다'는 기조로 노회찬을 그리워하는 미술작가와 사진작가 50여 명이 참여, 작품을 출품했다.
노회찬의 오래 전 길동무이자 한때 화가를 꿈꿨던 박홍순 인문학 작가가 관람객들에게 미술작품을 설명하는 도슨트 역할을 맡았다. ('박홍순과 함께하는 작품+노회찬 읽기') "(노회찬) 선배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품 설명을 마친 뒤 박홍순은 "혼자 전시장을 천천히 돌아보는 도중에, 전시장 한쪽에서 촌철살인의 풍자가 담긴 발언 장면을 모아놓은 영상물을 발견했다. 짧지 않은 영상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잠시도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고 글에 적었다. (박홍순, 「노회찬의 풍자적 언어」, <시그널>, 2020.11.13.)
풍자가 담긴 노회찬의 수많은 어록 가운데 박홍순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한 것 아닙니까" 라는 일침이었다.
노회찬의 말은 박홍순으로 하여금 예리한 통찰력과 재치로 18세기 영국 사회를 풍자한 윌리엄 호가스의 정치 풍자화를 떠올리게 했다.
"웃음을 동반하는 노회찬의 언어는 일시적 기분 전환을 넘어서는 적극적 의미를 지닌다. (…) 삶에 쫓겨 무심코 지나치던 사회 문제에 대해 귀를 쫑긋 세우고 관심을 끌게 한다"면서 박홍순은 이렇게 글을 마무리한다.
2019년 7월 27일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청와대를 떠난 직후 '민간인' 신분 첫날의 일정으로 '노회찬 1주기 추모미술전시회'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노회찬재단 조승수 사무총장은 페이스북에 전시회장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조국의 사진을 공개했다. 조승수는 게시물에 "전시회에서 잠시 자원봉사하는 조국 선생, 고맙습니다"라는 문구도 함께 적었다.
조국도 페이스북에 조승수의 글과 사진을 공유하며 "노회찬 의원의 후원회장이었던 바, 1주기 추모 미술 전시회를 방문했다"며 "법사위원으로 '법이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고 일갈했던 고 노회찬, 그가 그립다"고 덧붙였다.
1년 전인 2018년 7월 24일 노회찬의 빈소를 방문한 뒤 조국은 페이스북에 추모의 글을 올렸다.
오늘의 기록이야기 <빔 콕과 노회찬> 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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