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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과 함께 노동자가 사는 문화현장 속으로

[탈춤과 나] 20. 김봉준의 탈춤 ④

우리는 졌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민주주의 소생과 가정이 생긴 내 생존을 동시에 고려하며 삶의 방향을 정해야 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예술인에겐 별로 뾰족한 수가 없다. 우선 내 고향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다시 민중 속으로 하방하며 문화운동도 하고 밥을 벌어보고 싶었다. 우리의 민주화운동이 정치꾼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고 민중들이 스스로 각성하는 방법 밖에는 달리 길이 없어 보였다. 그러려면 민중이 자신들의 문화를 스스로 가질 것이고 이 길에 동행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나는 당시 작은 공장이 많은 부천으로 내려가 노조들의 문을 두드렸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노동조합을 상대로 주문제작 미술공방을 세우는 한편 노동자 청년들이 맘 놓고 풍물을 배울 수 있는 강습 마당을 하나 차리는 것이었다. 내 판화를 찍어 부천시민에게 호소하며 기금마련을 했는데 의외로 빠른 기간에 목표 액수가 만들어져 문화공간 <복사골 마당>을 건립할 수 있었다. 지금도 노동자 출신 후배들이 잘 운영하고 있다. 그 다음 부천에서 노동운동을 공부하고 조합마다 풍물 노래 판화 그림 문화패를 만들어주러 다녔고 부천노조연합에 문화예술위원회를 만들어 문화써클을 지원하고 파업투쟁문화를 도왔다. 총파업 때는 미술공방으로 밀려오는 주문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총파업으로 거리로 가두 투쟁을 할 적에는 <흙손공방>에서 만들어 준 머리띠와 현수막과 티셔츠를 입고 내달렸다. 미술공방 <흙손>은 연세대 학생회가 모금한 '이한열열사추모비' 제작의뢰비로 전세 보증금을 만들 수 있었다. 번창해서 미술공방에 직원(문화계 후배 이덕신의 여동생 이지녀가 그 직원이다)도 두고 전국 민주노조를 상대로 주문 제작을 하였으니 티셔츠, 카드 달력, 걸개그림 현수막, 심지어는 노조 간판까지 미술품은 다 주문 제작을 했다. 소리청이 타고난 이지녀는 나의 권유로 서도소리를 배우게 되었고 나중에는 김금화 신딸이 되어 무녀가 되었다. 흙손공방 시절 글씨 솜씨도 늘었다. 글씨와 로고 있는 티셔츠 주문이 많다 보니 저절로 글씨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화동류(書畫同類)인 우리 겨레붓은 그림과 글씨가 이어지기 용이한 서화필이었다. 미술이란 것이 고급진 감상용 미술만 있는 게 아니고 선전 미술도 필요하다. 모든 예술은 순수하다고 말하기보다 넓게 보면 모두가 선전이다. 생활 속 미는 말할 나위가 없이 상품의 미로 파고든다. 의식주와 공공시공간도 다 미술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세 가지를 다 병행하는 미술공방운동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민중적 삶 속에서 배우는 예술이라고 보았다. 전노협 시절은 그런대로 공방 운영이 잘 되었다.

▲<해방의 그날까지> 실크판화 1990년 김봉준 작ⓒ김봉준
▲<춘투> 목판화 1991년 김봉준 작 ⓒ김봉준
▲<총파업 투쟁> 아트만지에 붓그림, 60x120cm 1990년 김봉준 작 ⓒ김봉준

그러나 그후 민주노동운동은 자기들끼리 노선 갈등이 심해지면서 당파성 논쟁도 강해졌다. 노조의 문화패들은 노동조합 안에서 보호받아야 하고, 대중적 노동운동에서 꼭 필요한 것 같은 데, 노동자문화로 더욱 성장하길 기대한 나는 미술공방 운영이 타격이 오는 것에서 노동문화의 앞날이 어둡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주문 미술공방이었던 <흙손>도 5년 여의 경영 끝에 문을 닫았다. 내가 노동조합운동이 문화예술로 중흥하기를 바랬던 입장에서 노동조합운동의 지나친 갈등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노동운동에는 PD 민중해방노선과 NL 민족해방노선이 심한 갈등을 펼치고 있었으니, 노동조합운동을 센 정치적 목표를 잡고 몰아가는 것이 불안해 보였다. NL은 민족모순에 편향된 관점으로 보였고, PD는 계급모순에 지나치게 경도되어서 노동조합운동에서 경제적 투쟁과 문화적 정체성 만들기는 점점 더 어렵게 보였다. 더 이상 노동운동에 직접적 관여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겨레의 춤 12마당> 실크판화 1991년 김봉준 작 ⓒ김봉준

내가 직접 운영하던 노동상담소도 노동운동단체협의회에 반납하고 <흙손공방>도 정리하고 싶었다. 주문도 이제 잘 안 들어오니 더 운영할 자신마저 없어졌다. 몸도 축나고 도시에서 더 다른 희망을 못 찾겠다 싶었다. 이러할 즈음 마침 미술계에서 요청이 들어와 초대 개인전 준비를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예술인이고 작가"라는 사실을 새삼 인정하며, 창작예술에 몰두하기에 이르렀다. 판화와 유화를 다시 시작했다.

노동자와 지역 시민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제작하는 공방은 뜻을 펼치려는 소비자의 요구를 받아서 제작하는 것이므로 나 혼자만의 일방적 생산과 창작과는 다른 긴장을 느껴야 한다. 그런 시절이었다. 실크스크린 공방을 운영하며 새 기법도 내 것으로 만들어갔으니 목판화와 다르게 경쾌하고 예리한 필선을 살려서 신명을 돋구는 그림을 창작해냈다. 예술가가 가장 기쁜 날은 창작이 나올 때이다.. 춤과 춤그림은 나에게 잃어버리면 안되는 이완의 미학을 찾게 했다. 외완을 하고 다시 긴장으로 가는 난장, 풀어내고서 맺는 감성풀이를 시각예술로 반드시 성취하리란 간절함이 통했나. 어느날 갑자기 12점의 춤이 내 몸 기억 속에 있다가 붓으로 풀려 나왔다. 춤사진으로는 잡히지 않는 그림들이 나왔다. 내가 추었던 탈춤과 농무들을 모아서 판화를 한 것이다. 혼자서 십오 년전 몸의 기억을 되살리느라 달밤에 춤을 추며 이미지를 만들기를 이틀 만에 드디어 <겨레의 춤 12마당>이 나왔다. 몸은 의식 저 깊은 곳에서 또 다른 기억을 저장하고 있다. 합리적 이성보다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든 영적 힘이라고 하든 몸에는 무의식 세계가 있다. 지금 이렇게 강하게 국가와 자본의 예속 상태를 벗어나는 경건한 소원을 예술창조로 갖기를 희망한다. 존재는 행위이며 창조이다. 우리는 자아의 의지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활동하는 일상 행위에서도 거르지 못하는 맑은 빛을 식별하자.

몸과 마음을 이완 상태로 풀고 난 후에 비로소 새 긴장을 만드는 것, 붓을 손아귀 힘으로 쥐는 필력이 아니라 붓가락을 잘 알고 몸풀 듯 쓰는 붓이 중요하다. 붓이 자기 신체가 되듯 갖고 노는 경지가 요구된다. 역시 고구려 벽화 때부터 내려오는 우리 황모장필(黃毛長筆)의 붓은 우리 겨레의 춤과 같은 겨레문화의 원형질이다. 맺고 풀고가 아니라 풀고 맺는다. 풍물패는 난장 트고 어우르고 나서 몸을 푼 후에 세상을 만나는 길굿으로 들어간다. 새로운 놀이로의 초대 없이 겁먹은 전사처럼 마당에 들어가지 마라. 그들은 내 얼굴을 못 본다. 나는 탈을 쓰고 있어서 완전히 다른 탈광대가 되어 너희들을 웃기고 울리며 영적인 신명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탈은 그렇게 예술마당의 비의(秘儀)를 가르치고 있었다. 붓도 나에게 하심하며 이완하는 필법의 비의를 전승해 주었다. 붓은 고조선 부여의 오랜 전통이다. 동이족이 사냥하면 잡은 동물의 고기와 가죽만이 아니고 황모털을 붓으로 만들어 쓴 것을 고구려벽화에서 지금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조선불화 금어스님 내 선생의 붓 만들어 쓰는 모습에서 눈치를 챘다. 아하 붓을 만들어 쓰는 전통이 오래되었구나. 난 그 붓을 아직도 사용하며 목판화 밑그림도 그리고 붓그림도 그려 왔다. 내 그림은 이완되어 있다. 그러면서 붓가락을 타고 휘청거리며 긴장한다. 지나치게 긴장감 많은 저 노신판화나 서양리얼리즘 묘사와 다르다. 황모털은 부드럽고 따듯하기까지 한 유기물질임을 잊지 말자. 펜이나 연필이나 서양 부러쉬와 무엇이 다른지 서서히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붓으로 그리고 쓴 로고타입들, 김봉준 작. 흙손공방 시절에 익힌 디자인 솜씨들 ⓒ김봉준

▲ (맨위) <길놀이> 1992년 나는 이런 형식을 붓그림판화라 명명했다. (맨 왼쪽) 2019년 3.1백주년 때 사용했던 그림글씨들과 시민단체 깃발 디자인. (가운데와, 맨 아래) 시민단체 글씨 로고디자인 나눔  (맨 오른쪽) 2017 촛불혁명 당시 나라굿 풍물패 깃발 ⓒ김봉준
▲<야행> 유화 100호 1991년 김봉준 작. 1991년 가나아트 초대 개인전에 내어 놓은 그림 ⓒ김봉준
▲<대지에 누은 사람> 유화 30호 1991년 김봉준 작. 가나아트초대전 작, 이 때가 유화의 청색시대였다. ⓒ김봉준

도시를 떠나 홀로 가기

1993년 여름 이제 도시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부천시 공장들도 제3의 해외기지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그 자리에 대형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더 이상 도시에 살기 싫어졌다.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시골로 가기 힘들다고 혼자 가란다. 붙드는 딸아이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도시를 떠났다. 혼자서라도 가고 싶었다. 내 몸이 말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못살 것이다. 지금까지는 탈춤운동과 민중운동 속에서 '묻어가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진짜 '홀로 가기' 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부터가 내 인생 진짜 진검승부 같았다. 나는 미술작가로만은 살아남아야 한다. 내 목소리에 음색이 있듯이 내 시색을 찾아 거듭나고 싶었다. 창작예술은 세계관의 거처가 있어야 한다. 거창하게 사상의 거처는 못 찾아도 내 미의식이 힘 솟을 거처는 더 이상 도시가 아니었다. 자연과 어울려 살면서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부천 복사골마당 마련 기금마련에 판화를 구입하였던 강영석 내과 원장이 계셨다. 이분이 사둔 강원도 원주 문막 땅을 구경 간 적이 있었는데 일당산 중턱 깊은 산골에 파농한 산비탈 농지를 갖고 계셨다. 고교 선배님이기도 한 강영석 내과원장에게 그 땅 좀 사용할 수 있을까요? 제가 화실을 그곳으로 옮기고 싶다 했다. 즉각적으로 허락을 해주시니 이렇게 해서 여기서 살게 된 지 이제 30년이나 되었다. 숲만 보이고 집 한 채 없는 산 중턱이었다. 대충 집터가 있었다는 곳에 조립식으로 집을 지었다. 부천에서 강원장님 소개로 중고 건축자재를 지원받아서 인건비만 200만원 주고 40평 집을 지었다. 나머지는 나와 1993년 한 여름 일이다. 사람들보다 자연이 좋았다. 함바집에 살아도 싱그러운 공기가 좋았고 짐승 울음소리도 노래처럼 들렸다. 직접 맨땅에 집을 짓고 처자식 놔두고 혼자 들어온 화실 생활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나를 도시에서 탈출하게 놓아준 아내와 딸, 그리고 터를 내주신 강영석 형님께 늘 고마워하며 산다. 가난한 화가에게 후원자란 소중하다. 누구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이나 미술품을 누가 구매를 하는 지도 작가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예술인의 작업은 지원자가 누구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돈 가는 데 마음이 끌린다. 나는 몇 분의 패트론과 무명의 시민 고객들과 공방 미적 기술자로 생존해왔다. 4종 철인종목 운동선수처럼 나는 판화 회화 조각 서예를 같이 하는 미술가로 생존력을 키웠다. 탈춤을 추던 벗들도 도시에서 민주화운동 같이 하던 동지들도 잊혀져 갔다. 농산물 산지 직거래하듯 산골화실을 베이스 캠프 삼아 작품을 현지에서 직판하며 나의 미적 이상을 굽히지 않았다. 끝까지 이 길에서 예술인생을 마무리하고 싶다. 탈춤 추던 광대처럼, 풍물 치던 굿패들처럼, 장날에 민화장처럼 민간의 생활마당에서 질기게 생존하는 민간문화 예인이고 싶었다. 나의 자랑 하나 있다면 산골에서 돈을 벌어서 아내에게 매월 빠지지 않고 생활비를 보냈다.

산골 생활 30년을 돌아보면 주력했던 공부가 있다. 탈을 그리다가 우리 겨레붓을 나 는 좀더 자유롭고 익숙하게 다뤄야 했기에 이 황모장필로 고구려벽화, 조선초상화, 풍속화, 산수화 등을 수 년간 독공했다. 마침 동아일보 연재 하일지 판 아라비안나이트 신문삽화 2년, 매일경제, 영남일보에서 소설 삽화 의뢰가 들어와 3년간 근 1000장의 조선 붓으로 그린 삽화도 도움이 되었다. 이 붓그림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은 고구려벽화에 쓰던 붓이 이런 황모장필 붓이었다는 확신과 닥종지에 황모필이 우리 회화의 원형질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점점 흐르며 조선의 무화 불화 민화 풍속화 진경산수화로 확산되며 조선 회화의 주류를 이룬 것이다.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았고 이어지고 있음도 알겠다. 붓을 어디를 쥐고 어떻게 쓰느냐의 차이이지 거의 같은 붓, 동이족의 붓 내림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국립박물관 풍속화실이나 산수화실에 가서 고서화를 관찰해 보시라. 거의 모두 닥종이에 황모필이다. 화선지에 백모는 조선 후기에 중국에서 수입해 들어온 것이다. 탈춤도 마찬가지로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춤과 우리 조선후기 탈춤은 연결되어 있다. 풍물도 마찬가지다. 내가 1977년 배운 고쩨의 지리산 풍물굿을 배우며 이 가락과 춤과 뜰밟이는 무지무지 오래되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부여의 영고와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축전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 농부들도 몇 날 며칠을 술 마시고 춤추며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굿치고 뜰밟이하며 놀았을 것이다. 우도농악과 다르게 산골 풍물 농무는 아래 위로 겅중겅중 뛰는 무당춤과 흡사했다. 이런 도무를 집단적으로 추니 한 덩어리처럼 출렁출렁거렸다. 오랜 예술이 이 땅과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살아 있음은 참 고마웠다. 동학이 일어나고 탈춤과 풍물이 우리 시대로 계승되어 마당극 마당굿 탈춤 굿 소리로 그나마 한 모퉁이지만 생존하고 있는 것이 기적 같은 부활이다. 우리 K팝, K드라마, K한글, K방역, K아트가 세계인들이 좋아하는 것과 우리 겨레 신명의 예술 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K컬쳐의 씨알 같은 문화를 공부했던, 탈춤운동 했던 세대가 자랑스럽다.

▲ <숲으로 가는 길> 산수화 장지에 황모붓, 50호, 1998. 김봉준 작. 산골 화실로 가는 길을 그린 겨레붓그림 ⓒ김봉준
▲<붓으로 그린 산그리메 물소리> 1997 강출판사, 그동안 공부한 미술창작 에세이. 산골에서 과거를 정리하고 힘찬 새 출발을 다짐했다. ⓒ김봉준

숲으로 가다

나는 1993년 이곳 강원도 원주 문막 산골로 이사 와서 내년이면 햇수로 산천 생활 30년이다. 회향 30년인 것이다. 이제는 여기 풀벌레 소리가 익숙하고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사는 게 익숙한 내 삶이 되었다. 사람 소리 거의 없는 조용하고 청정한 땅에 환경 귀족처럼, 산골 중처럼 숲 속 옹기 굽는 즈엄 장인처럼 살고 있다. 이게 내가 청소년 적부터 꿈꾸던 미래였으니 지금 꿈 꾼대로 살고 있다. 여기서 <산 그리메 물소리>로 붓그림을 정리했고, <숲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로 판화를 정리했고, <신화순례>를 집필했다. 45년을 탈춤에서 시작해서 <신화미술관>을 세우고 신화예술까지 달려왔다. 이제 내가 일할 수 있는 해는 10년 정도이다. 이제 세수 68, 많이 살았다. 앞으로 10년 그 이상은 힘이 벅차서 못할 것 같다. 지금도 어깨 팔 근육이 쑤시고 허리도 아프다. 다행히 왼팔부터 왔으나 사방이 고장 난 몸이 될 터인데 십 년만 하면 끝이다. 내 주변에 갑자기 사라지는 선배 동료들 보면서 인생무상을 느낀다.

세상을 뜬 분들

세월에 장사 없다. 내 주변에도 사람이 떠나고 있다. 우선 아버님이 2017년에 떠나가셨다. 나를 엄하게 키우시려 했으나 나에겐 그것이 상처가 된 추억만 있는 아버지가 아니다. 아버지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미술임을 아시고 끝까지 밀어 주셨다. 만일 아버지가 대학을 가지 말아라 하셨다면 나는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이 공부를 좋아하셨고 고교 선생님을 오래 하셔서 그런지 아들 큰 장래를 우려하셨다. 아버지는 4.19 당시 중앙고교에 계셨는 데 그 때도 학원민주화운동이 일어 학생들 추대로 '학원비리개선대책위' 같은 것을 맡으신 모양이다. 그러나 바로 1년 후 5.16을 만나서 학교를 사퇴해야 했고, 다시 지학 책을 집필하여 검인정 교과서 공모에 냈던 것이다. 당시 새로운 교과목이 만들어지면서 첫 검인정교과서 보급이 필요한 문교부는 공모를 실시해서 새로운 지학 교과서를 발간한 것이다. 다시 당당히 명교사로 학교로 복귀할 수 있었다. 수학 물리 지학의 교사자격증을 다 갖고 계신 아버지는 훗날 자식들 넷을 다 대학 보내려고 학원강사로 전환하게 된다. 아버지는 내가 홍대 미술대에 들어가서 교직선택을 안한 것을 걱정하셨다. 졸업 후 직장으로 미술교사가 편한 데 가급적이면 하라는 것이다. 나는 끝내 아버지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아빠처럼 교사로 평생을 바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박인배 님이 나의 아버지 장례식에 조문왔었다. 소식을 알리지 않았는 데 뜻밖에 출현이다. 그날 조문을 끝내고 배웅하는 데 걸음걸이가 영 힘이 없고 비틀거리는 것이 뒤에서 보인다. 병이 깊어졌다. 오랜 당뇨병을 앓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말하고 웃기를 즐기는 낙천적인 사람. 그는 서울대 문리대 물리과를 나왔으면서도 연극에 심취해서 마당극운동을 펼친 문리대 연극반 재원이다. 특별한 재기는 없는 데 풍물을 좋아했고 노래패 <꽃다지> 창작하고 연출하여 1990년대 노동자 대형 노래마당을 대학가와 노동조합으로 노동자 단결의 노래, 민주투쟁의 노래를 대중화한 인물이다. 세계마당극축제도 이끌었다. 한 때 나와 함께 현장파 문화운동자들로 불렸던 사람이다. 박인배, 황선진, 연성수, 김봉준 등을 노동 농민 현장으로 민중문화를 앞장서서 보급하고 공연하던 자들을 그렇게 불렀다. 민문협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우리 이제 다시 모이자." 이런 말을 하고 헤어졌던 박인배를 장례식 영정으로 보았다. 나보고 조의의 말 한마디 해 달라는 갑작스런 제안에 준비 없이 한 마디 했다. "박인배, 이 분은 1980년 계엄군에 붙들렸다가 취조 도중 탈출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그 시절부터 지병 당뇨병을 앓으며 40년을 살았다면 짐작이 간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몸을 지켜야 했고 그만큼 고생을 더 하면서 문화운동을 했다. 그는 시민이 예술가다는 지론을 실천했다. 촛불혁명에서 시민들이 자기표현을 하며 광장의 예술가로 등장하는 모습을 먼저 알아보았다. 바람보다 먼저 쓰러지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섰던 영원한 문화운동가다."

박인배 장례식장에 머리를 빡빡 깍은, 그러나 낯익은 한 분을 만났다. 김구한님이다. 세브란스에서 암치료 받으러 입원했는 데 박인배 장례식을 알고 내려왔다고 한다. 깜작 놀라서 무슨 암이냐 물으니 폐암 말기였다. 우우, 암중에서 가장 치료가 어려운 폐암 말기라니.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문화운동계 후배들 보고 오히려 농담으로 받아넘긴다. 김구한 님, 이분은 서울대 국악과 입학 후 학풍이 안 맞는다고 다시 시험 쳐서 서울대 미대 조소과로 다시 입학한 미술가이다. 그러나 이 학풍도 마뜩치 않아 이천 도공들에게 찾아가 도자기를 배운다. 1980년 5.18 광주항쟁 접하고 도저히 이런 사치스런 예술공부하기 싫었다는 것이다. 삶의 예술도 아니고 약속권끼리 위안이나 삼는 화인아트가 체질에 안 맞는다는 것이다. 이런 형을 만나러 '80년대 초 채희완 선배와 이천 도예공방 현장으로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뜬 후였다. 일본의 여인이 찾아와 살림하다가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그후 오오사카 교민 중심으로 <우리문화연구소>를 차린 주역이었던 사실을 알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형님에게 미술실천을 하는 데 큰 영향을 준 분이다. 내가 도시를 떠나 산골에서 공방생활을 막연히 그리워할 적에 먼저 그 모범을 보이며 이천에서 자기 가족들 모아 가족 노동으로 삼인행 동예공방을 만들고 자력으로 생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인아트는 자기들 약속권끼리 주고받는 가짜 유통시장이다. 공방에 찾아가면 늘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면서 단호하게 "지금 미술은 민간생활과도 상관 없고 민중과 소통도 아니다"는 일갈을 들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선배가 있다니! 반갑고 든든했다. 동경대 미학과 석사를 나오고도 한국의 대학으로 진출하지 않고 장인으로 살다 간 민간예인이다. 이분이 돌아가시고 유골함 무덤을 그가 살던 <삼인행> 공방 뒤뜰에 묻었는 데 김구한추모위원회(회장 주재환)는 도자기로 비석 하나 세웠다. 내가 글그림을 황모필로 이렇게 아래 그림처럼 썼다.

ⓒ김봉준

이애주 누님이 2021년 올해 돌아가셨다. 일 년전 동숭동 민예총 총회 자리에서 만난 0것이 마지막이다. 그 때 뒤풀이에서 옆에 앉은 나를 보고 묻는다. "봉준이는 왜 1986년 시청광장에서 이한열추모제 할 적에 안보였어?' 아직까지 모르시겠구나 싶어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당시에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서 미주지역으로 파견 보냈어요. 청년동포들 탈춤풍물강습을 요청하니 강습을 하고 오라해서 거기 있었습니다. 거기서 풍물패들을 만들어 미국백악관 앞에서 데모했습니다. 거기도 여기 유월항쟁 같은 한국민주화에 대한 동참이 강해서 그 열망에 부응하다보니 몇 달을 미국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라고 하니 그제야 이해한다며 웃으신다. 아마 그 날 광장에서 시국춤 출 적에도 나를 찾았을 것이다. 탈춤 추던 화가, 당신이 아끼던 후배가 사라지니 의아했을 것이다.

누님은 내가 첫 개인전을 열던 1985년 전시장에 장고를 들고 제자들과 갑자기 나타나 열림의례춤을 추어 주셨다. 갑작스런 환영에 너무 고맙고, 선배의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 느꼈던 감동적 경험을 갖고있었다. 그전에 '80년대 전반인데 <나눔굿>을 장충동 국립국장 소극장에서 춤 발표회를 할 적에도 탈춤 마당극 하는 후배들을 잔뜩 출연시켜 오지게 한 판 공연을 펼친 바 있었다. 그 때 거지광대 역으로 판소리하던 김명곤 배우와 맞수로 출연한 기억이 난다. 탈반 출신 이태환님도 광대로 나왔는 데 그 때 내가 들고 추던 거지깡통에 얼굴 눈두덕을 긁혀 피를 흘리고 꿰매기까지 한 큰 사고를 친 일도 있다. 이번 누님 장례식장에서 다 만날 수 있었다. 그후 실학축전, 독도평화제, 바이칼천지굿등을 함께 했다. 2009년 원주에서 강원민족예술인수상기념김봉준미술전에도 단원들을 이끌고 오셔서 거나한 춤판을 보여 주었으니 원주사람들이 오랜만에 눈호강하였었다. 누님은 대학탈춤운동을 채희완 선배와 시작한 분이라 나같은 탈춤꾼 출신을 아꼈다. 몇 안되는 춤추는 그림쟁이니 더 애틋하게 보았던 것 같다. 동숭동에서 만나고 일 년 후 세상을 떠날 줄이야.

제부되시는 임진택 선배님이 급하게 이애주문화재단 로고글씨를 써달라는 부탁이 와서 이상해서 물어보았다. 애주누님이 지금 위독하신 데 돌아가시기 전에 재단법인을 만들어야 하는 데 로고를 만들어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해야 하고 현지 조사도 나온다고 한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넌지시 암 말기로 병원 중환자실에 계신다는 것이다. 아, 누님, 능력 부족해서 예인 광대짓 놓아버리고 산골 장인으로 사는 아우였습니다. 늘 부족한 신명과 모자란 재주에 큰광대가 못된 또랑광대를 용서하소서.

여기에 다 적지는 못하지만 문화운동을 하던 여러 선배님들이 떠오른다. 특히 공동체출판사를 하면서 <민중미술>과 <공동체문화> 무크지를 간행하며 민중문화운동 참여하였던 김도연, 민문협실행위원이였던 문학평론가 채광석, 나의 결혼 주례선생님이고 민중교육연구소장이셨던 허병섭 목사님, 창작과 비평사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상관으로 만난 김윤수 선생님, 탈을 같이 만들었고 미술동인'두렁' 고문을 해주신 오윤 형 등이 먼저 세상을 뜨셨다. 살아계신다면 지금도 함께 교류하고 싶은 분들인데 세월에 장사가 없네.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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