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 검은 석탄이 몰리고 있다. 현재 삼척과 강릉에 국내 최대 규모의 석탄화력발전소가 건설 중이다. 주민들은 대기오염의 기휘위기 주범인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을 중단하라고 몇 년째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바로 옆 홍천과 횡성은 송전선로 건설로 갈등을 빚고 있다. 삼척과 강릉에 짓고 있는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생산하는 전력을 보내기 위한 철탑을 세우겠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 갈등과 논란의 시작은 사실 강원도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전력을 사용하지만 전력 생산량은 최하위인 지역, 서울과 경기 지역이다. 정부와 한전은 이들 지역에 더 많은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석탄화력발전소를 짓고 전력을 보내기 위한 송전탑을 짓겠다는 것이다. "왜 수도권에서 소비될 전기를 멀리 강원도에서 생산해서 굳이 새로 송전선로까지 지어가며 실어 나르려는 것일까요." "더 이상 우리 농촌은 수도권의 희생양이 될 수 없습니다."
석탄화력발전소와 송전탑으로 이어지는 지역이 도시에 묻고 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전력이 필요한가. 이웃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력정책에 찬성하는가. 침묵과 방관은 암묵적인 동의나 다름없다. 정의로운 전환에 ON 해야 할 때다.
"철탑? 또다시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
지난 10월 13일 강원도청 앞에서 횡성군과 홍천군 농민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한창 논밭에서 정신이 없을 시기지만 농민들은 송전탑 때문에 생업을 제쳐둔 지 오래다. "깨 털고 고추 따야 하는데 망했지 뭐. 그래도 어쩌겠어? 송전탑 건설되면 다 망하는 건데." 집회에 참석한 한 농민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홍천과 횡성에 들어설 철탑 120여 기
농민들의 한숨은 한전이 추진하는 동해안-신가평 송전선로 사업 때문이다. 한전은 신한울 1, 2호기와 현재 강릉과 삼척에서 건설 중인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생산될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낸다며 울진에서 신가평 변전소까지 총 230km에 이르는 거리에 철탑 440여 기를 세운다는 계획이다. 이 구간 중 한전은 횡성군과 홍천군에 철탑 120여 기를 꽂아 60여 km의 선로를 잇겠다며 지난 3월 25일 경과대역을 선정해 발표했다. 경과대역은 세부적인 송전선로 경과지를 확정하기 전 송전선로가 지나는 구역을 타원형 모양으로 설정한 구역이다. 송전선로 후보지인 셈이다.
한전은 주민들이 참여하는 입지선정위원회를 통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입지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주민들은 입지선정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주장한다. 한전 내규에 따르면 입지선정위원회는 지방의회, 지자체, 이장협의회, 번영회 등의 추천 및 협의를 거쳐 해당 주민대표, 지자체(공무원, 지방의회 의원 등), 분야별 전문가(환경단체, 대학교수 등)로 구성되며 입지선정위를 구성하기 전 주민설명회를 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주민들과 홍천군에 따르면 한전은 일부 지역에서만 설명회를 갖고 입지선정위 지역위원도 특정 지역만 위촉했다.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선 입지선정위에 들어간 이장들이 2017년부터 한전으로부터 물품 후원을 받았고 그래서 쉬쉬한 거 아니냐는 말들도 돌고 있다. 홍천송전탑반대대책위 강석헌 간사는 "밀양 이후 주민수용성을 높인다고 입지선정위를 만들었는데 더 교묘해졌다. 입지선정위원 선정은 비공개로 되어 있고 입선위 결정사항에 대해 위원들은 책임을 지지 않도록 했다. 한전은 무슨 이야기만 하면 입지선정위 뒤로 숨고 입지선정위 핑계로 돌린다. 결국 자기 손에 피 안 묻히고 송전탑 꽂겠다는 것"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주민들뿐만 아니라 지자체도 나서서 이번 결정이 한전의 일방적인 결정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지자체 공무원 자격으로 위원에 참여한 한 위원은 "한전에서 경과대역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부분에서, 기착지하고 종착지를 어느 정도 해 놓은 다음에 입지선정위원들을 불러서 그 테두리 안에서 선정하는 그런 요식행위"라며 입지선정위원들이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몇 차례 항의를 했지만 묵살당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급기야 이에 항의하는 홍천군과 횡성군이 입지선정위에 불참한 사이 경과대역을 결정했다며 홍천군과 횡성군은 입지선정위원회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원칙도 절차도 사라진 입지 선정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전은 자신들이 정한 내규조차 어기며 산사태위험지역을 경과대역에 포함시켰다. 한전이 자체적으로 마련한 전력영향평가기준에 따르면 송전선로 후보지를 선정할 때 산사태 발생지역 및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저항치 100으로 명시하고 경과대역 선정에서 배제하도록 했다. 저항치는 송전선로 후보지를 선정할 때 배제해야 하는 정도를 0~100까지 수치화한 값으로 산사태위험지역, 습지보전지역, 도시지역, 군사보호지역 등을 저항치 100으로 배점해 경과대역에서 원칙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하지만 한전은 이를 무시하고 산사태위험지역을 경과대역에 포함시켜 입지선정위원회에 안으로 올린 것이다.
강원도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가 이를 문제 삼자 한전은 내규를 바꿔버렸다. 별표 5 '송전선로 경과대역 분석기준표'에서 산사태위험지역 배제기준을 삭제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본문에는 산사태지역을 저항치 100으로 한다는 내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에 대해 한전은 해당 사업 구간이 대부분 산악지대로 산사태위험지역을 고려하면 경과지 선정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산사태위험지역을 모두 배제하면 결국 주민 거주지역 가까이 갈 수밖에 없어 관련 조항을 삭제했다고 밝혔다. 결국 입지선정의 원칙을 바꿔서라도 정해놓은 노선을 가겠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내규 조작으로 그치지 않는다. 국민의 안전과 전력수급의 안정성을 흔드는 큰 문제로 이어진다.
횡성군송전탑반대대책위에 따르면 한전이 경과대역으로 선정한 곳은 산사태 위험 수준이 가장 높은 1·2등급이 밀집돼 있는 곳이다. 특히나 횡성군은 지난 2001년 산사태로 피해를 겪기도 했다. 당시 횡성환경연합의 조사 결과 횡성지역 전체 산사태 123개소 중 송전탑으로 인한 산사태가 82개에 이르렀고 산사태 원인으로 송전탑이 지목됐다. 이를 계기로 산림청도 송전탑시설로 인한 산림 피해 방지대책을 발표하며 급경사지, 산사태우려지, 경관보호지역은 원칙적으로 철탑 시설을 제한한다는 내용의 송전탑시설에 따른 업무처리지침을 마련했다.
수요처도 없이 일단 꽂고 보자?
근본적으로 동해안-신가평 송전선로가 필요한가라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이번 사업은 2008년 제4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시작됐다. 애초 사업명은 765kv 신울진-북경기 송전선로였다. 경기북부지역에 변전소를 건설해 경기북부지역에 전력을 공급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2012년 2월 북경기변전소에서 신경기변전소로 계획이 돌연 변경됐다. 경기북부 권역에 460만kw 규모의 민자 화력발전소를 신설해 경기북부에 전력을 공급할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자 사업목적이 경기남부지역의 수요 증가로 바뀌었다. 한전은 여주시·이천시·광주시·양평군 등을 후보지로 올려 신경기 변전소 건설을 추진했지만 2014년 주민들의 반대로 신경기 변전소 건설 사업은 유보됐다. 그리고 2년 뒤인 2016년 한전은 가평군과 신가평변전소 500kv 변환시설 건설 협약을 체결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가평군에 위치한 한전 소유의 765kv 변전소 부지에 동해안 전력을 잇는 변환시설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횡성환경연합은 종착지가 오락가락하는 것은 전기의 수요처가 없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강원도송전탑반대대책위는 보낼 전기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애초 송전선로는 신한울 3, 4호기를 보내기 위해 계획되었으나 신한울 3, 4호기가 백지화되면서 송전선로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가동 중이거나 완공을 앞둔 발전소의 전기는 기존의 765kv 송전선로에 연결하기 위한 공사가 이미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추가로 건설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강릉과 삼척에 건설 중인 석탄화력발전소 때문에 벌이는 사업인 셈이다. 하지만 석탄화력발전소 또한 거센 반대에 직면해 있어 건설이 될지 미지수이며 설령 완공된다 하더라도 기후위기에 역행하는 석탄화력발전의 가동은 확정하기 어렵다.
홍천대책위 강석헌 간사는 "굳이 수요처를 찾자면 수도권 공장에 전력을 보내려고 하는 것이다. 강릉안인발전소를 삼성에서 짓고 삼척석탄화력발전소를 포스코에서 짓고 있다. 결국 대기업이 발전소 건설로 돈 벌고 한전은 그곳에서 나온 전력을 사서 삼성과 포스코 공장에 값싸게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전력 마피아들이다. 전력이 필요하다면 삼성 공장 옥상에 태양광을 올려라"라며 "정부의 정책이 바뀌지 않으면 밀양이 홍천·횡성이 되고 또 다른 피해지역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765kv 피해조사가 먼저
횡성과 홍천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것은 이미 송전탑으로 인한 피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울 핵발전소와 삼척 그린, 북평화력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송전선로가 마을을 지나고 있다. 횡성군에만 765kv가 85개로 전국 지자체 중 가장 많은 송전탑이 몰려 있고 홍천군에도 30개가 있다. 365kv를 비롯한 송전탑까지 포함하면 수백 기가 넘는다. 횡성에서 만난 한 농민은 "송전탑이 머리 위로 지나간다. 한낮에도 돼지 꿀꿀대는 소리처럼 시끄럽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잠을 못 잘 정도다. 철탑 때문에 땅값도 떨어지고 농협에선 담보 대출도 안 해준다. 송전탑 아래에 우리 마을 상수도 관정이 있는데 비 오는 날이나 흐린 날은 차단기가 저절로 내려가 물도 사용하지 못한다. 정부와 한전은 전자파 피해가 없다고 하는데 선로 따라 어르신들이 다 암으로 돌아가셨다. 7명이 돌아가시고 3명이 암 투병 중이다."라고 한탄했다.
한전은 765kv에서 500kv로 변경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크기도 765kv에 비해 75% 수준이며 전자파 피해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500kv 역시 높이 75m, 가로 27m에 달한다. 아파트 25층 높이 철탑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그 위로 전선이 지나가는 것이다. 전자파 논란에 대해서도 주민들은 반발한다. 횡성군송전탑반대대책위는 "전자파 피해가 적다고 선전하는데 그 말은 765kv 철탑의 전자파 피해 정도를 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피해부터 조사하고 주민들을 이해시키고 설득시켜야 하는데 순서가 틀렸다"고 말했다.
제2의 밀양은 막아야
지난 10월 13일 강원도 홍천군과 횡성군 주민들은 강원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동해안-신가평 초고압 송전선로 건설 사업 백지화를 촉구했다
지난 10월 18일 한전은 지자체와 주민들의 반대에도 제18차 입지선정위원회를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백지화를 요구하는 주민들과 한전 측과의 충돌도 발생했다. 주민들은 "횡성과 홍천을 제2의 밀양으로 몰아붙이겠다고 주민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횡성과 홍천 주민들뿐만 아니다. 동해안-신가평 송전선로 구간 지역마다 송전탑 계획으로 논란과 갈등을 빚고 있다. 송전탑이 지나는 곳마다 제2의 밀양이 재현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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