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시리즈 모아보기)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⑯ 들어가는 글 유럽의 사회민주당으로부터, 한국의 진보정당에게 (☞바로가기)
⑰ 키어 하디 上 민주노동당에서 영국 노동당을 봤다 (☞바로가기)
⑱ 키어 하디 下 민주노동당의 첫걸음..."50년 후엔 진보가 집권할 것" (☞바로가기)
⑲ 켄 리빙스턴 上 영국의 '빨갱이 켄', 지금의 런던을 만들다 (☞바로가기)
⑳ 켄 리빙스턴 下 "한국의 '레미제라블'은 치러지지 않는 장례식장에 있다" (☞바로가기)
㉑ 빌리 브란트 上 독일의 빌리 브란트는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었다 (☞바로가기)
㉒ 빌리 브란트 下 "파독간호사, 파독광부라 하지 말고 '애국자'라 해야 합니다" (☞바로가기)
㉓ 장 조레스 上 국회로 간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 그리고 노회찬 (☞바로가기)
㉔ 장 조레스 下 진실과 정의 앞에 선 '삼성 X파일 사건' (☞바로가기)
㉕ 프랑수아 미테랑 上 최악의 경제 상황에서 "오페라극장 만들자"는 '문화 대통령'이 등장했다 (☞바로가기)
㉖ 프랑수아 미테랑 下 역사·음악·음식...프랑스를 만든 '문화의 힘' (☞바로가기)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와 '네덜란드의 기적', 노동시간 단축과 고용 창출 : "고용 창출이 바로 민주주의, 1367(1391)시간 대 2394(2357)시간"
1653년(효종 4년) 헨드릭 하멜의 예기치 않은 제주도 표류로 네덜란드는 화란(和蘭)이란 이름으로 조선에 알려졌다. 조선에 관한 서양인의 최초의 저술 <하멜 표류기>는 1668년 암스테르담에 귀환할 때까지 17세기 조선의 활상을 세세하게 기록한 책으로 사료적 가치도 크다고 한다.
오랫동안 우리에게 네덜란드는 국토가 바다보다 낮은 나라, 풍차의 나라, 튤립의 나라 등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2002년 태극전사들을 이끌고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 감독을 통해 네덜란드가 한국을 강타했다.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
5년 뒤인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예비후보로 '대선예비후보 서울 합동연설회'(7.22.)와 '경남지역 경선돌입 기자회견'(8.28.)에서 "당원동지 여러분, 히딩크가 돼 주십시오"라며 '평당원 혁명'과 함께 히딩크를 불러낸 바 있다.
한편 네덜란드는 히딩크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타협의 대표적 모델 가운데 하나인 '폴더 모델'(polder model) 국가―폴더란 '간척'이란 뜻으로, 해수면보다 낮은 땅에서 살아온 네덜란드 조상들이 서로 힘을 모아 간척지를 개척해 바다의 위협에 맞선 것처럼 국가적 위기가 발생하면 사회적 대타협으로 극복한다는 것―로 노동시간 단축과 시간제 고용(파트타임) 활성화와 차별금지 등을 통해 고용안정에 성공, 실업위기를 극복한 것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주목해봄직한 것 가운데 하나는 1990년대 들어 촉발된 네덜란드의 '유연안정성'(flexicurity)에 대한 논의다. 그 배경을 보면 전통적으로 강력한 고용보호로 인해 노동시장이 경직됐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과 함께, 1980년대 이후 급격히 늘어난 파트타이머, 임시직, 파견 등 유연노동자들에 대한 노동법 및 사회법상 보호가 매우 취약해 이들에 대한 보호가 중요한 과제로 대두된 때였다.
이에 따라 노동법 개정을 통해 정규직들의 엄격한 해고제도를 완화하고 유연노동자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방안이 모색됐고, 노사 양자기구인 노동재단(STAR)에서의 합의를 거쳐 1997년 말 '유연성과 안정성법'으로 입법화됐다. 이 법안에는 △3번의 연속적 계약 이후 또는 연속계약의 총 기간이 3년 이상일 경우 영구계약으로 전환 △해고예고기간 6개월에서 원칙적으로 1개월, 최고 4개월로 단축 등 유연성 확보내용과 △3개월 동안 주당 최소 20시간 노동하면 법적으로 고용계약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 △파견업체와의 계약은 영구적인 정규계약으로 간주 등 안정성 확보내용이 담겨 있다. (정원호, 「네덜란드와 덴마크의 유연안정성 비교」, 한국노동연구원, <국제노동브리프>, 2005년 12월호)
2006년 6월 26일 노회찬은 <난중일기>에 「서민들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라는 글을 올리며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난 3년 동안 빈부격차는 더 벌어졌고,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는 2008년 2월에는 빈부격차가 지금보다 더 벌어질 것"이라고 질타하면서, 노동시간 비교 속에서 네덜란드를 불러냈다. 두 나라의 노동시간은 '네덜란드 1367 시간 대 한국 2394 시간'이었다.
2008년 7월 10일 <초록교육연대> 초청강연에서도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공동대표는 "고용창출이 민주주의"라면서 네덜란드를 다시 호명했다.
노회찬의 오랜 길동무이자 드라마로도 제작된 인기 웹툰 <송곳>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의 <우리가 몰랐던 노동이야기: 하종강의 노동 인권 교과서>(나무야, 2018.5.1.)를 보면 벽돌공이 장래희망인 네덜란드의 한 중학생 일화가 나온다.
그리곤 제대로 된 노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다.
'네덜란드 병'에서 '네덜란드의 기적'으로: 빔 콕과 '바세나르 협약'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을 보면 네덜란드에 대해 "17세기의 전형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네덜란드는 19세기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인접 국가들과는 달리 산업 자본주의로 빠르게 성장하지 못했다.
경제학 용어 가운데 네덜란드가 들어가는 말이 있는데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 그것이다. 그 유래를 보면, 1959년 네덜란드는 북해 유전의 발견으로 인한 석유 수출로 막대한 돈이 해외에서 밀려들어왔고 덕분에 일시적인 경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통화가치의 상승 및 물가 급등으로 인해 국내의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면서 결국 1960~1970년대에 극심한 경제 침체를 겪게 됐다.
이처럼 네덜란드 병이란 주로 자원 부국이 자원의 수출로 인해 일시적으로 경제 호황을 누리지만, 물가와 통화 가치상승으로 인해 국내 제조업이 쇠퇴해 결국 경제 침체를 겪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원의 저주'(Resource curse 또는 Paradox of plenty)라 불리기도 한다.
'병'을 치유하고 '기적'(Dutch Miracle)을 이뤄내는 데 네덜란드는 성공했다. 2002년 1월 20일 KBS 일요스페셜 <네덜란드의 기적>이 방영, 세간의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구상에 어떻게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을까'라는 것이 이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의 공통된 찬사였다.
16년간 암스테르담 시장을 지내고 내무장관까지 지낸 인물이 공직기간 중 단 400만 원을 유용한 사실이 네덜란드 최악의 부패 스캔들이 되고 있는 나라, 200여 명의 국회의원들 가운데 단 한 명도 자가용 운전수를 두고 있는 이가 없는 나라. 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나라, 청교도 전통에 따라 가진 자가 극도로 검소한 삶을 살고 있어 계층간 위화감이 없는 나라,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시간을 줄여 실업 발생을 막고 있는 나라. TV에 비친 네덜란드는 너무나도 부러운 '인간의 공동체'였다. (이승선 기자, 「네덜란드의 기적<1> 노·사·정이 만들어낸 번영」, <프레시안>, 2002.1.22.)
'네덜란드의 기적'을 이룬 데는 폴더 모델의 가장 유명한 사례인 '바세나르 협약'(Wassenaar Agreement, Wassenaar Accord)이라는 노사정 대타협이 있었다. 기적을 이끌어낸 주역은 루드 루버스와 빔 콕이었다. 루드 루버스 총리가 이 드라마의 감독이었다면 노총위원장이었던 빔 콕은 주연배우였던 셈이다.
재정 적자 축소, 기업의 수익성 회복, 임금인상 억제, 일자리 나누기 등을 골자로 하는 '새 정부 계획'을 내놓은 루버스 총리는 노사가 타협하지 않으면 정부가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총리가 네덜란드 병을 치료하겠다고 나서자 노사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조명신 기자,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모델 만든 이들은 누구?: '네덜란드 모델'의 두 주역, 루버스와 빔 콕」, <오마이뉴스>, 2010.11.16.)
'네덜란드의 기적'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 1982년 '바세나르 협약'은, 당시 네덜란드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VNO-NCW 회장 크리스 반 빈의 식탁에서 이루어졌다. 반 빈 회장이 직장에 나가는 아내 대신 아이를 돌보느라 주로 집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세나르 협약은 네덜란드 경제와 사회의 대전환점이었다. 바세나르 협약으로 노동계는 임금 동결을 약속했고 사용자는 노동시간 단축과 이를 통한 고용 창출로 화답했다. '기독교민주당 아펠' 소속의 루드 루버스 총리(1982~1994)가 이끄는 정부는 재정 및 세제 지원 등으로 힘을 보탰다.
실제로 기업은 근무시간을 주 40시간에서 38시간으로 줄임과 동시에 시간제 일자리를 늘려갔고, 정부도 법정 노동시간을 36시간으로 줄였다. 그리고 시간제로 일을 하더라도 종일제 노동자와 하는 일이 같다면 급여체계나 연차와 같은 혜택들을 동등하게 받도록 법으로 보장했다.
이런 타협의 배경에는 노·사·정 간 신뢰가 자리잡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자와 노동자 대표들은 독일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을 공동으로 전개하면서 신뢰를 쌓았다. 전후 경제 재건을 위해서는 노사 관계 안정이 필요했다. 임금 인상 억제를 노동자들이 수용하기 위해서는 사회보장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어야 했다. 노사간 이해관계는 노사정이 폭넓게 참여하는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조율됐으며, 정부와 의회는 이를 정책과 입법에 반영했다. (「<노동개혁> 네덜란드 일자리 유연성·안정성 동시 추구」, 연합뉴스, 2016.2.2.)
이렇게 이뤄진 협약으로 경제안정과 경제성장이 이뤄졌다. 하지만 바세나르 협약 정신이 흐트러지면서 네덜란드 경제는 1992년 다시 불황에 빠졌다. 제조업 일자리 100만개 중 10분의 1이 1992~94년에 사라질 정도였다. 이런 경제 위기 속에 1994년 총선에서 네덜란드 사상 최초의 좌우익 연합정권인 '자주색 연정'(Purple Coalition)이 탄생하면서 바세나르 협약을 이끌어냈던 노조 지도자 빔 콕이 총리가 됐다. 자주색 연정은 빔 콕의 노동당(적색), 자유당(청색), 민주당(중도파)과의 연정을 뜻하는데, 빔 콕 정부는 연정에 바탕해 정부지출 삭감, 세금 감세, 시장경제 활성화, 규제 완화, 사회복지제도 수정, 민영화 등 과감한 조치를 실시했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기적'을 이끌어낸 주역인 빔 콕(Willem "Wim" Kok, 1938.9.29.~2018.10.20)은 네덜란드 노동당(PvdA) 소속 정치인으로, 8년간(1994.8.22.~2002.7.22.) 총리를 지냈다.
바세나르 협약 당시 노동자 측 대표로 나섰던 빔 콕은 노동계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길이 아니고는 '네덜란드 병'을 치유하고, 일자리를 늘릴 수 없다고 확신했으며, 총리가 된 후에도 이 기조를 지켜나갔다. 네덜란드 경제의 악순환 고리는 선순환 구조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경제성장률은 오르고 실업률은 감소했다.
빔 콕, 한국에 오다 : "정부는 세금을 낮추고, 기업은 고용을 늘리고, 노조는 일자리 재분배에 합의"
총리직을 마친 뒤 빔 콕은 몇 차례 초청 방한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96년 6월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초청으로 양국의 경제협력외교 방안 논의를 위해, 2005년 5월 노무현 정부 때는 한국노동연구원 초청으로 노사정 사회적 협의와 경제발전의 경험 소개를 위해, 2009년 11월 이명박 정부 때는 '새만금 명예자문관'으로 위촉되면서, 2011년 7월에는 '서울시노사정서울모델협의회' 주최 국제 컨퍼런스 강연을 위해, 2012년 2월에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주관 '글로벌 코리아 2012'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한 달 뒤인 3월에도 가톨릭대 드러커경영센터와 한국피터드러커 소사이어티, 뉴패러다임인스티튜트가 공동 개최한 '독일과 네덜란드 경제, 왜 강한가-사회책임 지식경제의 힘' 토론회와, 인간개발연구원이 주최한 '자본주의의 대변화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연회에 잇따라 참석했다.
"오랜 화합의 리더십으로 복지·성장 두 토끼를 잡았다"는, 네덜란드 병을 치유하고 기적을 이끌어낸 비결에 대해 빔 콕은 한국을 방문해 이런 어록을 남겼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1998년 1월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 모델을 수용해 '노사정위원회(2007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2018년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개칭)'를 설립했지만, 아직까지 의미있는 전기를 마련해 내지는 못하고 있다.
노회찬, 2005년 3월 네덜란드를 첫 방문하다 : "해외까지 나와 당원들과의 대화로 밤을 새는 사람"
노회찬은 네덜란드를 두 차례 방문했다. 첫 번째 방문은 17대 국회 법사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했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5년 3월 네덜란드 교민들의 초청으로 아내 김지선과 함께 방문했다.
첫 방문은 2005년 3월. 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위원은 국회 법사위의 해외사법제도 시찰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방문했다. 폴란드 일정을 소화한 뒤 노회찬은 '발칸의 도살자'로 불리던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재판(헤이그 국제유고전범재판소, ICTY)을 보기 위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 2000년 시민혁명으로 실각한 밀로셰비치는 그 뒤 전쟁범죄자로 수감돼 재판을 받던 중 2006년 3월 감옥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1990년대 유고 내전 당시 보스니아계를 잔혹하게 학살한 '발칸의 도살자' 3인방을 심판하는 국제전범재판이 2017년 마무리됐다. 재판 중 옥사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공화국 대통령, 지난해 징역 40년을 선고받은 라도반 카라지치 전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지도자에 이어 세르비아계 군 총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가 2017년 11월 22일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유고 내전에서 벌어진 반인도적 범죄를 단죄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가 다룬 마지막 주요 사건이었다. (…)
무엇보다 ICTY의 경험은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설립하기 위한 로마조약이 채택되는 결실로 이어졌다. (<경향신문>, 2017.11.24.)
일정을 마친 뒤 골프를 치기로 한 다른 의원 일행과는 달리, 노회찬은 유럽 당원들이 많이 있는 독일 뒤셀도르프로 가서 당원 및 지지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간담회 이후 한 당원의 집으로 몰려간 사람들은 평소 인터넷 동영상으로만 봤던 노회찬에게 밤새 질문을 던졌고, 노회찬은 그 질문들을 일일이 받아주며 날이 샐 때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10년 뒤 당시 노회찬을 수행한 민주노동당 유럽지구당 초대 사무국장 장광열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노회찬과 일행이 뒤셀도르프 탄광지역을 찾아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뒤셀도르프를 비롯해 뒤스부르크, 도르트문트, 딘스라켄 등의 도시가 모여 있는 루르 지역이 1960∼70년대 7900여 명에 달하는 한국인 광부들의 피와 땀이 서린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963년 12월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내린 한국인 광부 1진은 딘스라켄의 로베르크 광산에 배치됐다. 로베르크 광산을 포함, 3곳의 광산은 당시 뒤스부르크 함보른 탄광회사에 속해 있었다. 화제를 모았던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가 매몰됐던 곳이 바로 함보른 탄광회사 소유 광산이었다.(<세계일보>, 201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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