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이지만, 12.12 군부 쿠데타 주동 세력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정치 군인'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피하지 못한다.
노 전 대통령의 생애는 1951년 육사 11기 동기로 인연을 맺어 함께 12.12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대부분 겹친다.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자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은 육사 생도 및 장교단의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주도하며 '정치군인'의 길을 걸었다.
특히 훗날 정치 개입 폐단의 진앙으로 지목되는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전 전 대통령의 주도로 결성했으며,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된 뒤 12.12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다. 공교롭게 노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의 사망일과 일치하는 날에 별세했다.
12.12 쿠데타 당시 9사단장이던 노 전 대통령은 최전방부대를 동원해 쿠데타에 결정적으로 기여해 '전두환 후계자'의 기반을 닦았다.
1974년 장군으로 진급한 이후엔 신군부의 2인자로 제 9공수특전여단장, 청와대 작전차장보, 보안사령부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80년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냈다.
이후 제5공화국에서 1981년 정무2장관, 대통령 특사, 1982년 체육부 장관, 41대 내무부 장관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전두환 정권의 2인자 발판을 다진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민정당 총재가 됐으며, 전 전 대통령의 추천으로 민정당 대선후보로 지명됐다. 결국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겨룬 1987년 대선에서 승리하고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직접 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지만, 이는 전 전 대통령이 대통령 간선제 유지를 위한 4.13 호헌 조치 발표로 6월 민주화항쟁이 거세지자 6.29 선언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린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형성된 정치체제가 바로 '87년 체제'다.
노 전 대통령은 군부 출신이지만 민주적 절차에 의해 탄생된 만큼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갈등이 불가피했다. 취임 뒤 '5공 청산' 요구가 강해지고 '전두환 구속' 목소리가 높아지자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권고로 백담사로 떠났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법정의 심판을 받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이후 집권한 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95년, 12.12 쿠데타 내란과 5.18 민주화운동 폭력 진압 주범으로 지목돼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구속 기소됐으며,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징역 17년이 확정됐다.
그러나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 통합 차원에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김 전 대통령은 당선 후 이들을 특별사면했다.
똑같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압과 12.12 쿠데타에 가담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후 행보도 다소 차이가 있다. 전 전 대통령과 달리 노 전 대통령은 추징금 2628억 원을 완납했으며 아들 노재헌 씨가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조화를 보내고 사과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2002년 암 투병 생활을 시작한 노 전 대통령은 외부 활동을 삼갔고 전 전 대통령과 교류도 드물었다. 다만 2014년 전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을 병문안한 자리에서 "나를 알아보겠는가"라고 물었던 일화가 있다.
노 전 대통령의 별세로 전두환-노태우 인연은 막을 내렸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2009년), 김영삼 전 대통령(2015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2018년)에 이어 노 전 대통령까지 생을 마감해 '1노3김'이라는 정치의 시대도 마침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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