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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쓰는 가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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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쓰는 가을 편지

[한라에서 백두까지] 6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바람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나 보다. 사통팔달 어디든 통한다. 그렇더라도 약간의 원칙은 있다. 이맘때 부는 바람은 대개가 서풍으로 하늬바람이라 부른다. 그 바람이 불 때면 늘 어딘가 가슴이 허전하고 답답하다. 하늬바람이 나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하면 허전한 가슴과 묘한 화학작용이 일어나 달리는 몸 자체가 가을 편지가 되어버린다. 누구라도 그리운 사람이 나를 만나면 쉽게 읽혀지는 편지이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아직도 아쉬워하는 연서이기도 하고, 못 다 이룬 꿈을 스스로 다지는 글이기도 하다. 자주보지 못하는 친지, 동무들을 그리는 마음이 가득 담은 편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살아생전 살갑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운 사부곡의 편지이다. 사무치게 몸으로 쓰는 편지가 내 마음을 싣고 대동 강가 송림의 어느 곳에 혼으로 나마 떠돌고 있을 그곳에 가을바람을 타고 날아갈 것 같다. 편지가 때론 막힌 사람 사이의 길을 바람처럼 시원하게 뚫어주기 때문이다.

하늘이 유난히 높은 10월 어느 멋진 날, 오늘도 편지 한 통을 띄우려 새벽 일찍 일어난다. 몸이 펜이 되고 땀이 잉크가 되어 가을편지를 쓴다. 여울물이 빠르게 흐르면 물방울이 생겨나고 사람의 몸이 빠르게 움직이면 피부에 물방울이 생겨나는데 우리는 그것을 땀이라고 한다. 땀으로 쓰는 편지보다 신실하게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없다.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편지는 가슴속에만 자리 잡고 있는 은밀한 서정을 진솔하게 담아낼 수 있어 좋다.

모공이 열릴 때 나와 자연은 하나가 되기 시작한다. 달리는 동안은 가을과 가장 에로틱한 만남의 순간이다. 모공이 열리기 시작하면 온몸의 신경이 다 일어나 사랑하는 상대를 깊고 아련하게 느낀다. 가을 햇살에 잠자리 날개처럼 빛나는 계곡의 물결을 내려다보며 가을바람처럼 가벼워진 몸으로 계속 힘차게 달린다.

돌이켜보면 인류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얻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곳이 있을 때 이렇게 달렸다. 때론 간절한 그리움을 찾아 정처 없이 달리기도 한다. 달리기란 두 발과 대지의 만남과 이별이 빚어낸 하나의 궁극(窮極)이다.

달리면서 나는 가끔 내가 과연 무슨 힘으로 이렇게 끈질기게 달리고 있는가 생각해본다. 어머니는 언제나 부드러우면서도 강했다. 난 늘 어머니가 가슴에 표범을 키운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가 키우던 그 표범을 내가 맡아서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안에 있는 표범은 그리움을 아는 표범이다. 먹이를 쫓아 달리지 않고 그리움을 찾아 달린다. 내 마음에 그리움이 생기고부터 나는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마음에 그리움이 생기고부터 나는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든 괘방령을 힘겹게 넘으며 몸을 펜으로 삼고 땀을 잉크로 삼는 나의 가을편지를 쓸 것이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을 영향력을 가진 남북의 두 지도자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신실한 편지를 쓸 것이다.

지금 하늬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상서로운 기운을 잘 다스리면 한반도와 동북아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중요한 변곡점(變曲點)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용단을 내릴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편지를 쓸 것이다. 남북의 평화통일은 세계통일 인류공영의 첫 시발점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통일이 나비효과가 되어 이 지구에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한 태풍이 되어 온 세상의 기본질서를 모두 날려 보내고 새로운 개벽 시대를 펼쳐나가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오른다.

어쩌면 우리는 아라비안나이트의 거인 지니처럼 호리병에 갇혀서 누가 우리를 꺼내 주기만을 기대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호리병은 생각보다 훨씬 약해서 조금만 힘을 줘도 깨져버리는 달걀 껍질 같은 것인데도 말이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4대 강국은 어쩌면 달걀 껍질보다 약할지 모른다. 그러니 남북의 두 지도자가 두 손을 마주잡고 발길질 한번 힘을 모아 제대로 하면 깨질 텐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가을에 발길질 한번 멋지게 해보시라고 편지를 쓸 것이다. 색깔 좋게 물든 은행잎 한 장 동봉해서!

가을이 사각사각 밟히는 고갯길을 내려오는데 차가 지나가더니 앞에 서서 기다린다. 다가가자 차에서 내리더니 물과 영양갱 등 한아름을 전해주면서 말한다. “응원합니다. 힘내세요! 꼭 백두산까지 가세요.”모르는 여자의 손길에서 읽혀지는 가을편지가 아름답다.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을 만나 평화가 온다면 끝없이 달려도 지치지 않으리! 오랜 고통과 외로움 끝에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을 만나 부둥켜안는 순간, 온전한 두 날개를 갖춘 봉황이 된 줄 안다면!

ⓒ강명구
ⓒ강명구
ⓒ강명구
ⓒ강명구
ⓒ강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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