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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 과학'의 시대, 생태적 상상력은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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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청부 과학'의 시대, 생태적 상상력은 죽어가고 있다"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⑥ 생물학 밖에서 만난 생태주의자

과학적 진리는 유행에 민감할까? 터무니없다. 열역학이나 만유인력의 법칙이 때와 장소에 따라 바뀐다던가? 과학은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사회 분위기에 흔들리는 이론이 아니다! 하지만 과학계 현실은 어떤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많은 과학자는 거대자본이 저지른 환경오염의 현장이나 권력이 추진하는 개발 앞에서 침묵하거나 엉뚱한 논리로 진실을 덮으려 했다. 1994년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현장에 나타난 당시 과학기술부 차관은 엉겁결에 "과학은 정치의 시녀"라고 실토했는데, 일찍이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은 과학도 주도권 경합으로 이론이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다.

찬란했던 과학 성과도 당시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프레온'이란 상표명으로 등장한 염화불화탄소가 호흡기에 치명적인 냉매, 암모니아 가스를 안전하게 대체한다는 사실에 환호했지만, 장차 그 물질이 오존층을 파괴하리라 당시 과학은 짐작하지 못했다. 현재 코로나19 백신을 안전하게 냉각하는 냉매는 프레온과 달리 오존층 파괴의 주범은 아니라던데, 내내 안전할까? 1970년대 도입한 황소개구리가 양식장을 빠져나와 고유 생태계를 교란할 가능성을 과학자는 예측 못 했을까? 알 수 없는데, 수달이 황소개구리를 잡아먹으며 늘어날 거라 예상했을 리 없다.

수돗물에 불소를 적당량 섞으면 이를 튼튼하게 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확인한 미국의 치과의사가 환호했다고 했다. 그들은 과학이라 믿었다. 엄혹하던 시절 민주화운동을 지원한 치과의사도 그리 믿었다. 생물학을 전공해 그랬는지 불소라는 물질에 관심 기울이지 않았는데, 민주화운동에 부채 의식이 있던 차에 후배인 치과의사가 내민 서명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군사정권 시절 치도곤당한 사실도 있다. 모든 약은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건 진리다. 그 진리를 이해하기에, 독극물인 불소도 희석하면 이를 튼튼하게 한다는 그의 논리를 믿기로 했는데, 곤란한 상황을 만났다.

과학을 공부한 탓인지, 근거를 확인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양성을 이해하므로 생명공학을 받아들이면 장차 위태로운 환경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직감하고 행동에 나섰지만, 평소 생각해본 적 없는 과학기술 분야를 만나면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거대자본과 권력이 중앙에서 지배하는 핵발전과 석탄화력발전을 반대하는 데에 큰 고민이 필요 없었지만, 수소연료는 그렇지 못했다. 평소 신뢰하는 활동가의 행동에 대한 확신이 생길 만큼 공부가 필요했는데, 수돗물 불소화는 뜻밖이었다.

과학 중에 말랑말랑한 생물학, 생물학 중에 말랑말랑한 생태학이 좋았다. 표현된 유전자를 조사해 진화 관계를 생태학과 연계하며 검토하는 전공은 논란이 많은 만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야 효과가 있는데, 논란을 허용하지 않는 진리도 있다. 어떤 종이든 타고난 유전자의 다양성을 잃으면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한데 생명공학이 근사하게 그린 성과는 유전자를 단순화해야 가능한 과제였다. 기후변화로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환경에서 치명적인 기술이건만, 생명공학자는 눈을 감았다. 감언이설로 자본과 권력을 등에 업었다.

학술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이 돌연히 부각한 생명공학자의 주도로 2000년 전후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우리 사회에 남발되었고, 생명공학에 열광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유사 이래 최대의 국가 자산으로 등극할 거라 믿는 정치 권력의 지원으로 생명공학 연구비가 거침없이 확대될 때, <녹색평론>에 원고를 보냈다. 절박한 마음이 앞서 중언부언했지만, <녹색평론>은 흔쾌히 게재를 허락했다.

환경단체와 종교단체, 그리고 여성단체가 연대한 '생명안전윤리연대모임'의 사무국장으로 행동하던 1998년 11월이었다. 그 무렵 무리했는지, '원인 불명 혈흉'이라는 진단으로 입원해 재채기는커녕 하품도 할 수 없었을 때, 김종철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숨이 가빠 긴 통화는 어려웠는데, "명민"한 글을 보내주어 고맙다고 했다. '명민'의 판단기준은 인문학자마다 다를 텐데, 선생은 문장보다 내용에 무게를 두었을 게 분명하다. 골치 아픈 과학 이론을 시시콜콜 이해하지 않아도 인문학자의 직관으로 생명공학에 거부감이 들었나 보다. 수돗물 불소화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군사독재정권은 다른 의견을 폭력으로 억압했다. 건강한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건강한 사회도 다양성이 근본이거늘, "건강한 사회를 위한"다는 명분을 자랑스러워하던 치과의사들은 왜 수돗물 불소화에 대한 김종철 선생과 <녹색평론>의 부정적 의견에 진저리쳤을까? 치과의사 중에 지배 권력의 일방주의를 경계하는 <녹색평론>을 구독하는 독자도 많았을 텐데, 배신감이었을까? 기득권을 쥔 과학자라도 새롭게 전개되며 설득력을 갖추는 과학적 논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고 토머스 쿤이 지적했지만, 수돗물 불소화 주장은 억지에 가까웠다. 밀어붙이려는 세력에 의해 검증은 등한시되었고, 결론은 왜곡되었다.

▲ 故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프레시안

김종철 선생은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다. '생태시'를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그는 현장을 외면한 시어를 높게 평가한 적이 없다. 기득권의 탐욕을 견인해온 효율화는 화석연료 과소비를 불러들였고 기후변화는 위기로 치달아가는데, 우리 사회는 군사정권 이후 노골적으로 개발, 발전, GNP, 선진국 타령에 젖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생이 "<녹색평론>을 발행하지 않았다면 미쳐버리거나 열병에 걸렸을지 모른다" 하고 토로한 계기는 끊임없는 공부였다. 해외에서 발간하는 숱한 자료를 눈여겨본 생태적 시각이었다.

평소 탐탁하게 여겼던 사람들과 얼굴을 붉히지 않고 논쟁하려면 충실한 논리가 기반이어야 한다. 김종철 선생은 골치 아픈 과학 이론에 접근했지만, 수돗물 불소화 논리는 허술했다. 누가 이빨을 이야기하자 했나? 수돗물에 넣으면 불소가 몸에 들어가 축적된다는 건 과학적 사실이다. 화합력 높은 불소가 체내 세포와 엉뚱하게 결합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살펴야 옳지 않은가? 뼈에 불소가 축적돼 치명적 질환이 발생한 사례는 해외에 넘쳤다. 인문학자도 확인한 과학적 검증인데, 불소화 사업을 추구하는 측은 보건사업이라고 우겼다. 아이 양치시킬 여유가 없는 맞벌이 가족을 배려한다지만, 과학적 논리가 아니었다. 불소 마시지 않아도 이를 깨끗하고 단단하게 만들 대안이 제시되었건만, 한사코 외면했다. 보건과 거리가 멀었다.

우리 의학계가 지금도 창피하게 생각하는 연탄가스 중독에 대한 빙초산 처방처럼, 근거 없이 앞세우는 복잡한 용어와 수치는 과학과 거리가 멀다. 환호에 정신 못 차리는 과학은 교활한 정치를 이길 수 없다. 미국이 그랬고, 우리의 많은 치과의사가 미국에 유학했다. 우연한 발견과 관계없이, 수돗물 불소화를 과학적 행동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저열한 논리보다 과정의 비과학과 비민주성에 경악한 김종철 선생은 현장에서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다소 거칠었던 논쟁은 전국 상수도 사업장에 불소 설비를 거듭 제거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김종철 때문'에 '비타민F'로 추켜세우려던 불소가 '위험한 독성물질'로 환원되었다.

"앞으로 누가 강에서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이명박 정권이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일 때, 김종철 선생의 일갈이었다. 토목공학자가 포함된 반대 토론회에서 거론했더니,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긴급한 순간에 과학자가 영문학자와 시를 언급하다니, 한가롭지 않은가? 하지만 생각해보라. 다채로운 생물로 어우러진 생태계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단을 잃은 사회는 얼마나 삭막한가. 공정하든 공정하지 않든, 경쟁의 승리가 권리를 독점하는 사회는 다양한 의견의 소외로 이어질 것이다. 아름다운 모습을 아름답게 이야기할 기회가 차단된 사회, 배려를 잃은 사회에 사이코패스는 만연한다. 기후위기를 부른 개발독재는 어떤 내일을 구상할까?

2005년 10월 4주 차 <PD수첩>은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 부정을 특집으로 편성했다. 1년 가까운 심층취재의 결과였건만, 근거 없는 열광에 휩싸인 우리 사회는 당시 MBC의 <PD수첩>에 저주를 퍼부었다. 불매운동을 선동하자 광고주를 거푸 잃은 <PD수첩>은 급기야 방송에서 제외되기에 이르렀다. 그때 김종철 선생은 사비를 털어 <PD수첩>의 광고주를 자청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평소 상품 광고에 관심이 없었으니 텔레비전 광고가 제작돼 송출되는 복잡한 절차를 생각하지 않은 실수였다. 광고가 대폭 줄어도 준비한 영상을 몇 차례 방영한 <PD수첩>의 담당 PD는 선생의 마음을 깊이 고마워했다.

요즘 과학은 이론을 밝히는 과정에 머물지 않는다. 기술과 결합해 '과학기술'로 거대해지더니 '청부과학'으로 훼손되고 말았다. 청부과학은 이권을 노리는 자본과 패권을 원하는 권력에 아첨한다. 이익의 부작용인 손실과 패권의 대가로 발생하는 고통은 사회와 후손에게 전가된다. 청부과학으로 인한 폐해가 참기 어렵게 확대되자, 사회 일각에서 새로운 과학기술 정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과학기술을 사회에서 통제하자는 시민의 요구인데, 다양성을 존중하는 인문적 사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녹색평론>이 지향하는 '생태적 상상력'이다.

최고위 선출직 공직자를 원하는 어떤 비과학자는 젊은이 앞에서 "인문학은 과학의 보조 역할이면 충분"하다는 취지로 이야기했지만, 인문학 잃은 사회는 삭막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 생태적 다양성을 잃은 콘크리트 도시에 코로나19는 비행기와 고속도로를 타고 확산한다. 다양성을 잃은 사회는 독재를 초대할 가능성이 큰데, 청부과학은 어떤 역할을 자청할까? 기후위기는 다양성을 잃을 때 심화하고, 미래세대의 생존은 그만큼 위태로워진다.

선배 생태학자의 서고에서 <녹색평론>을 꺼내지 않았다면 "과학은 정치의 시녀"라는 자괴감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녹색평론>을 정독하지 않았다면 생명공학을 비판하는 생물학자의 길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녹색평론>을 읽고 두 달마다 마음을 다시 잡는 생물학자는 김종철이라는 비빌 언덕을 잃었다. 이제 미래세대의 생존을 위한 비빌 언덕으로 거듭나야 하기에 <녹색평론> 과월호를 뒤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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