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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 일하던 중 태어난 희귀질환아, 누가 책임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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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삼성에서 일하던 중 태어난 희귀질환아, 누가 책임져야 할까

[반도체 아이들의 가려진 아픔] 어려운 싸움을 시작한 아버지

머리끝이 아버지의 허리께에 닿는 열네 살 아이의 키는 유난히 작아 더 눈에 들어왔다.

"안냐세요, 안냐세요!"

어눌한 말투 역시 나이와 어울리지 않아 귀에 더 박혔다. 기자에게 인사를 하는 몇 초의 순간에도 최지후(14, 가명)는 가만히 있질 못했다. 옆에 선 아빠의 손을 잡아 끌고, 꼬집더니 괜히 가방을 뒤적였다.

"지후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 와서 신난 것 같아요. 아이가 말을 잘 못하니까 꼬집거나 때리면서 기분을 표현하거든요."

갑자기 지후는 운동장 쪽으로 뛰었다. 아버지 최현철(가명. 40세) 씨도 덩달아 달렸다. 아들과 아버지는 운동장에서 뛰어 놀았다. 지후 엄마 김민아(가명) 씨가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외쳤다.

"지후야, 그만! 천천히, 천천히!"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아이를 말렸다.

"지후는 달팽이관 손상이 심해서 평형기능이 약하거든요. 저렇게 돌면서 뛰어다녀도 어지러운 줄 몰라요."

▲ 최현철(가명) 씨와 아들 최지후(가명) 군이 학교 운동장을 뛰고 있는 모습. ⓒ주용성

얼마 뒤, 지후가 아버지 손을 잡고 엄마 곁으로 더디게 걸어왔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아이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눈꺼풀이 오르내릴 때마다 검고 흰 눈동자가 보이는 오른쪽과 달리 지후의 왼쪽 눈은 살구 빛이었다.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쪽 귀 뒤쪽 검은색 물체에도 자꾸 눈이 갔다. 아이가 곁으로 왔을 때, 안 보는 척 슬쩍 검은색의 정체를 살폈다. 청각을 돕는 기계장치 ‘인공와우‘였다.

지후는 방금 자기 부르는 엄마 목소리를 이 기계의 도움으로 오른쪽 귀로만 들었다. 지후 왼쪽 귀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지후는 오른쪽 눈으로만 세상을 본다. 왼쪽 눈꺼풀은 외부에 반응하지 않고 늘 처져 있다. 손으로 눈꺼풀을 열어도 볼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시신경이 없기 때문이다.

"놀이터에 가면 아이들이 ‘좀비 같다‘고 지후를 놀리곤 해요. 인공와우 장치가 반짝반짝 빛나기도 하거든요. 그럴 때 정말 속상하죠."

엄마 김 씨의 말을 듣고서야, 기자 역시 놀이터의 아이들처럼 지후를 빤히 살폈다는 걸 깨달았다. 종일 비가 내린 9월 1일, 경북 포항의 한 사립 특수학교에서 이렇게 지후 가족을 만났다.

지후는 ‘차지증후군‘(CHARGE Syndrome)을 앓고 있다. 1만 명당 1명꼴로 나타나는 선천성 희귀질환이다. 시각신경 이상, 난청, 심장질환, 생식기 이상, 발달장애 등 여러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게 특징이다.

현재 지후의 심장 판막은 불완전하게 열려 있다. ‘선천성방실중격결손‘과 ‘대동맥협착‘으로 심장수술을 이미 두 차례 받았다. 여기에 지후에겐 생식기 기형, 후비공 폐쇄 증상, 발달지연도 나타났다. 지후의 키는 약 130cm. 초등학생 1학년 평균 키에 해당한다.

지후는 열네 살이지만 2년을 유예해 특수학교에 다닌다. 학교를 마치면 언어, 음악, 운동치료가 이어진다. 평소에는 '장애아돌보미'가 지후를 사설 치료실까지 데려가는데, 이날은 아버지 최 씨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주세요!"

치료실까지는 15분, 지후는 가만히 있질 못했다. 기자의 핸드폰을 가져가 만지고, 사진기자 카메라를 뺏으려 안간힘을 썼다. 뜻대로 되지 않자 카메라 앞에서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였다. 지후는 최근 과잉행동을 진단받아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

이동하는 내내 차 룸미러로 아들을 살피던 아버지 최 씨는 치료실에 도착한 뒤에야 긴장이 조금 풀린 듯했다.

"지후는 다섯 살 때 인공와우 이식 수술을 받았는데, 그 뒤부터는 차를 오래 타면 안 돼요. 인공와우를 이식하면, 다른 사람이 못 듣는 차 엔진 소리까지 들린다고 해요. 집, 학교, 치료실이 가까워야해서 최근에 이사도 했어요."

아이 특수학교 중심으로 거처를 정하다니 보니, 최 씨의 직장은 멀어졌다. 그의 일터는 포항 집에서 차로 약 1시간 30분 걸리는 경남 양산시에 있다. 긴 출퇴근 시간과 교대근무 탓에 최 씨는 평소 회사 근처 원룸에서 생활한다.

최지후(가명) 군이 사설 치료실에서 언어 치료를 받는 모습. ⓒ주용성

이사와 출퇴근은 어떻게든 해결했지만, 지후의 아픈 몸과 앞으로의 삶은 해결이 난망하다. 아이 미래를 생각하면 아버지 최 씨 가슴은 삼성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을 때처럼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최현철 씨는 2004년부터 삼성 LCD (현 삼성디스플레이) 천안 사업장에 취업했다. 그는 유리기판 위에 화소를 조절하는 층을 만드는 'TFT 공정'에 배치됐다. 공정 마무리 단계에서 제품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는 설비 관리, 독성유기용제인 이소프로필알코올(IPA) 용액을 흰 천에 부어 장비 닦는 일을 주로 했다.

"설비 세척이 끝나면 헛구역질, 두통을 자주 겪었죠. 심할 때는 구토를 했고요. 니트릴 장갑은 손목까지만 보호하니까 종종 틈새로 맨살에 용액이 묻곤 했습니다."

'산업안전보건공단' 사이트에 공개된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에 따르면 IPA는 생식독성물질로 구분된다. 임신율 저하, 태아 사망 증가 등 생식 독성이 나타났다는 동물 실험 결과도 있다.

또한 TFT공정에서는 질산, 황산, 염산 같은 여러 화학물질을 사용한다. 공정 과정에서는 에틸렌글리콜, 오존 등과 같은 생식독성 관련 물질이 검출되기도 한다.

자신의 업무환경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거라 생각 못한 최 씨는 아내가 지후를 임신한 2007년 무렵에도 IPA 용액을 다뤘다. 최 씨는 2008년 지후가 희귀질환을 안고 태어났을 때도 자기 노동환경을 의심하지 않았다.

1만 명당 한 명이 앓는다는 병. 우연과 운명으로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원인을 알고 싶었다. 최 씨는 차지증후군 발병 원인을 분석하는 서울대병원 임상 연구에 2010년 아내와 함께 참여했다.

병원 측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가족력은 아니"라고 했다. 실제 2011년, 2017년에 각각 태어난 지후의 두 동생에겐 선천성질환이 없다.

최 씨는 2011년 삼성디스플레이를 그만뒀다. 이때까지도 자신의 업무와 지후의 아픈 몸을 연결지어 사고하지 않았다.

'아이 아픈 게 혹시 내가 했던 일 때문일까.' 최 씨는 전 직장 삼성디스플레이가 전자산업의 직업병 위험성을 인정하고 회사 차원에서 피해자를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혹시…' 하는 생각을 품었다.

그는 2019년 삼성지원보상위원회에 지후 선천성 질환에 대한 경제보상을 신청했다. 얼마 뒤인 같은 해 5월, 삼성으로부터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최현철님의 산업보건 지원보상 신청에 대한 보상금이 지급되었습니다.'

좋기는커녕 당혹스러웠다. 지후의 아픈 몸은 자신의 노동환경 탓일 수 있다는 걸, 전 직장이 알려준 것 아닌가.

"내가 삼성디스플레이에서 일했기 때문에 지후가 아프게 태어난 걸 수도 있구나… 충격을 받았죠. 아내랑 아이한테도 너무 미안하고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더라고요."

충격과 죄책감에만 빠져 있을 수 없었다. 아이는 자라고, 또 살아야 하니까. 최현철 씨는 근로복지공단에 태아산재를 신청하기로 했다. 아버지 업무 환경으로 선천성 질환을 앓는 아이가 태어났으니 산재를 인정하라는 취지다.

엄마가 아닌 아버지의 업무 환경으로 인한 태아산재 신청은 최 씨가 대한민국 최초다. 유산은 물론이고 선천성질환아 출산은 그동안 ‘엄마의 일‘, 즉 여성 노동환경에서만 그 원인을 찾았기 때문이다.

▲ 최현철(가명) 씨와 아들 최지후(가명) 군이 학교 운동장을 놀고 있는 모습. ⓒ주용성

최 씨의 바람이 이뤄지려면 넘어야 할 벽이 많다. 우선,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법)은 부모의 업무상 요인으로 인해 선천적 장애나 질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산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2021년 10월 기준 태아산재 관련 개정안이 총 5개 발의됐지만, 모두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임신한 여성 근로자를 중심으로 이뤄진 논의 탓에 남성 근로자는 적용 대상에서 아예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

김명희 국립중앙의료원 공공보건의료연구소 연구원은 “현재 발의된 개정안은 수정란 형성 이전 단계에서 부성 측 노출에 의한 태아 건강손상 가능성을 배제했다“면서 “태아 산재보상 요건에 부성 측 노출 연관성을 포함하는 게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최 씨는 까마득한 장벽, 희귀질환 만큼이나 해결이 어려운 과제를 마주한 셈이다.

지후의 언어치료를 마치고 함께 집에 도착했을 땐 늦은 오후였다. 지후는 배가 고픈지 다시 아버지 팔을 붙잡고 연신 "사과, 바나나"를 반복했다. 지후가 과일을 먹을 때 아버지는 방에서 사진첩을 꺼내 거실로 나왔다.

"어릴 때 지후 아픈 모습이 궁금하시죠? 그 사진이 어디 있더라…."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자라온 모습이 담긴 두꺼운 사진첩. 지후는 지금보다 훨씬 어린 시절부터 ‘브이’ 포즈를 자주 취했다. 그때도 왼쪽 눈꺼풀은 눈동자를 덮고 있었다. 손발이 작아 머리에 수액 바늘을 꽂고 콧줄로 영양을 섭취하던 신생아 때 사진도 보였다.

오래전 사진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을까. 최 씨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태아산재를 신청한 이유를 설명했다.

"저랑 비슷한 사람이 분명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 가족의 고통을 나누면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인터뷰와 취재에 나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산재 인정까지는 길이 멀지만 최선을 다 해보려고요."

지후는 또래에 비해 키가 작고, 사회성이 부족하지만 성장이 아예 멈춘 게 아니다. 더디지만 어제처럼 오늘도 자라고 있다. 언젠가는 성인이 되고, 어느 국면에선 부모 도움 없이 살아야 할 수도 있다.

한국은 이미 건강보험제도로 지후의 치료비 상당액을 책임진다. 교육청은 지후의 특수교육과 언어 치료비 등을, 여성가족부는 지후의 이동 편의를 지원한다.

누구든 일하다 다치거나 사망할 수 있다. 국가는 그 당사자와 가족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산재보험제도를 운영한다. 그렇다면 부모의 노동환경 탓에 선천성질환을 안고 태어난 아이는 누가, 어떻게 책임져야 할까?

어려운 싸움을 시작한 지후 아버지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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