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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전 세계 사람들과 "글로벌한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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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전 세계 사람들과 "글로벌한 동거"

[우수근의 아시아 워치] 신(新) 열하일기 (5)

8월 13일, 이 하루는 꽤나 길었다. 그토록 쉽게 들락날락거렸던 중국 상하이였지만 이번에는 코로나라는 몹쓸 녀석으로 인해 호텔 방까지 대장정을 거쳐온 것 같았다.

앞으로 2주일을 지낼 호텔 방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정갈했다. 정면의 한 면이 커다란 창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밖으로는 상하이의 명물 황포강(黄浦江)이 유유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창가 왼쪽 끝으로는 상하이의 와이탄(外滩)이 펼쳐져 있었가.

▲ 격리 호텔 창을 통해 보였던 황포강 ⓒ우수근

2주 간의 격리 경과 시간이 늘어가면서 나는 또 다른 무언가도 부지런히 늘어만 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 하나는, 면도를 하지 않아 점점 수북해져 가는 수염이요, 다른 하나는 둥근 세상에 순응해 가려는 듯 동글동글해지는 내 얼굴. 아, 어쩌다가 이다지도 빨리 '미스터 보름달'이 되어 가고 있는고?!

그러고 보니,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격리 시작 후 나는 희한하게도 하루 세 끼를 다 먹는 데도 계속 배가 고팠다. 너무 허기가 졌다. 고3인 내 아들도 이렇게 마구 흡입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내가 어쩐 일인지 늘 배가 고프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얼굴도 몸도 동글동글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닌 것 같다. 아직 격리와 관찰 기간 등이 채 끝나지 않아, 우선은 매일 90분 정도 줌 화상으로 만나고 있는 "동료"들도 서로 뒤질세라 "동글이 경쟁"에 나서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불현 듯 나의 삶도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55년 세월을 살아 오다가 전 세계에서 온 전혀 새로운 사람들과 또 하나의 새로운 단체를 이루게 되다니, 그들과 동료가 되어 수개월간 한 배를 탄 채 "동거"하게 되다시피 하다니 그것도 참 재밌는 일이었다.

▲ 프로그램에 참가한 각국 인사들. 격리 기간 중에는 하루 90분씩 화상으로 대화를 나눴다. ⓒ우수근

앞에서 이미 밝혔듯, 어떻게 하다 보니까 나는 한국 사회에서 누구 못지 않게 글로벌한 경험을 지니게 되었다. 20대~30대 사이의 일본, 미국 및 중국 유학, 30~40대의 중국 대학에서의 교수 생활 등을 통해 20년이 넘는 세월을 해외에서 직접 "글로벌"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 유학 시절인 20대에는 일본 정부 초청 국비유학생들이 모여사는 '고마바 유학생회'에서 전체 유학생 회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G2였던 일본으로 전 세계 80여개 국에서 몰려온 수백 여명의 외국인 청년들과 하나가 되어 지내는 가운데 '글로벌' 사회를 일상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중국 대학에서의 교수 생활 때는, 일주일에 3~4번 있는 수업 시간에 그야말로 전 세계를 주유하게 되었다. 당시 재직중인 대학에는 150여개 국으로부터 5000여 명의 외국인 유학생들이 와 있었다.

국제학부에 소속되어 있던 나는 그들에게 <한중일 비교>나 <글로벌 사회의 이해>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하지만 말이 가르친 것이지, 사실은 내가 듣고 배우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격이 또 다른 형태에서 또 다시 전 세계와의 만남을 가지게 됐다. 우선 이번에 함께 지낼 이들은 학생은 아니다. 이들은 중국 정부가 초청한 각국에서 명망을 지닌 인사들이었다.

주로 아프리카와 다양한 아시아 지역에서 온 이들은, 전현직 장차관이나 정부 고위 관계자 및 언론 관계자, 사회단체 지도자 등으로 이뤄졌다. 중국 정부가 글로벌 사회에서 중국에 대한 이해를 넓히며 이들과의 우호와 친선 등을 강화해 나가기 위해 조언을 구하고 실제로 협력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주로 초청했다. 이곳에 나는 유일한 한국이이자 동북아 국가에서 초청받은 유일한 동북아인으로서 참가하고 있다.

다음으로, 모두 것이 다르고 낯선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중국을 매개로 만났다는 점이다. 앞으로 우리는 베이징을 중심으로 주요 지방들도 시찰하는 가운데 중국의 A~Z에 대해 폭넓고 깊이 있게 다가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다양한 정관계 및 재계 지도자들과의 네트워크도 맺게 될 것이다. 이를 토대로 귀국하여 자국과 중국과 관계 강화 및 국제 협력 등을 위해 노력해 주길 바란다는 것이 본 프로그램의 취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은 "우리 나라 대표로 내가 참가하게 됐다"는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오늘날 이 시점의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동시에 중국에 대한 관점이 우리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러 이유 등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인식이 썩 좋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들 국가에서의 중국의 위상은 퍽 다른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 지역에서 중국은 이미 '대세'가 되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 오늘날과 같이 54개의 국가가 존재하게 된 것은, 사실, 아프리카의 다양한 민족과 문화 등과는 무관하게 이뤄진 것이다. 식민지 시절, 서구 국가들의 정치적 야욕과 또 자기들끼리의 '아프리카 나눠 먹기' 등의 이해 관계를 토대로 이리저리 멋대로 분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로 다른 민족이 섞여 한 나라가 되었고 종교와 문화 등이 다른 사람들도 하나의 국가 속에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와 같은 다양한 마찰과 충돌이 끊이질 않게 되었다. 서구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질적인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놔야, 서로 싸우는 가운데 우리에게 대항하지 못하지 않겠는가"가 된다.

이것만 봐도, 아프리카인들이 서구 사회에 대해 일반적으로 어떤 인상을 지니고 있을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들에게, 자신들과 같이, 과거에 서구의 외침을 받으며 수난을 겪어 온 중국이 동병상련 등을 토대로 다가온 셈이다.

게다가 가장 큰 현안인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도 중국은 통 큰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니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 및 이와 관련된 이야기 등은 앞으로도 이어질 연재를 통해 소개하도록 하겠다.

이처럼 나는, 나이가 50대 중반에 접어들 무렵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아프리카 및 중앙 및 서남아시아 지역 사람들과 새로운 항해를 하게 됐다. 연암 선생은 청 나라에 가서 주로 그 안의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통해 당시의 국제사회에 다가가고 이해했다. 그런데 나는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인사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오늘날의 글로벌 사회에 한 걸음 더 깊게 다가가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둘째야, 너는 역마살이 단단히 꼈단다"나를 걱정해 주시곤 했다. 하지만 이런 역마살이라면, 그동안 축적해 온 글로벌 삶을 토대로 한층 더 깊이 있고 폭넓은 글로벌 삶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우수근 교수는 <한중글로벌협회> 회장 및 중국 관련 인터넷 전문 매체인 <아시아팩트뉴스>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위 글은 <아시아팩트뉴스>에 연재됐던 '우수근의 신열하일기'를 새롭게 가감수정하여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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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근

우수근 교수는 일본 게이오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미네소타대 로스쿨을 졸업했습니다. 상하이 화동사범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거친 뒤 상하이 동화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발견>, <캄보디아에서 한‧일을 보다> <한국인 우군의 한‧일의 장벽이란 무엇인가>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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