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통증의료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아침에 일어나자 여전히 허리가 아프다. 허리 통증은 으르렁거리며 나를 압박했다. 잠시 나약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새벽에 일어나 주어진 숙제처럼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늘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길 위에 섰다. 아직도 저 먼 곳, 기다림이 있고 설렘이 있는 곳, 새 시대로 들어서는 문을 향해 달려간다.
처음 연애를 시작하는 소년처럼 떨리는 가슴은 안고 허리에 아주 세심한 배려를 한다. 대지 위에 새색시의 발걸음처럼 사뿐사뿐 옮겨놓는다. 처음에는 몹시 아프더니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더니 아드레날린이 샘솟으면서 발걸음은 베티고개 내리막길을 정상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깐 쉬었다 다시 시작하려면 다시 허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안산에서 오산으로 넘어가는 길에서 한 걸음도 옮기기 힘들게 통증이 맹렬히 으르렁 거리며 나를 물어뜯었다.
나는 부득이 오산 숙소까지 차로 이동하고 얼음찜질을 했다. 다음날 어쩌면 완주를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진통제를 먹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몸은 내 간절함을 알은 듯 더 이상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허리 통증이 으르렁거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무사히 임진각까지 올 수 있었고 내 걸음을 막지 않는다면 백두산까지 달려가서 기꺼이 모든 통증의 으르렁거림에 몸을 던질 의사가 있다.
육체의 기억이 알알이 근육에 새겨졌다. 달릴 때 자존감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상승한다. 사람이 사는 게 그렇듯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느낄 때,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할 때이다. 주위 사람이 나를 인정하는 것은 내가 돈이나 명예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남다른 정신이 존재하고 놀라운 기질이 있고,
임진각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평화기원제가 열렸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사는 것은 대동 강가에 남과 북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대동강맥주와 막걸리를 마시며 그야말로 대동제를 펼치는 것이다. 조국의 통일은 정상들끼리 백두산 천지에서 두 손을 마주 잡는다고 오지 않는다. 우리 같은 시민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부둥켜안아야 오는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간절히 북녘 땅 대동 강변 버드나무 아래서 세계적인 평화의 축제가 신명나게 펼쳐지기를 제안한다.
펭귄은 휴식을 취할 때 바다 밖으로 나온다. 얼음 위에서 한참 휴식을 취하고 놀다가 보면 다시 배가 고파진다. 펭귄의 무리는 뒤뚱뒤뚱 줄을 서서 바다로 달려간다. 마침내 바다가 바로 코앞에 펼쳐지는 순간 펭귄들은 멈칫한다. 바닷속에는 물고기가 많아 금방 배를 채울 수 있지만 자신들을 노리는 범고래, 상어, 바다표범, 물개 등 천적들도 많기 때문이다. 바다는 먹이를 구하기 위한 멋진 공간이기도 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공포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럴 때 한 마리 펭귄이 먼저 바다에 뛰어들면 다른 펭귄들도 두려움을 이기고 잇따라 뛰어든다. 처음으로 물속으로 뛰어든 펭귄은 누구보다도 배가 고팠다. 누구보다도 간절해서 용기를 갖고 먼저 물속으로 뛰어든 펭귄은 누구보다도 더 많은 물고기를 먹을 수 있다. 이때 가장 먼저 바다에 뛰어들어 다른 펭귄들도 뒤따라 뛰어들도록 이끄는 펭귄을 퍼스트 펭귄이라고 한다.
긴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 바닷속과 같은 불확실성을 우유성(偶有性)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과감한 퍼스트 펭귄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새로운 일에 처음으로 뛰어드는 일은 생존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항상 위험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재빨리 2등으로 출발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침내 1등까지 앞지른 2등 전략이 언제나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사회였다. 언제나 눈치 보기와 비굴한 처신을 하며 오로지 시험을 잘 보는 머리 좋은 영악한 인간이 두각을 나타냈다.
과감하게 시도하는 스타트업을 선택하면 생존율이 3~5%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번 탈락하여 낙오자가 되면 취업을 하거나 경력을 쌓는데 치명적인 결격사유로 작용한다. 다시 역전의 기회를 잡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자본주의 무한 경쟁체재에서 젊어서 실패하는 것은 재기가 거의 불가능한 낙오자를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도전하지 않고 모험하지 않고 눈치작전만 편다.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세계평화로 귀결되지 않았다.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양분되었고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냉전의 긴장은 사람들의 삶을 갉아먹었다. 그리고 또 냉전이 종식되고도 세계평화는 오지 않았다. 미국은 초강대국이 되었고, ‘America First!’라는 구호 아래는 다른 나라의 안전과 평화는 허울뿐이었다. 미국의 정치인들은 미국국민들이 맘껏 스테이크를 먹으며, 맥주를 마시며 프로 야구나 미식축구를 즐기게 하면 쉽게 표를 얻었고 미국인들은 비만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되는 줄도 모르고 현실에 안착하였다.
구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야만적인 전쟁이 일어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 중동의 화약고는 계속 화염을 발사하고 있다.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들은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가난과 질병을 간단하게 외면했다. 그런 환경은 그들의 무기를 팔기 좋은 환경이었으므로 그들은 오히려 이런 불안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왔다.
간혹 폭정에 시달리던 민중이 일어나 진보적인 정치지도자가 들어서며 역사가 바뀌는가 하는 순간에도 어떤 이유인지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다시 혼란에 빠지거나 미국의 입맛에 맞는 독재자의 손에 여지없이 정권이 넘어가는 절망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 정부는 여지없이 경제를 왜곡시키는 어마어마한 군사 예산을 집행하고 있으며, 모든 부조리와 폭력의 근원인 엄청난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도 없다.
사람들은 변화를 바라지만 무기력하고 피동적이다. 그들은 퍼스트 펭귄이 되어 물속으로 뛰어들어 맞닥칠 천적으로부터의 위험을 감당할 용기가 없다. 다른 누군가가 첫 번째 두 번째가 되어 물속으로 들어간 다음 안전하다고 느낄 때까지 결코 물속으로 뛰어들지 않으려 한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는 사람들은 민첩하다. 우리가 원하는 변화는 사람들에게 안전하다는 확신을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휴전선의 장벽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만큼 높지 않을 수가 있다. 벌레에게 장애물도 노랑나비에게는 좋은 풍광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어쩌면 벌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벌레로 너무 오래 살아왔다. 이제는 노랑나비로 변태를 시도할 때가 왔다.
누구보다도 갑갑증을 느꼈던 내가 먼저 바닷속 같이 길 위에 뛰어들었다. 노랑나비가 되어 휴전선의 장벽을 내려다보며 날기 위해 변태를 시도하려 길 위에 뛰어들었다. 기러기 떼 지어 날고 서풍은 계절을 재촉하는 듯하지만, 백두산 호랑이 한 번 포효하면 곧 동녘 하늘이 밝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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