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임신중지 워크숍'이 열렸다. 아마도 한국에서 처음으로 임신중지를 허가와 금지의 대상이 아니라 '의료기술'로 다루었을 이 행사에 350여 명의 산부인과 의사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 화상 워크숍이었음을 고려하더라도 전국에 산부인과 의사가 6000명 남짓임을 생각하면 대단한 관심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임신중지는 가임기 여성이 경험하는 가장 흔한 의료 시술이다. 최근 정부가 수행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에서 시술되는 임신중절 건수가 연간 약 5만 건에서 17만 8000여 건에 이른다.(☞ 바로 가기 :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2018년) 주요 결과) 2019년 약 15만 명의 여성이 제왕절개 수술을 받은 것과 비슷한 숫자다. 일주일 기준으로 약 1000~3000명의 여성이, 하루에는 150~500명의 여성이 임신중지 시술을 받는 셈이다.
이 숫자는 진실일까? 여성들의 회고적 보고를 통해 시술 건수를 추정하는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가 제시하는 결과는 상황을 부분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중요한 것은 형법이 대부분의 임신중지를 불법으로 규정했기에 한국에서 임신중지가 얼마나 이루어지는지는 제대로 집계되지 않고, 의료인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그와 관련한 연구도 진행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수동태'로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만, 이는 책임을 회피하는 흔한 방법이다. 우리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법이 있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필요를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원치 않는 임신과 임신중절을 경험하는 여성들의 고통을 외면해 왔다.
여성의 몸을 둘러싼 이런 정책의 모습은 오랫동안 우리가 이야기해왔던 사람중심적이지 못한 국가의 작동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최근 정부는 '저출산'을 중요한 사회문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한 다채로운 정책을 내어놓고 있다. 이 정책들은 필연적으로 여성들의 재생산하는 몸(reproductive body)과 직면한다.
이때 문제는 '저출산'이 개별 여성의 몸, 고통과 한참 떨어진 위치에서 여성 당사자를 배제한 채 사회적 의제가 된다는 것이다. 하향식 정책 결정은 정책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단지 숫자로 나타낼 뿐 그들의 삶과 무관한 목표를 제시하고 일방적으로 실행한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을 대안으로 삼아 이를 담당하는 부서를 지정하는 일은 관료적 관행이라고 치자.(☞ 관련 기사 : <시사저널> 2018년 8월 29일 자 '낙태 허용하면 출생률 더 줄어든다고?') <선녀와 나무꾼>의 어떤 폭력을 되풀이하듯 아이 둘을 낳으면 임대료를 면제해주겠다는 차마 웃지 못할 정책이 추진된 것은 놀랍게도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다.(☞ 관련 기사 : <경향신문> 9월 9일 자 오피니언 '돈이 사람을 돌볼 수 없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가 여성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판단이 내려진 이후에도 상황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정부는 여느 때처럼 간편하게 의견을 수렴한 모양새만 낸 후 입법부가 논의할 시간적 여유를 거의 남기지 않은 시점에 법률개정안을 내놓았다. 국회는 헌법재판소가 지정한 2020년 12월 31일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모자보건법과 형법 개정안을 처리할 생각이 없다.
보건복지부는 법이 없으니 건강보험 급여를 비롯한 사안은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버티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의료계의 눈치를 보며 어떤 절차를 거쳐 임신중지 약물을 들여올지에 관한 결정조차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낙태죄를 폐지하자고 외치고 행동해 온 시민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보편의 고통과 어려움을 책임지는 정치는 여전히 어디에도 없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던 대통령의 정책에도, 슬슬 윤곽이 드러나는 대선후보들의 공약에서도 임신중지와 성적 자기결정권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이를 사람중심적이지 못한 정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과적 임신중지 의약품(미프진) 도입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 명이 넘는 동의를 받은 일이 두 번이나 있었고, 헌법재판소의 결정 역시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재생산 운명(reproductive life)을 결정할 권리를 보장할 책임이 국가에 있음을 인정했다. 이제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라는 변명은 사안이 복잡하다는 뜻이 아니라 관련한 국가의 책임을 적극적으로 회피하겠다는 정치적 의지와 다름없다.
임신중지를 연구해 온 연구자들은 한 나라에서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s)의 상태가 그 나라에서 인권의 수준을 보여주는 대리지표라고 말한다. 개별의 사람들이 드러내 표현하기 힘든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 영역인 만큼 대변과 대표가 쉽지 않고, 그 결과 보장되는 내용이 인권의 하한에 놓이기 쉽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수많은 한국의 여성들은 직접 나서 말하고 요구했고, 우리가 모두 목격자다. 이제 공적 권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국가의 책임을 물을 때다.
본디 임신중지는 불법과 비공식이었으니 마찬가지인 셈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여성들이 겪은 고통을 현재의 여성들이 반복해서 겪어야 한단 말인가? 최근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는 것으로 이 사안이 급박한 일상의 현실이라는 점을 거듭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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