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작품은 갑자기 냉혹한 게임 속에 던져진 이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그린다. 시청자는 그러한 상황에 부닥친 그들을 안타까워하기도, 혹은 생존을 위해 다른 이들을 손쉽게 희생시키는 모습에 분노하기도 한다. 한편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게임의 판을 설계하고 그 속에서 허둥대는 참가자들을 보며 쾌락을 즐기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어릴 때 우리가 참여했던 게임에서처럼 '좋은 편'과 '나쁜 편' 또는 '우리 편'과 '남의 편'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그것은 참가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게임 속으로 들어왔으며 생존한 이들은 다른 이를 죽음으로 몰아낸 공모자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 속에서 생존만이 시대정신이 된 현 사회를 풍자한 작품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해석에 공감 가는 이유이다.
대학의 생존주의와 민주주의에 관한 글을 엉뚱하게 드라마 감상으로 시작한 것은 최근 이 작품을 시청하면서 내가 몸담은 대학 시스템을 비롯한 학계 전반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교육부의 '대학기본역량진단' 평가 결과 발표는 대학의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공포, 혹은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전국 52개 대학이 '기본역량' 미달로 평가되어 앞으로 3년간 학교당 140억 원 규모의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탈락한 인하대, 성신여대 등 수도권 대학은 자신보다 역량이 부족한 지방대학이 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반면 탈락한 지방대학은 지방의 어려운 환경을 배려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공정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정성' 논의 속에서 구조조정 자체가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저출산으로 인한 학령 인구의 감소에 맞추어 대학이 구조조정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시대정신처럼 공유되는 상황에서 문제 제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구조조정 과정 중에 대학과 학계의 가장 큰 화두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되었다. 생존에 대한 고민은 단순히 대학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존 가능성이 큰 대학도 일부 전공과 학과에서는 점차 도태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떠돌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 또한 내가 연구하는 학문이 대학의 생존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다른 모든 고민을 압도하게 되는 것 같다. 동료 학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 중 하나는 어떤 대학에서 어떤 학과가 사라졌다거나 교수 수를 줄였다거나 하는 것인데, 보통 쓴웃음을 지으며 대화가 마무리되곤 한다. 결국 이러한 구조조정 속에서 대학과 학계에 만연하는 것은 퇴출의 공포가 추동하는 생존주의뿐인 것 같다.
사실 대학 구조조정의 역사는 더 오래되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김영삼 정부의 대학 경쟁력 강화에서부터 시작된다. 부실 사학이나 타성에 젖은 교수 등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다지만 실상 대학의 신자유주의화와 뒤섞여 구조조정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본다면 학령인구의 감소 역시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를 추동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일 가능성이 크다. 학령인구의 감소는 오히려 대학 교육의 질을 높이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의 대학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1.8배에 달하는 상황에서, 교수의 수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 수 감소를 받아들이고, 이에 따른 등록금 부족분을 국가가 지원해 대학 교육의 질을 높이면 어떨까? 국가 재정을 모르는 철없는 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생존주의라는 명제 앞에서 구조조정 외 어떠한 대안도 논의할 수 없는 현재의 분위기이다.
대학 구조조정은 퇴출의 위험에 직면한 '부실 대학'의 문제만은 아니다. 생존주의 속에서 퇴출과 무관한 대학 역시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데, 무엇보다 큰 변화는 대학의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학이 언제부터 민주적이었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 대학은 더 많은 구성원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학은 스스로 봉건화하고 있다. 대학 내 수많은 층위의 교원을 계급화해 서로 다른 권리와 책임을 부여하며, 이때 다양한 형태의 비정년트랙 전임 교수와 비전임 교수, 강사에게 더 적은 권리와 많은 책임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전임 교수는 논문을 쓰면 지원금을 받지만, 비전임 교수는 논문을 쓰지 않으면 계약이 해지될 가능성이 크다. 또 비전임 교수는 더 많은 연구 업적을 생산할 것을 기대받는데, 연구비 수주나 정부 지원 사업을 따내는 데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교육과 연구에 있어 비전임 교수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이들은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한 비전임 교수가 연구소의 근로조건 문제를 제기했다가 폭언을 듣고 사과를 요구받았던 최근 포스텍 사례처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 외려 모욕 받고 협박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전임 교수들 역시 생존을 위해 전력투구해야 하기에 목소리를 낼 여력도 없다.
더 큰 문제는 대학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주체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학의 구성원들이 국가에 자율성을 가지고 미래를 민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만 대학의 민주주의가 성립된다. 하지만 현재의 대학은 교육부가 설정한 기준과 목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달성하여 별다른 문제 없이 국가의 지원을 받는 곳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자율성을 상실하면서 대학은 생존을 위해 어떤 일이든 가능한 공간이 되었다. 대학 평가의 중요한 기준인 충원율, 취업률 등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과와 교수들은 더욱 위축되며 차별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리고 대학 내 중요한 많은 문제들은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필자가 재직 중인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는 올해 초 총학생회장이 다른 학생회 여간부들을 성추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학내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총학생회장이 제적당하고 검찰에 기소되었다. 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 등의 2차 가해가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이에 대해 피해 당사자만 아니라 교수들도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피해자 보호를 요구했으나 학교는 이를 무시하고 적극적인 조처를 하지 않았다. 얼마 전 통과된 '방송통신대법'을 홍보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결국 생존주의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 하에서 대학은 점차 황폐해져가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쇠퇴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 속에서 생존한 대학은 과연 우리가 원하는 대학의 모습일 것인가? 대학의 이름을 한 괴상한 형태의 교육기관은 아닐 것인가? 민주주의보다 선행되고 있는 생존주의는 실제로는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라는 효율화 정책일 따름이며, 그 결과 대학 구성원들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와 민주적 공간을 상실하고 있다. 공포에 휩싸이지 않고 대학의 미래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을 때 대학 내 민주주의는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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